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대표적 미술품 경매 업체 서울옥션(왼쪽)의 경매 장면.17세기의 거장 베르메르의 작품. 희대의 모작범 반 미허른이 그의 그림을 베껴 세계적 미술관들을 망신시켰다.
“아, 정말 환기는 애처가인가봐. 하늘에서 계속 그림을 그려 보내는 거 보니!”
생전에 작가 김환기와 교제했던 그로서는 세상을 떠난 지 30년이 지난 김환기의 위작들이 ‘미공개’작으로 나돌며 화상과 컬렉터들 사이에서 팔리고 있는 것이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나 가짜 미술작품은 ‘말 없는’ 작고 작가의 경우에 한정되지 않는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견 작가의 위작들까지 화랑에서 버젓이 사고 팔린다.
이중섭 미공개작 200여점 진위까지 거론
한 인기 작가는 “위작 거래를 막기 위해 그림 판매와 이동 경로를 화랑을 통해 파악할 뿐 아니라 뒷면에 나만 알 수 있는 표시를 한다”고 말했다.
우리의 짧은 근대 미술사는 조금 과장하면 진품과 위작 시비의 역사이기도 하다. 서양미술, 즉 근대 미술이 일본을 거쳐 갑자기 이식된 까닭에 근대적 미술 시장의 관문이라 할 미술품 감정과 신뢰에 바탕을 둔 경매의 역사가 없었던 데다 6·25전쟁 등 사회적 혼란으로 작가와 작품의 ‘경력’(‘프로비넌스’)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서양에서도 수많은 위작들이 나왔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미술 시장의 역사가 길기 때문에 가짜 미술품 문제가 논란으로 끝나기보다는 진실을 밝혀 작품 제작 연구라는 발전적인 성과를 이끌어낸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우리 미술 시장의 역사가 짧다는 점은 방사선 탄소연대측정법이나 엑스레이 같은 ‘과학적’ 추적 없이, 관계자들의 증언만으로도 진품과 위작 판정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작가의 부인과 자식, 친구들이 살아 있고, 그의 작품을 팔고 산 화상들과 ‘값을 매긴’ 비평가들이 여전히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다. 바꿔 말하면, 현재 거의 모든 미술계 인사들이 이해 당사자로 엮여 있다는 뜻이다.
그동안 벌어진 미술품의 진품과 위작 논쟁이 ‘시비’로 시작해 ‘논란’으로 흐지부지 끝나곤 했던 진짜 이유는 바로 이런 점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두가 ‘진실’을 알고는 있으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던 것.
최근 제기된 이중섭 작품의 진위를 놓고도 적지 않은 화랑과 미술 관계자들은 내심 같은 결론이 내려지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한 화랑 대표는 “진실이 밝혀지면, 직접적으로 많은 사람이 다친다. 또 미술계의 도덕성도 큰 상처를 입을 것”이라고 말했다.
1991년 우리나라의 대표 여류작가 천경자가 ‘미인도’(가운데)가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2000년 중광 스님은 직접 자신의 가짜그림을 사들여 모작이 거래되는 현실을 비판했다.
“또다시 덮고 가서는 안 된다. 묵은 살, 곪은 상처는 도려내야 한다. 그래야 미술 시장의 격이 높아지고 미술계의 양심도 증명할 수 있다.”
한 개인소장자의 간단한 ‘감정서 첨부’ 의뢰에서 시작된 이중섭 작품 진위 논란은 작품을 판 서울옥션(가나아트갤러리 자회사)과 한국미술품감정협회(이하 감정협회)의 공방에 이어, 감정협회 주최로 4월12일 열린 세미나에서 국내에서 전시를 열 예정이라는 200여점의 이중섭 미공개작의 진위까지 함께 거론되면서 우리 미술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모작 시비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감정협회 위원들은 이 200여점과 서울옥션에서 판매한 5점이 ‘매우 유사한 특징을 가진 모작’이라고 주장한다.
전시 공동 개최를 제안받았던 방송사에서는 “검토단계에서 취소됐다”고 밝혔다. 방송사 측은 “4월 무렵 한 ‘개인’에게서 200점의 이미지를 받아 내부 검토를 한 결과, ‘이론이 있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덧붙였다.
이 같은 논란에 대해 서울옥션 측은 이번에 공개한 작품들이 유족이 50년 동안 보관해온 것이라고 밝힌 데 이어, 한국을 방문해 3월22일 ‘이중섭예술문화진흥회’를 발족한 둘째 아들 태성 씨와 화가의 일본인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 씨는 4월7일 도쿄의 한 화랑에서 “문제가 된 그림 ‘물고기와 아이’는 생전에 작가가 직접 일본에 들고 온 그림”이라고 주장했다.
대표적 모작 논란은 ‘천경자의 미인도’
우리나라의 대표적 근대 작가인 이중섭은 천재적 재능과 불우한 삶이 대중들의 낭만적인 정서까지 자극하여 현재 박수근과 함께 가장 비싼 화가로 꼽힌다. 초보적인 컬렉터에서 전문가들까지 탐낼 만한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이다. 1999년 현대화랑에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회고전이 열렸을 때도 무려 9만명을 동원했다.
게다가 2006년 타계 50주년을 맞아 올해 5월 삼성리움미술관에서 ‘드로잉전’을 여는 등 다시 한번 미술계의 이슈가 될 전망이다. 한 상업화랑 관계자는 “삼성에서 전시를 한다는 것이 컬렉터들에게는 미리 이중섭 작품을 소장할 이유가 된다. 전시 후에는 가격이 인상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유력한 전시에 포함되거나 영향력 있는 미술평론가의 저서에 작품 도판이 실려 ‘걸작’ 운운 등의 평을 받아도 진품임을 인정받는 것은 물론이고, 가격도 폭등한다. 한 미술사가는 “이런 상황에서 이중섭의 미공개작이 200점 공개된다면 한국 미술사를 다시 써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품감정위원회인 화랑협회 감정위원회(문제를 제기한 감정협회와는 다른 기구)의 조희영 이사(그로리치 화랑 대표)는 “우연의 효과가 있는 추상화나 대작은 모작이 어려운 반면, 이중섭 작품은 형상이 있고 작아서 베껴 그리기 쉽다”고 말한다. 조 이사는 “화랑협회가 2000~2004년 의뢰를 받은 이중섭 작품 32점 중에서도 진품 판정을 받은 것은 2점뿐이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통계를 들추지 않아도 많이 알려진 이중섭의 모작 시비만 해도 이번이 세 번째다. 80년대 초엔 이중섭의 대표작 ‘소’가 전시되었으나 사인이 없는 등 모작 시비가 일자 화랑 주인이 사인을 그려넣었다 다시 지워 전시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있었고, 2000년대 들어선 부산시립미술관이 2900만원을 주고 구입한 드로잉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가 위조 의혹 끝에 컬렉션에서 빠지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중섭을 제외하고 가장 널리 알려진 모작 논란은 서양화가 천경자의 ‘미인도’ 사건일 것이다. 이 사건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한 작품을 작가가 ‘내 작품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데서 시작됐다. 작품의 유출, 전시이력과 그림 분석 등을 통한 감정위원회의 ‘진품’ 판정에도 작가는 이를 부인하다 절필 선언을 한 뒤 도미해 미술계에 충격을 주었다.
후일담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 그림은 작가가 유신시절 중앙정보부 직원의 반강요에 의해 그려 잊고 싶었던 ‘새끼’인데, 79년 10·26사태 이후 이것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집에서 뇌물로 압수되어 국립현대미술관으로 넘어간 것을 뒤늦게 알고 그 존재를 부인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가의 심경은 오원 장승업의 생을 다룬 영화 ‘취화선’에 은유되기도 했다.
한 미술품 컬렉터는 “컬렉터라면 한두 번 가짜 구입 경험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유명작가 K가 미국 체류시절, 제자뻘 되는 작가 O가 중간에서 그림을 받아다 팔곤 했는데, 문득 모작을 하면 더 많이 남겠단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나도 O가 그려 판 가짜를 구입했다. 뒤늦게 이를 안 K가 야구방망이를 들고 O에게 달려갔고 결국 O는 구속됐다. 그런데 지금은 O가 대학교수다. 미술계가 특별히 문제라기보다는 사회 전체의 양심 문제 아닌가.”
해외에서 ‘희대의 가짜 그림’ 모작범으로 꼽히는 인물은 17세기의 거장 베르메르(영화 ‘진주귀고리’의 주인공)의 그림을 위작해 세계 유수의 미술관들에 판매한 반 미허른이다. 그는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비평가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위작을 했다.
사실 미술작품의 진위를 놓고 반 미허른이나 O처럼 위작범이 잡히지 않으면, 그림의 진위를 결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한쪽에서 가짜라고 주장해도 다른 한쪽에서 진짜라고 맞서면, 그 그림은 한쪽에서는 진품이고 다른 쪽에선 모작이다. 근대화가 중 한 사람인 도상봉의 ‘라일락꽃’이 대표적인 예로 이 작품은 감정협회에선 도상봉의 작품으로 감정했고, 화랑협회 감정위원회에선 위작으로 판정하였다.
어쨌든 논란 자체로 작품엔 치명적인 결과를 주게 되고, 미술 시장에서 상품으로서 유통은 매우 어려워진다. 그래서 감정위원들은 판정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감정의원 중 검찰에 불려다니지 않은 이들이 드물고, 의뢰자 역시 약간의 논란이나 판정 보류조차 ‘위작’과 거의 동일하게 받아들이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이중섭 진위 논란은 상식적인 미술품 감정의 수준을 넘어섰다는 것이 미술 관계자들의 반응이다. 첫 번째 실수는 감정협회에 있었다. 서울옥션으로부터 작품 감정 의뢰를 받은 감정협회 직원이 실수로 의뢰인이 아닌 작품 구매자(처음 그림을 구입하는 구매자가 기대 속에 감정협회에 직접 결과를 ‘문의’한 결과 벌어진 일이었다)에게 감정 결과를 알려준 것이다. 그러나 서울옥션 측은 이를 부인하면서 감정협회가 함께 문제삼은 작품들을 곧바로 옥션에 올려 고가에 낙찰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다. 또한 작품 소장자로 일본에서 아들 태성 씨를 불러와 영화 제작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미술품 감정만을 놓고 본다면 가장 큰 문제는 서울옥션이 책임을 유족에게 넘겨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사건의 가장 큰 미스터리는 이중섭 그림의 진위가 아니라 1만건 이상 옥션을 통해 작품을 판매한 서울옥션과 그 모회사이자 우리나라 최대의 상업화랑인 가나아트갤러리가 어째서 예상된 비판을 무릅썼는가에 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한편 서울옥션의 감정위원이 국립현대미술관 인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또 다른 논란도 빚고 있다. 공무원이 상업화랑 감정직을 맞는 것이 옳은지,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작품 결정에 영향력을 가진 인사가 납품 업체인 상업화랑을 위해 일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를 들어 이번 사건이 다른 미술품 진위 공방과는 달리 ‘생각보다 빨리’ 결론이 내려질 것으로 예상하기도 한다.
미술 시장도 우리나라 경제 원리와 사회적 상식이 지배하는 세계인 만큼, 어느 쪽의 주장이든 더 이상 ‘인간적’인 정으로 넘어가긴 어려울 것이라는 의미다.
냉정하게 생각해서 어떤 이가 달력에 인쇄돼 있는 이중섭이나 박수근의 그림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면 그에게 가짜와 진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끊임없는 모작 시비는 상품으로 유통되는 시대에 태어난 예술 작품의 숙명 같은 것이다. 단지 그것이 얼마나 합리적으로 처리되고,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지는가가 그 시대의 미술인들이 풀어야 하는 문제로 남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