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당에 안치돼 있는 징용 희생자 유골함들.
함 앞에서 잠시 묵념을 올렸다. 조심조심 뚜껑을 열었는데도 나뭇조각은 스르르 자동 분해되듯 떨어져나갔다. 기나긴 망향의 한을 품은 백골이 이내 처연한 모습을 드러냈다. 유골 위에 접혀 있는 종이를 펴 드니 ‘푸석’ 먼지가 일었다.
3월 하순 일본 후쿠오카(福岡)현 이즈카(飯塚)시 외곽의 시립공동묘역에 자리잡은 ‘무궁화당’ 안에서 징용 희생자의 유골함을 열어 인적사항을 확인하던 순간이었다. ‘무궁화당’은 한국인 희생자의 유골을 모신 시설이다.
무연고 분류 유골마저 ‘인질’
새로 발견된 9개의 유골함은, 자신도 징용 피해자로서 20년 가까이 유골 찾기에 힘써온 ‘무궁화의 회’ 배래선(84) 이사장이 개인적 노력을 통해 인근 구라테마치(鞍手町)의 사찰 소센지(照善寺)에서 인수해온 것이었다.
“이걸 일본 절에서 여기로 모셔오는 데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릅니다.”
유골이 안치된 뒤 기일이 되어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탓에 무연고 유골로 분류되어온 것이었다. 이번 것도 배 이사장이 이즈카시 일대의 절 20여 군데를 다니며 무연고 유골 가운데서 찾아낸 한국인 유골이었다. 그럼에도 절에서는 좀처럼 이 유골을 내주려 하지 않는다. 다행히 무궁화당이 생겨 요즘은 설득하기가 쉬워졌다. 유골마저 ‘인질’로 잡혀 있는 셈이다.
나무상자 겉에 ‘金法童子’ ‘孫斗쫛’라고만 쓰여 있는 것도 있고 함에 유골만 들어 있는 것도 있었다. 먹으로 써놓은 주소와 성명이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흐려진 탓에 해독할 수 없어 안타까운 것도 있었다. 또 ‘朝鮮人’이라고만 써 있어 전혀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있었다.
굶주린 살쾡이가 닭을 채가듯,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식민지 청년들을 강제 연행해간 일제는 참혹한 조건 아래서 온갖 착취와 학대를 가했다. 그것도 모자라 사후에까지 이렇게 천대하다니, 참으로 치가 떨리는 일이다.
길게는 60여년이 지난 유골함에 신상이 기록된 종이가 잘 보존된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5명의 이름과 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버젓이 기록이 남아 있는데도 ‘무연고자 유골’ 취급을 받도록 절에 방치해온 일본. 뿐만 아니라 말로는 일제가 어떻고 하면서도 정작 제 할 일을 외면해온 한국 정부 관계자들의 무신경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인’이란 글만 쓰인 유골함(위)과 이즈카시 일대 치쿠호 탄광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한 위령탑. 배래선 무궁화의 회 이사장은 탑 아래 나뒹구는 유골함에는 한국인의 것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증언했다.
“징용에서 풀려났지만 노동의 대가를 한 푼도 받지 못해 귀국 못하고 그대로 눌러 산 경우도 많았지요.”
독신으로, 또는 후손 없이 지내다 사망하자 지인들이 유골을 절에 맡긴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었다. 달리 배운 기술이 없어 사망할 때까지 탄광에서 계속 일을 했을 것으로 추정됐다. 대체 얼마나 많은 징용자 유골이 망향의 한을 안고 방치돼 있을까.
배 이사장은 43년 징용돼 반년가량 사가(佐賀)현 조선소에서, 이듬해에는 이곳 치쿠호(筑豊) 탄광에서 강제노동을 했다. 해방이 되었지만 돈이 있는 것도, 귀국선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후쿠오카에 눌러앉고 말았다. 당시는 일본인들이 내다버린 곱창 등을 자전거로 배달하는 등의 일을 하며 생계를 이어야 했다.
총련 조직에 몸담고 있던 그는 90년대 초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었다. 한국인 유골 찾기는 민단과 총련이 함께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다리 구실을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총련에서는 ‘배반자’라고 욕을 했고, 민단에서는 ‘못 믿겠다’고 거리를 두었다. 그러다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힘이 생겼다.
마침내 2000년 12월 ‘무궁화당’이 건립됐다. 현재 인근 절에서 찾아낸 한국인 유골 가운데 신원을 알 수 없거나 유족이 나타나지 않은 80여 구가 안치돼 있다.
징용자 유골 9구가 발견된 구라테마치는 대지진이 일어났던 후쿠오카시에서 동쪽으로 버스를 타고 1시간가량 가면 나온다. 이 지역과 한국인 납골당 무궁화당이 있는 이즈카시 등 일대는 ‘치쿠호 탄광지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44년 전후에는 300여개 탄광이 있었던, 일본 최대의 석탄광 지대로 한때는 일본 전체 석탄 생산량의 48%를 담당했다고 한다. 이즈카 시내에는 탄광에서 나온 폐석(이곳에서는 ‘보타’라고 부른다)이 쌓여 생긴 거대한 ‘보타산’이 3개소 남아 있어 당시 얼마나 많은 탄광이 있었는지 짐작케 해준다.
뒤늦게 비송환 유골 실태조사
규슈(九州) 일대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이 얼마나 되는지는 정확한 통계가 나와 있지 않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 일본 전체 탄광노동자 40여만명 중 한국인 노동자가 12만4025명(31.3%)을 차지했다는 일본 측 기록이 남아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훨씬 많았다는 주장도 있다. 한국인 강제연행자는 치쿠호 탄광 등 후쿠오카현과 나가사키현 등 규슈 일대에만 15만여명, 홋카이도(北海道)에 5만여명 등 총 20여만명에 이른다는 설도 있다. 이 가운데 2만여명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인(死因)은 원시적인 채탄 환경 때문에 빈발한 낙반 사고, 제대로 먹지 못한 채 하루 12시간 이상의 가혹한 노동 끝에 생긴 영양실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일본 정부는 3월17일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외상 담화를 비롯해 과거 수차례 한국인 희생자 유골 송환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했음을 상기시켰다. 그러나 본격적인 실태조사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송환에도 소극적이었던 것은 물론이다.
한국 정부 역시 전반적인 실태조사를 하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총련 측이 ‘조선인 강제연행 진상조사단’을 구성해 전국적인 조사를 한 적은 있다. 하지만 총련 측도 북-일 수교에 대비한 배상 자료로 활용할 셈으로 유골 송환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사망자 명단을 파악해놓고도 이를 민단 측에 공개하기를 꺼리고 있다. 대부분의 탄광 희생자가 경상도와 전라도 등 남한 지역 출신임을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다.
지금까지 부분적으로 이뤄진 유골 송환이 남-북한이나 일본 정부의 노력이 아니라, 뜻있는 재일교포와 일부 일본인들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이 징용자 유골 문제의 핵심이다.
전후 일본 정부가 강제 연행자에 관한 자료를 상당수 소각 폐기해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배 이사장은 도서관과 관청 자료실 등에서 찾아낸 자료를 통해 규슈 지역 탄광에서 숨진 한국인 2000여명의 신상명세를 확보한 상태다. 또 치쿠호 탄광 일대 상당수 절에 한국인 희생자 유골이 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인계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이 같은 사정으로 미루어 한-일 두 나라 정부의 의지가 있다면 징용 희생자 유골 송환 문제는 앞으로도 진전될 여지가 있다. 뒤늦게나마 일본 정부는 4월1일 전국 사찰 등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 출신 구 일본군 및 군속, 징용자 등의 유골을 본국에 송환하는 문제와 관련, 비송환 유골 실태조사에 착수하기로 했다.
한국인 희생자 유골 반환에 대한 일본 측의 협력 움직임이 독도 문제와 역사 왜곡 교과서 문제 등으로 냉각된 한-일 관계에 숨통을 트여줄지 주목된다. 과거 일본 정부의 태도에 비춰보면, 이번에 관계부처 간 회의기구를 만들어 한국인 희생자들의 유골 실태조사를 종합적으로 한 것은 일단 의미 있는 변화로 해석된다. 물론 과거의 예에서 알 수 있듯, 일본 정부가 형식적인 실태조사로 일을 흐지부지 마칠 가능성도 있다.
한국 정부도 ‘일제강점하 강제동원 피해진상규명 위원회’를 발족, 4월 하순 후쿠오카와 야마구치(山口) 등지에 현장 조사를 하기로 해 성과가 주목된다.
망국의 설움 속에서 희생당한 것도 서러운데, 죽어서까지 내팽개쳐진 징용 희생자 유골 문제야말로 지금 당장 해결 가능한 부분이 크다는 점에서 독도 문제나 배상 문제보다 현실적인 과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