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보안업체 직원들이 서울 시내 모 건물에서 도청기 설치 여부를 알아보고 있다.
“깔고 앉은 줄도 모르고, 이런저런 얘기를 했던 걸 생각하면 머리가 달아오른다.”
거실 등나무 회전의자에 도청기가 똬리를 튼 건 2004년 4월4일. 그는 10개월 내내 ‘훔쳐 듣기’가 이어졌는지 걱정한다. 도청기는 수사당국에 의해 2월2일 제거됐다.
지난 총선 때 그는 해남에 출마한 열린우리당 후보의 선대본부장을 맡았다. 그의 거실에선 선거대책회의가 이따금 열렸다. 자금 집행 논의도 있었다. 세로 7㎝, 가로 2㎝의 ‘작은 기계’는 날카로웠다.
“내일 식당에서 만나 500만원을 쓰라.” 자칫 선거법 위반이 될 수도 있는 이 얘기는 고스란히 상대 후보 측에 전해졌다. 그는 “불법 자금을 쓰자는 논의는 없었다”면서 말끝을 흐렸다.
민주당 후보가 도청에 나선 건 탄핵 역풍으로 선거에서 열세에 몰리자 열린우리당 후보의 불법 선거운동을 적발해보자는 의도에서였다.
가정사 ‘중계 방송’ 목이 저절로 뻣뻣
당시 민주당 후보이던 이정일 의원이 불법 도청 혐의로 구속되면서 일단락된 ‘해남판 워터게이트’는 일상에 스며든 ‘감시의 공포’를 새삼스레 떠올리게 한다. 고희의 홍 씨는 “너무 끔찍해서 용서할 수 없다. 민사로 고소하겠다”면서 치를 떨었다.
감시는 정보기술(IT) 사회의 그늘이다. 가장 원시적인 CCTV(폐쇄회로카메라)를 비롯해 휴대전화, e메일, 인스턴트 메신저, 신용카드, PC 모니터, PC 키보드, IC카드, GPS(위성위치추적시스템)가 우리의 삶을 발가벗기고 있으며, 전자태그(RFID, 전파식별. 소형 반도체 칩을 이용해 사물의 정보를 처리하는 기술), DNA은행 등 첨단 기술은 바야흐로 ‘빅브라더(big brother, 정보의 독점으로 개인 및 사회를 통제하는 관리 권력, 또는 그러한 사회체제)’의 시대를 예감케 한다.
해남판 워터게이트 사건의 수법은 겨우 ‘싸구려 첩보영화’ 수준이었다. 심부름센터 직원이 집이 빈 틈을 타 회전의자에 도청기를 설치하고 주파수를 맞춘 수신기를 통해 밖에서 대화를 엿들은 게 ‘범죄 행각’의 전부다. 대가는 1100만원.
3월24일 불법 도청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 수감된 민주당 이정일 의원(위)과 KBS 노조집행부가 3월24일 회사 측의 도청 증거물을 제시하고 있다.
“기분이 찜찜하다. 아내가 1년 동안 미국에 체류할 예정인데, 도청 같은 걸 해줄 수 있느냐?”
조심스럽게 운을 떼자 다짜고짜 되묻는다.
“(이혼) 소송하실 요량이면 상담해보시고 그런 게 아니라면 다른 데 가서 알아보세요.”
‘심부름 비용’이 만만찮다는 얘기였다. 착수금 1000만원, 증거를 잡을 경우 1000만원을 더 내라고 했다. “비싸서 어렵겠다”고 둘러대면서 한 달에 몇 명이나 이런 부탁을 해오느냐고 물었다. 경기를 탄단다. 요사이엔 일주일에
1명꼴. 경쟁이 치열해져 ‘심부름 비용’이 과거보다 낮아졌다고 했다.
또 다른 심부름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이번엔 집 전화를 도청해달라고 했다. ‘심부름 값’은 200만원. 부담스럽지만 ‘감시의 유혹’을 버리지 못했다면 고민할 만한 가격이다. 친절하게도, 비용이 부담스러우면 이동전화 회사의 ‘친구 찾기’ 서비스로 먼저 단서를 잡아보라는 조언까지 해준다.
도청기를 직접 구입해보기로 했다. 서울 S상가에서 수소문 끝에 판매업자를 만날 수 있었다. 업자는 “일제가 가장 낫다. 누구나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가격은 40만원에서 수백만원까지. ‘멀티탭형’ ‘플러그형’‘마이크형’ 등 종류도 다양했다. “사가는 사람이 많으냐”고 묻자 “수요가 있으니 장이 서는 것 아니냐”는 답이 돌아온다.
부부라도 배우자를 도청하는 것은 불법이다. 그럼에도 ‘감시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심부름업자가 추천한 이동전화 업체의 ‘친구 찾기’ 서비스는 개인적 수준에선 만족할 만한 감시 도구다. SK텔레콤, KTF, LG텔레콤 등 이동통신사들은 ‘친구 찾기’라는 명목으로 휴대전화 소지자의 현재 위치를 가르쳐준다. 대학가에선 ‘친구 찾기’로 애인을 감시하다 거짓을 발견하곤 헤어진 커플을 쉽게 볼 수 있다. 얼마 전엔 삼성SDI가 ‘친구 찾기’로 직원들을 감시했다는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신용카드 사용 정보로 도망자 검거
신용카드는 또 다른 감시 도구다. 자신의 신용카드 사용 내용을 다른 사람이 들여다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외환은행에 근무하는 Y 씨는 심심풀이로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의 카드 사용 내용을 조회하다 화들짝 놀랐다. ‘쫛쫛안마 38만원’. 상대 남자가 명문대 출신에 말쑥한 외모를 가져 호감이 갔으나, 돈을 주고 성(性)을 산 흔적을 알아낸 뒤로는 정이 똑 떨어졌다.
신용카드 사용 내용 조회는 금융회사 단말기에서 클릭 몇 번이면 쉽게 마무리된다. 카드업체 직원의 귀띔이다.
“궁금한 사람 있으면 얘기해보세요. 생년월일하고 이름만 대면 어디서 뭘 했는지 다 알 수 있습니다. ‘여배우 L은 일주일에 쇼핑하는 데 수백만원씩 쓴다’ ‘개그맨 K는 일주일에 한 번씩 룸살롱에서 결제하고 반드시 여관 결제가 뒤따른다’는 식의 정보를 검색할 수 있습니다.”
신용카드엔 사용자의 동선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수사당국이 신용카드 사용 정보를 요긴하게 여기는 이유다.
2월16일 삼성 노동자 감시 진상규명과 처벌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대표들이 서울중앙지검 청사 앞에서 삼성SDI 휴대전화 위치추적 사건의 수사 중단을 규탄하고 있다. 2003년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박진 의원이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에게 휴대전화 도청 가능 여부를 묻고 있다(위부터)
그러나 범법자가 아닌 일반 시민의 신용카드 사용 내용이 잘못 이용된다면 얼마나 오싹한 일인가. 개인의 신용카드 관련 기록만 있으면 동선은 물론 생활 패턴 등 거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개인의 신용카드 기록은 수사기관 등에서 정보 제공 요청이 있더라도 엄격한 조건이 붙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들의 감시는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중견 건설자재 업체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하는 C 씨는 PDA를 ‘개 목걸이’라고 부른다. PDA에 탑재된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때문에 이따금 즐기던 오후의 여유는 추억이 됐다.
“‘개 목걸이’ 때문에 정해진 반경 밖으로는 나가지 못합니다. 병원에 잠깐 갈 일이 있어도 상사에게 일일이 보고를 해야 합니다.”
GPS는 위성을 통해 차량이나 항공기, 휴대전화 PDA 등의 위치를 찾아내는 기술. 사용자가 전원을 끄지 않는 한 위치가 노출된다. GPS는 100m 이내의 오차범위에서 소지자의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계산해낸다.
C 씨의 회사처럼 PDA나 휴대전화를 통해 외근 사원의 위치를 파악하는 회사는 부지기수다. ‘노동자 감시 근절을 위한 연대모임’에 따르면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을 도입해 사내 행동 반경을 감시하는 기업도 있다.
대기업 계열사에 다니는 K 씨는 최근 회사 측으로부터 메일 한 통을 받았다. “근무시간에 사적인 컴퓨터 이용이 잦다”는 지적이었다. 누군가 K 씨의 컴퓨터를 몰래 들여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K 씨의 회사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PC는 같은 네트워크상의 다른 PC에서 손쉽게 모니터링된다. 감시 대상 PC의 화면을 다른 PC에서 띄워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도 있다.
일부 기업 전자태그 사원증에 부착
회사 PC에서 사적으로 이용하는 e메일이나 메신저에도 ‘비밀은 없다’. 회사 e메일의 경우엔 회사 중앙 서버를 거치기 때문에 100% 감시가 가능하고, 포털의 메일서비스도 프로그램을 설치하면 수신 및 발신 상황을 회사 측에서 살펴볼 수 있다. 자신의 PC에서 e메일을 지우더라도 서버엔 고스란히 내용이 보관된다. 보안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름 있는 회사에 다닌다면 보내고 받은 e메일 정보가 모두 다 드러나 있다고 보면 된다”고 귀띔했다.
일부 기업에선 인스턴트 메신저를 통한 대화, 키보드 입력 내용도 추적하고 있다. 상당수의 기업이 보안을 이유로 대용량의 자료 전송이 가능한 인스턴트 메신저를 통제하거나 감시하는 시스템을 갖춰놓았다. 회사가 인스턴트 메신저 대화 내용과 다운로드·업로드 목록을 관찰하며 직원을 감시하는 것이다. 회사 처지에선 기술 유출을 막기 위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다.
통신비밀보호법은 기업이 기밀 보호를 위해 직원 e메일이나 PC 등을 감시하거나 이를 위한 솔루션을 들여올 때 직원들의 ‘동의’를 얻도록 해놓았다. e메일 및 메신저 감시 솔루션으로 직원들을 감시하는 한 벤처기업에 직원들한테서 동의를 받았는지 물어보았다. 대답은 이랬다. “채용 시 회사의 규칙을 준수하겠다는 각서를 받았다.”
헌법 제17조는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국가 수준에서의 감시 역시 나날이 늘고 있다. 2004년 ‘통신비밀 통계현황’에 따르면 통신업체가 수사기관 등에 넘겨준 인적 정보 등 통신자료 제공 건수는 모두 27만9929건. 전년 대비 무려 48%나 증가했다. 음성사서함, 문자메시지(SMS), e메일, 신용카드 사용 정보 등도 검찰과 경찰, 국가정보원 등으로 흘러나갔다.
휴대전화 도청과 통화내역 조회에 대한 공포도 줄어들지 않는다. 국회의원과 국군기무사 등 정보기관 소속 인사들 중엔 휴대전화를 3, 4개씩 쓰는 이들이 많다. 기자들도 민감한 취재를 할 경우엔 취재원 보호를 위해 공중전화를 이용한다. 복수의 휴대전화를 갖거나 공중전화를 이용하는 것은 통화 기록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서다.
이런 가운데 정부혁신위원회는 경찰, 검찰, 법원, 법무부 등 사법기관이 제가끔 관리하던 수사, 재판, 수형기록 등 범죄 및 범죄인 관련 정보를 통합, 온라인으로 활용케 하는 통합형사사업체계를 구축하겠다고 밝혔다. 검찰도 인터넷 IP 추적을 통해 용의자나 지명수배자 등 범죄 혐의자들의 위치를 찾아내는 ‘범죄 혐의자 추적시스템’을 개발할 요량이다. 범죄자 검거를 위한 ‘빅 브라더’가 태어나는 셈이다.
영화에서처럼 인간의 몸에 GPS칩을 내장하면 범죄자 검거는 매우 쉬울 것이다. 좁쌀만한 ‘전자태그’는 또 어떤가. ‘실종’ 등의 단어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국내 한 대기업은 직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전자태그를 사원증에 부착시킬 계획을 세워놓았다. 국가와 기업의 감시는 순기능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나 매우 엄격하게, 또 제한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