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원남동의 ‘황참의다리길’. 서울시는 최근 이 도로명이 부르기 어렵고 너무 길다는 이유로 퇴출시키기로 결정했다.
이 길의 이름은 ‘황참의다리길(Hwangchamuidari-gil)’.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이 거리엔 청계천의 지류가 흘렀는데, 황 참의란 사람이 사재를 털어 다리를 놓았다고 해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황참의다리길 1번’ 집은 복요리 식당이다. 1978년부터 30년 가까이 이곳에서 장사해온 식당 주인 전태훈(60) 씨는 “황참의다리길이란 이름이 붙은 지 4년째이지만, 식당 위치를 알려주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다”고 말했다. 전 씨는 “다리는 이미 일제 강점기에 없어졌다는데, 부르기도 어렵고 뜻도 알 수 없는 이름을 왜 갖다 붙였는지 모를 노릇”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인지도와 활용도 낮아 ‘예산 먹는 하마’
하방학천길(도봉구), 사지감재길(마포구), 은가은빛길(서대문구), 작은새재미길(금천구), 말그미길(강남구), 보름뫼길(구로구)…. 서울시가 98년부터 서울 전역의 도로마다 이름을 붙이기 시작한 이후 발음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도통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없는 도로명(名)이 자주 눈에 띄고 있다. 결국 서울시는 올해 70억원을 들여 문제작인 이들 도로명을 ‘퇴출’시키기로 결정했다. 서울시 이구식 새주소부여팀장은 “신설된 도로명에 대한 시민들의 인지와 활용도가 낮은 이유가 도로명이 어렵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해 좀더 쉬운 이름으로 바꾸기로 했다”고 밝혔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도로명은 3700여개. 서울 전역의 2만여개 도로명 중 18% 가량이 한 번도 제대로 ‘불리지’ 못한 채 쓰레기통에 처박히는 신세가 됐다.
정부가 96년부터 추진해온 ‘도로명 및 건물번호 부여 사업’(이하 도로명 사업)이 고질적인 ‘예산 먹는 하마’로 미움을 받고 있다. 도로마다 이름을 부여하고 도로를 따라가면서 순서대로 왼쪽 건물엔 홀수 번호, 오른쪽 건물엔 짝수 번호를 부여하는 이 사업에 지금까지 소요된 예산은 무려 1558억원. 올해부터 사업이 완료되는 2009년까지 1213억원을 더 쏟아 부을 예정이다.
그러나 각각의 도로에 명판을 부착한 지 길게는 8년이 지났지만, 실생활에 거의 사용되지 않아 과연 실효성 있는 사업인지에 대한 비난이 거세다. 지난해 12월 부산 경제정의실천연합은 도로명 사업을 투자 타당성이 결여된 것으로 평가하며 ‘2005년 부산시 예산에서 삭감해야 할 사업 13가지’ 중 하나로 선정했다. 고은석 예산감시팀장은 “그동안 부산시의 도로명 사업에 160억원이 투입됐고, 올해도 8억6700만원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으나, 부산 시민 대다수가 쓰이지도 않는 도로명판을 왜 붙이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우편물을 배달하는 우편집배원. 현재 새 주소는 우편 배달에 거의 활용되지 않고 있다(위). 도로명 주소와 지번 주소가 나란히 붙어 있는 서울 마포구의 한 주택(아래).
애초의 계획은 2000년까지 전국 모든 도로에 이름을 부여하고 건물번호를 붙인다는 것이었다. 96년 당시 이 사업을 적극 추진한 강희복(현 법무법인 세종 시장경제연구원 상임위원) 부단장은 “2000년 아시아·유럽 정상회의(ASEM)와 2002년 한일월드컵 등 대규모 국제 행사가 열리기 전까지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러나 2004년 말 현재 이 사업을 완료한 지방자치단체는 92개 시·군·구로 전체 지자체의 39.3%에 지나지 않는다. 아예 사업에 착수하지 않은 지자체도 78개(33.3%)에 달한다. 사업은 96년 11월부터 행정자치부 도로명 및건물번호 부여지원단(이하 지원단)으로 이관됐는데, 이후 사업 속도는 계속 지체돼왔다. 현재는 2009년까지 전국적으로 도로명판과 건물번호판 부착을 완료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사업 진행 속도가 늦춰지는 이유에 대해 김두수 지원단장은 “문민정부 말기에 시작된 사업이 국민의 정부로 넘어가면서 제대로 계승되지 않은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사업에 소요되는 비용의 절반 정도를 부담하던 국비도 2000년부터는 끊겼다. 김 단장은 “국비 대신 행정자치부 특별교부세를 지원하고 있다”면서 “그런 까닭에 국가적 사업이 아닌 행자부만의 사업으로 축소됐으며, 각 지자체에 의무가 아닌 권고 사항으로 권장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사업이 완료된 92개 지자체에서 도로명과 건물번호는 철저하게 외면받고 있다.
서울의 한 콜택시 업체 직원은 “운전기사들이 도로명을 몰라 도로명으로 접수받을 수 없다”며 “주변에 있는 큰 건물 이름만 대면 금세 찾아가기 때문에 도로명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서울 강북구 미아동에서 부동산중개소를 운영하는 조모 씨는 “지난해 구청에서 새 주소 지도를 가져다주긴 했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모르겠다”면서 “내가 아는 한 새 주소 지도를 활용하는 부동산업자는 없다”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청의 한 직원은 “건물 주인들이 새로 부착한 건물번호판이 지저분하다며 떼어내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전했다. 행자부는 경찰과 소방서 등 공공기관에 기존 주소와 새 주소의 공동 명기를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지만, 일선에서는 그다지 활용되고 있지 않다. 감시카메라로 속도위반 차량을 적발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서울지방경찰청 영상단속반 직원은 “차적 조회로 나온 주소만 사용하지, 새 주소까지 공동 명기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각 가정집으로 물건을 배달하는 택배 업체들이 즐겨 사용할 것이라는 당초 예상과 달리 택배 업체들의 반응 또한 탐탁지 않다. 한진택배 최홍도 고객지원그룹장은 “고객들이 도로명에 의한 새 주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사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각 지역 부동산 업체에서 구한 상세한 지번 지도가 물류 배달의 기초 정보로 충분하다는 것. 또 한 명의 직원이 1∼2개 동을 맡기 때문에 해당 구역의 지리 정보에 전문가 수준으로 익숙해져 있다. 최 그룹장은 “정 찾아가기 어려울 땐 전화로 물어보면 되고 회사 차원에서 지리정보시스템 기능을 가진 PDA를 직원에게 보급할 예정이기 때문에 새 주소 시스템을 사용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정사업본부가 하루치 우편물로 낸 통계는 도로명과 건물번호에 의한 새 주소가 일상생활에서 얼마나 겉돌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2004년 12월3일의 전체 우편물 1820만 통 중 새 주소가 명기된 우편물은 0.04%, 7000여 통에 불과했다. 이중 기존 주소 없이 새 주소만 표기된 우편물은 3000여 통에 지나지 않았다. 우편물류과 관계자는 “우편집배원들은 새 주소 지도가 아닌 집배정밀도를 갖고 다닌다”면서 “새 주소만 적힌 우편물의 경우 주소지를 찾을 수 없어 배달하지 못하고 반송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저조한 새 주소 사용 실태에 대해 여러 차례 지적당하자, 지원단은 홍보 부족을 그 원인으로 꼽았다. 지원단은 ‘50대 활용방안’을 마련하는 등 홍보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인터넷 위치안내시스템을 구축, 지방세고지서 등 우편물에 도로명 주소 병기, 전국 시·군·구에 120만 부의 안내도 배포 등이 그것. 그러나 ‘대국민 홍보’는 여전히 목마른 상태다. 구청에 가서 담당직원을 조르는 방법 말고는 일반인이 도로명이 표시된 지도를 구할 방도가 없다. 이에 대해 김두수 지원단장은 “서울시는 올해 도로명 개선 작업을 벌이기 때문에 지도를 제작 배포할 수 없는 형편이다. 제주도만 도로명 지도를 시중에서 팔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서울 용산구 용문동 일대의 지도. 지번 체계 지도(왼쪽)와 도로명 체계 지도.
격자형 도시 설계가 이뤄진 서울 강남구나 신도시 등에는 외국처럼 남북 방향의 스트리트(St.), 동서 방향의 애버뉴(Ave.) 체계를 도입할 수 있으나 그런 체계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안양시 시범사업에 참여했던 국토연구원 지역도시연구실 신종철 선임연구위원은 “도로 방향성에 맞추어 되도록 ‘길(Gil)’과 ‘로(Ro)’를 구별해 쓰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영문 철자 숫자를 줄이거나 도로명과 발음상 더 어울리는 대로 ‘길’과 ‘로’를 섞어 썼다는 것. 그는 또 “도로명에 동서남북의 방향 표시를 하지 않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외국의 경우 도로명에 영문 이니셜(N, E, W, S)로 동서남북을 표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때문에 낯선 지역에서 방향을 판단하지 못한 채 무작정 새 도로명을 따라가다간 낭패를 당할 수 있는 것.
이처럼 애초부터 도로명을 체계적으로 부여하지 못한 것은 사업 시행 초기인 98년 당시 단순히 ‘공공근로’를 늘리기 위한 목적으로 다급하게 사업을 추진했기 때문으로 지적되고 있다. 도로명을 부여하고 건물번호를 붙이기 위해서는 도로 진출 입구와 건물 조사 등 현장조사 인력이 대거 동원되어야 한다. 외환위기의 여파로 실업자가 크게 늘었던 당시 도로명 사업은 공공근로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매우 적합했던 셈이었다. 모두 261억원이 공공근로 비용으로 쓰였다. 서울 강남구 시범사업 연구용역을 담당했던 서울시정개발연구원 강영옥 연구위원은 “짧은 기간에 사업을 추진하느라 동사무소가 정해온 도로명의 적합성 여부를 일일이 검토하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시켰다”고 말했다.
“국민들은 알지 못하는 탁상행정의 전형”
“쓸모없는 도로명판과 건물번호판을 붙이는 데 1000억원이 넘는 예산을 낭비했다”는 질타에 대해 각 지자체들은 “새 주소 사용을 의무화하는 법제화가 먼저 이뤄져야 해결될 문제”라고 항변한다. 서울시 박병하 새주소사업팀장은 “서울시만 도로명 시스템을 갖췄다고 해서 활용이 확대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라며 “행자부가 전국적으로 동시에 도로명 사업을 진행시키고 새 주소 법안 등을 마련했더라면 짧은 시일에 새 주소가 정착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새 주소 법안 마련에 행자부는 부정적이다. 주민등록증, 등기부등본 등 250여개에 이르는 체계를 바꾸어야 하기 때문. 김두수 지원단장은 “도로명 주소가 생활 주소로 정착됐을 때, 그때 가서 법제화 문제도 고려해볼 수 있는 일”이라며 “유럽에서는 도로명 주소 체계를 정착시키는 데 길게는 100년이 걸렸다. 너무 성급하게 판단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1500억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돈을 들였지만 현재로서는 무용지물 취급을 받는 도로명 사업. “저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는 불명예스러운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도로명판과 건물번호판은 우리나라 주소 체계를 선진화하는 애초의 사업 목표를 달성해 명예회복할 수 있을까. 경실련 이원희 예산감시위원장은 “중앙정부는 ‘선(先)활용’을 외치고, 지방정부는 ‘선(先)법제화’를 주장하는 것은 책임 떠넘기기에 불과하다”며 “현재의 도로명 사업은 사용 주체인 국민들은 알지도 못한 채 일부 공무원들끼리만 추진하는 탁상행정의 전형”이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