죽음의 무도. 야코프 폰 빌, 스위스 루체른 시청사(1610~15) .
교황의 죽음
‘죽음의 무도’는 주로 교회, 수도원, 또는 묘지의 벽에 그려져,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우리 모두는 죽는다’는 종교적 메시지를 던져주었다. 그림은 교황에서 교회의 종지기까지, 황제에서 농부와 광대까지 누구 하나 빼놓지 않고 죽음의 무도로 초대한다. 당시 사람들은 길게 이어지는 그림 속에서 자신의 신분에 속하는 인물을 찾아 그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명상했을 것이다. 등신대(等身大)로 그려졌으니 그 시각적 효과가 대단했을 것이다.
교황에게도 죽음이 찾아왔다. 죽은 자의 복장을 보니, 교황청을 지키는 스위스 용병의 모습을 닮았다. 가톨릭 교리에 따르면 교황은 신 앞에서 모든 인간을 대표한다. 그는 죽을 때조차도 인간을 대표한다. 교황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 즉 우리 모두 언젠가는 죽는다는 진리의 구현이다. 원래 이 그림에는 텍스트가 붙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그러니 바젤의 ‘죽음의 무도’에 붙은 텍스트로 대신해보자.
죽음이 교황을 최후의 무도회에 초대한다. “교황이여, 그대부터 춤을 시작해야지. 그대가 첫발을 떼었으면 좋겠네. 머리에 쓴 관(冠)도, 손에 든 십자가도, 그대가 주던 면죄부도 이 최후의 스텝을 면하게 해주지는 못한다오.” 교황이 죽음에게 대답한다. “지상에서 내 이름은 거룩함이었고, 신의 이름으로 군림하며 신 없이 다스렸다네. 나는 높은 값에 면죄부를 팔았으나, 오늘 죽음은 내게 면죄부를 팔지 않는구나.”
카푸치노 승단
중세인들이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았다면, 근대인들은 가능한 한 의식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지우려고 했다. 그 때문에 ‘마카브르’, 즉 시체를 그린 그림들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특정한 영역, 말하자면 수도원 같은 종교적 결사체에는 중세의 마카브르 전통이 아주 늦은 시기까지 남아 있었다. 그중에는 우리 눈에 끔찍하게 보이는 것도 있는데, 그 충격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로마의 카푸치노 승단 예배당에 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로 유명한 이 승단의 예배당은, 실은 납골당이다. 음습한 복도를 따라 늘어선 네댓 개의 방. 방의 바닥은 검붉은 흙으로 되어 있다. 십자가가 꽂힌 그 흙 속에서는 죽은 수도사들의 몸이 썩어간다. 다 썩어 백골이 되면, 그 뼈를 꺼내 방을 꾸미는 재료로 쓴다. 두개골로 제단을 꾸미고, 갈비뼈로 천장을 장식하고, 넓적다리뼈로 샹들리에를 만들고. 납골당 한 귀퉁이에 라틴어 문장이 적혀 있다. “우리도 한때는 너희와 같았고, 언젠가 너희도 우리처럼 될 것이다.”
죽음의 무도, 뤼벡의 성마리아교회 벽화 부분(15세기).
로마 외곽의 카타콤베. 수십만명에 달하는 초기 기독교인들의 시체가 매장되어 있다는 이 음습한 화산동굴의 공동묘지 속에서 나는 무섭다기보다는 어떤 알 듯 모를 듯한 포근함을 느꼈다. 이 네크로폴리스는 죽은, 믿음의 형제들이 함께 사는 신앙 공동체가 아닌가.
카스파 메글링거, 슈프로이어 다리, 스위스 루체른(1623~ 32).
필리프 아리에스는 ‘죽음 앞의 인간’에서 죽음에 대한 서구의 관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추적한다. 그가 보기에 죽음에 대한 관념은 크게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 주로 누구의 죽음을 생각하는가. 둘째, 죽음에 어떤 전략으로 대항하는가. 셋째, 죽음과 악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 넷째, 죽음 이후의 내세를 어떻게 표상하는가. 이 네 가지 매개변수가 어떻게 결합되느냐에 따라, 그동안 기독교적 서구에 존재해왔던 죽음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 초만 해도 사람들은 공동체의 품에서 외롭지 않게 죽었다. 게다가 그때만 해도 종교적 신앙이 열렬했던 시대다. 그 시대에 죽음이란 부활의 그날까지 무덤에서 잠을 자는 것이었다. 죽음은 아담의 죄로 삶에 도입된 이물질. 따라서 죄를 뉘우치는 것으로 다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믿음으로 그들은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주님이 재림하는 날, 부활한 몸을 가지고 땅 위에서 영생을 누리리라 굳게 믿었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 시대의 죽음을 아리에스는 ‘우리들의 죽음’이라 부른다.
자신의 죽음 유일한 금기
중세 말에 공동체의 끈은 느슨해지고, 사람들은 개인주의화한다. 아직 영생에 대한 믿음은 강렬했으나, 죽음을 홀로 대면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점점 공포를 느끼게 된다. 마카브르 장르가 이 시기에 등장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당시는 페스트가 창궐하던 시기. 죽음은 정말로 도처에 있었다. 게다가 “속히 오리라”고 하셨던 그리스도는 1000년이 넘도록 오시지 않았다. 더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람들은 입으로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몸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만 천국에 오른다고 믿게 된다. 이 시기의 죽음을 아리에스는 ‘나의 죽음’이라 부른다.
17세기 바로크 시대에 신앙은 급속히 약화된다. 이제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현상에 신학적으로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접근하려 한다. 웬만한 이들은 저마다 집에 해부실을 갖춰놓는다. 이 늘어난 수요에 맞추려다 보니 방금 묻힌 신선한 시체가 도둑맞는 일도 있었다. 연인들은 오늘날 영화관에 가듯이 해부학 강의실로 구경을 다녔다. 죽음을 무서워하면서도 시체에는 끌리는 이 모순적 태도. 아리에스는 이 시기의 죽음을 ‘가깝고도 먼 죽음’이라 부른다.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죽음에 ‘혁명’이 일어난다. 신앙을 잃은 사람들이 죽음에 대항하는 유일한 전략은 죽음을 미화하는 길뿐. 타인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면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생각해보라. 쓰라림 속에도 뭔가 달콤함이 있지 않은가. 여기서 삶과 죽음 사이에 가치의 전도가 일어난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만큼 아름다운 것은 없고, 그이를 잃은 삶만큼 괴로운 것도 없지 않은가. 아리에스는 이 시기의 죽음을 ‘타인의 죽음’이라 부른다.
죽음을 미화하는 낭만적 감정은 더 이상 냉정한 현대인의 계산적 사고와 어울리지 않는다. 20세기에 들어와 한때 아름다웠던 죽음은 ‘반대물로 전화’된다. 죽음은 무섭고 추한 것이다. 그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전통적인 종교적 전략이 실패하고 낭만주의의 미학적 전략마저 실패한 이상, 현대인에게 더 이상 이 공포를 이길 전략이 없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죽음을 아예 잊기로 했다. 모든 금기가 사라진 오늘날, 유일한 금기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다.
로마 카푸치노 승단 납골당(18세기)
종교가 없는 이들은? 그들은 아리에스가 말한 대로 망각을 실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망각’은 그저 죽음을 떠올리지 않으려 하는 수동적 태도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망각의 시도는 때로 대단히 적극적이다. 가령 우리들은 화장, 패션으로 애써 늙어감을 감추려 하고, 운동과 요법으로 노화를 저지하려 하며, 놀라운 치료제에 관한 보도를 들으며 의학적 영생의 착각에 빠져들기를 좋아하지 않는가. 그게 다 죽음을 망각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사회에서 화장터가 졸지에 ‘혐오기피’ 시설이 된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집값이 떨어진다는 것이리라. 하지만 화장터가 왜 집값을 떨어뜨리는 것일까? 시체를 태울 때 나오는 오염물질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죽음’을 망각하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태도와 관련이 있다. 생각해보라. 화장터의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그것은 하늘에 씌어진 문장이다. “우리도 한때는 너희와 같았고, 언젠가 너희도 우리처럼 될 것이다.” 죽음을 잊어버려야 살 수 있는 현대인에게 이 메멘토 모리(죽음을 생각하라)보다 더 큰 고문이 있겠는가?
행복한 죽음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죽어가는 자의 고독’에 대해 얘기한다. 현대인은 저렇게 죽음을 망각하고 살아가다가 결국 아무 준비도 못한 채 홀로 죽음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만 해도 죽기 전에 자식들이 찾아오지만, 서구에서는 죽은 다음에야 자식들이 병원에 찾아온다. 죽음의 징조는 하얀 사각의 병실에 갇히고, 죽음의 증거는 병원에서 화장터로 신속히 옮겨져 깨끗이 태워진다. 죽음에 대항하는 전략을 잃은 사회는 망각도 이렇게 완벽하게 한다.
호스피스 일을 하는 사람들 말에 따르면, 종교가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죽음을 수월하게 받아들인다고 한다. 이 첨단과학의 시대에 아직 종교가 남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에 작고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철학이란 곧 죽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시간이 갈수록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군요.”(데리다) 반면 이번에 선종한 신학의 수장은 임종 침상에 모인 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들도 행복하세요.”(요한 바오로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