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영화감독 이규형이 지금까지 모두 몇 권의 책을 냈을까? 답은 57권. 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본인 말로는 그중 절반이 베스트셀러란다.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1991년부터 13년 동안 일본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그에게 생활은 어떻게 꾸려갔냐고 묻자 책 판 돈으로 먹고살았다고 했다. 소설, 수필, 배낭여행기, 일본에서 출간한 한국어 교재까지 종류는 다양했다(난 그중에서 단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아 진심으로 미안했다. 47세의 사내가 자신의 나이보다 많은 책을 펴냈다는 것은, 인생을 열심히 살았음을 증명해주는 최고의 자산이다).
이규형은, 8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83년, 지금은 ‘드림시네마’가 된 옛 서대문 ‘푸른극장’에서 그의 첫 시나리오 ‘사랑 만들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테멘’의 김정률씨가 만든 그 극장에서 처음 상영된 문여송 감독의 ‘사랑 만들기’는, 이제는 익숙해진 ‘…만들기’라는 유행어의 시발점이었다. 제목부터 인공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꺼져가던 70년대 청년문화의 불씨를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일으킨 그 영화를 통속적이고 치기 어리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 시대 대부분 청년들의 감수성과 맞닿아 있었던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규형은 그렇게 등장했다.
이 감독의 데뷔작 ‘청 블루 스케치’(86)는 영어 제목을 인정하지 않는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맨 앞에 푸를 ‘청’ 자가 붙어서 개봉되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87)는 그해 한국 영화 가운데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이다. ‘어른들은 몰라요’(88)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 요즘의 김기덕 감독처럼 당시의 이규형은 1년에 영화 한 편씩을 만들었다.
80년대 청년 감수성 관통 … 책 57권 쓴 작가
그러니 95년 허무영의 만화를 영화화한 ‘헝그리 베스트 5’ 이후 10년 만에 영화 현장으로 돌아오는 이규형 감독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아무런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약속 장소인 청담동 ‘A.O.C’는 사진작가 김용호씨가 운영하는 곳으로, 문화계 인사들이 자주 출몰하는 카페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와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80, 90년대 한국 잡지·출판계를 평정했던 민윤기씨가 앉아 있었다.
이규형은 정말 동안(童顔)이다. 그가 57년 닭띠라는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일본 체류시절 국내 신문에 실리던 그의 칼럼 사진은 살이 많이 쪄 있었는데, 영화 개봉을 앞두고 뛰어다니느라 힘들었는지 몸도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었다.
‘DMZ: 비무장지대’는 그의 청춘시절을 담보로 한 영화다. 이미 그가 소설로 발표한 ‘일등병 오딧세이’가 원작인 이 영화는 일본 도에이가 제작비의 반을 투자했다. 앞으로도 이규형 시네마에서 제작하는 영화는 도에이가 지분의 반을 갖고 투자한다고 한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세속적인 풍파를 겪게 마련이다. 특히 돈 문제와 연관된, 더구나 영화산업처럼 수십억원의 거액이 오가는 계약에는 반드시 책임자가 서명한 계약서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문서화된 계약서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문다. 계약서 같은 것은 없단다. 도에이와 이규형을 연결해준 사람은 일본 야쿠자의 거물. 70세가 넘은 보스는 이규형에게 ‘교다이붕’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친구처럼 대하겠다는 뜻이다. 문서에 도장 찍고 사인하는 법률적 약속보다 훨씬 큰 위력을 지닌 말이다. 일본인들은 처음 사귀기가 아주 어렵지만, 한 번 친교를 맺으면 자신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해준다는 그의 설명이다.
이규형은 9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영화 기자였던 그의 부친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일본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일본의 대중문화를 보고 즐기면서 3년만 있다 올 생각이었는데 15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 문화가 개방되고 그는 한일 대중문화의 다리 같은 구실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원흉’이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그가 한국에 심어놓은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의 저서 ‘일본을 보면 돈이 보인다’는 100만부가 팔렸다. 일본문화 개방에 대한 그의 주장이 대중에게는 설득력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SBS 개국 때부터 일본 TV 오락 프로그램을 접목하는 데 관여했고, 결국 공영방송인 KBS도 ENG 카메라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을 따랐다는 것이다. 요즘은 오히려 일본 사람들이 한국 TV를 보면서 재미있어한다. ‘겨울연가’가 한국에서 히트했지만 큰돈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보다 인구 3배, 문화의 총량도 3배나 된다. 달력 하나 찍어도 개런티로 1억엔을 준다.
영화 ‘DMZ: 비무장지대’를 구상한 것은 78년 7월 그가 군 입대해서 전방 비무장지대 수색대원으로 근무할 때부터다. 제대한 뒤 황기성사단 등 여러 곳에 시놉시스를 내놓으면 군사정권 아래서 어떻게 그런 소재를 영화화할 수 있겠느냐고 다들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의 ‘JSA 공동경비구역’이 나왔다. 그 영화를 보고 이제는 때려죽여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1년 9월 ‘호텔 코코넛’이란 제목으로 촬영에 들어간 이 영화는 월드컵공원이 들어서기 전의 난지도에서 비무장지대 신을 촬영했다. 분위기는 최적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펀딩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촬영이 중단되었고, 주연배우 김래원 등이 교체된 뒤 지난해 촬영을 재개해 올 여름까지 보충촬영을 했다. 그리고 메이킹 필름을 일본에 돌려서 결국 도에이 영화사가 투자를 결정하고 극장에서 개봉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DMZ: 비무장지대’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반드시 이 영화를 일본에서 개봉하겠다고, 그리고 일본인들을 적어도 세 번은 웃게 만들고 세 번 이상 울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일본에서 15년 동안 산 그의 자존심이었다. 11월9일, 일본에서 첫 시사회를 한 결과 그는 일본 관객들의 눈에서 눈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 시사회 호평 …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내 영화”
그의 목에는 아직까지 군번줄이 매달려 있다. 영화가 개봉될 때까지는 자신을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군번줄을 목에 차고 다닌다는 것이다. 공수 마크라도 있는 힘든 부대에 들어가야 군대영화를 제대로 만들 것 같아서 그는 수색대에 자원했다. 그런데 수색대에 들어간 지 며칠 뒤 그에게 지뢰밭을 걸어야 하는 임무가 내려졌다.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런 장비 없이 계급이 낮은 순으로 지뢰가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을 걸어가야 한다. 그때의 공포라니….
그는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좋은 군대영화 만들게요. 하나님 이야기도 할게요.
그런데 무전병이 대인지뢰를 밟았다. 판초 우의에 조각난 시신들을 담아 운반했다. 그는 이 친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일등병 오딧세이’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게 나이를 먹는 거다. 후배들에게 치여 사라질 때 가장 비참하다. 영화만이 아니다. 40대의 눈물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감각이 있다면 나에게는 이제 인생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난 서른 살에 만든 영화가 흥행성적 1위를 거두었는데, 당시를 생각해봐도 ‘나이 드신 분들이 나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지금 대학생들의 말투를 그들이 어떻게 알아, 그랬지만 이제는 거꾸로 내가 그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없는 힘, 나에게는 살아온 인생이 있어’ 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는 인생의 바닥에까지 도달했다. 나는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느 날 월트 디즈니의 생애를 보니, 그는 인류 발명품 중 가장 위대한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결국 전쟁이라는 것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행위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싸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끝없이 공부하면서 변해가는 저 테마를 풀어나갈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의 폭이 넓어졌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영화에서 가장 소중히 다루는 것이다.”
이규형은, 80년대를 거쳐온 사람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83년, 지금은 ‘드림시네마’가 된 옛 서대문 ‘푸른극장’에서 그의 첫 시나리오 ‘사랑 만들기’가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되었다. ‘테멘’의 김정률씨가 만든 그 극장에서 처음 상영된 문여송 감독의 ‘사랑 만들기’는, 이제는 익숙해진 ‘…만들기’라는 유행어의 시발점이었다. 제목부터 인공의 냄새를 물씬 풍기며, 꺼져가던 70년대 청년문화의 불씨를 새로운 감각으로 다시 일으킨 그 영화를 통속적이고 치기 어리다고 비판할 수는 있지만, 그 시대 대부분 청년들의 감수성과 맞닿아 있었던 점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규형은 그렇게 등장했다.
이 감독의 데뷔작 ‘청 블루 스케치’(86)는 영어 제목을 인정하지 않는 공연윤리위원회에 의해 맨 앞에 푸를 ‘청’ 자가 붙어서 개봉되었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87)는 그해 한국 영화 가운데 흥행 1위를 기록했다. 그의 나이 서른 살 때의 일이다. ‘어른들은 몰라요’(88) 역시 흥행에 성공했다. 요즘의 김기덕 감독처럼 당시의 이규형은 1년에 영화 한 편씩을 만들었다.
80년대 청년 감수성 관통 … 책 57권 쓴 작가
그러니 95년 허무영의 만화를 영화화한 ‘헝그리 베스트 5’ 이후 10년 만에 영화 현장으로 돌아오는 이규형 감독을 만나러 가는 길에 아무런 감회가 없을 수 없다. 약속 장소인 청담동 ‘A.O.C’는 사진작가 김용호씨가 운영하는 곳으로, 문화계 인사들이 자주 출몰하는 카페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와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80, 90년대 한국 잡지·출판계를 평정했던 민윤기씨가 앉아 있었다.
이규형은 정말 동안(童顔)이다. 그가 57년 닭띠라는 사실을 누가 믿겠는가. 일본 체류시절 국내 신문에 실리던 그의 칼럼 사진은 살이 많이 쪄 있었는데, 영화 개봉을 앞두고 뛰어다니느라 힘들었는지 몸도 보기 좋게 다듬어져 있었다.
‘DMZ: 비무장지대’는 그의 청춘시절을 담보로 한 영화다. 이미 그가 소설로 발표한 ‘일등병 오딧세이’가 원작인 이 영화는 일본 도에이가 제작비의 반을 투자했다. 앞으로도 이규형 시네마에서 제작하는 영화는 도에이가 지분의 반을 갖고 투자한다고 한다.
나이 마흔이 넘으면 세속적인 풍파를 겪게 마련이다. 특히 돈 문제와 연관된, 더구나 영화산업처럼 수십억원의 거액이 오가는 계약에는 반드시 책임자가 서명한 계약서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문서화된 계약서가 있느냐고 묻자, 그는 담배를 한 대 꺼내 문다. 계약서 같은 것은 없단다. 도에이와 이규형을 연결해준 사람은 일본 야쿠자의 거물. 70세가 넘은 보스는 이규형에게 ‘교다이붕’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나이를 따지지 않고 친구처럼 대하겠다는 뜻이다. 문서에 도장 찍고 사인하는 법률적 약속보다 훨씬 큰 위력을 지닌 말이다. 일본인들은 처음 사귀기가 아주 어렵지만, 한 번 친교를 맺으면 자신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모든 것을 다 해준다는 그의 설명이다.
이규형은 9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영화 기자였던 그의 부친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일본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일본의 대중문화를 보고 즐기면서 3년만 있다 올 생각이었는데 15년이 흘렀다. 그동안 일본 문화가 개방되고 그는 한일 대중문화의 다리 같은 구실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원흉’이라는 단어까지 쓰면서, 그가 한국에 심어놓은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의 저서 ‘일본을 보면 돈이 보인다’는 100만부가 팔렸다. 일본문화 개방에 대한 그의 주장이 대중에게는 설득력이 있었다는 방증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SBS 개국 때부터 일본 TV 오락 프로그램을 접목하는 데 관여했고, 결국 공영방송인 KBS도 ENG 카메라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을 따랐다는 것이다. 요즘은 오히려 일본 사람들이 한국 TV를 보면서 재미있어한다. ‘겨울연가’가 한국에서 히트했지만 큰돈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본은 우리보다 인구 3배, 문화의 총량도 3배나 된다. 달력 하나 찍어도 개런티로 1억엔을 준다.
영화 ‘DMZ: 비무장지대’를 구상한 것은 78년 7월 그가 군 입대해서 전방 비무장지대 수색대원으로 근무할 때부터다. 제대한 뒤 황기성사단 등 여러 곳에 시놉시스를 내놓으면 군사정권 아래서 어떻게 그런 소재를 영화화할 수 있겠느냐고 다들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박찬욱 감독의 ‘JSA 공동경비구역’이 나왔다. 그 영화를 보고 이제는 때려죽여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2001년 9월 ‘호텔 코코넛’이란 제목으로 촬영에 들어간 이 영화는 월드컵공원이 들어서기 전의 난지도에서 비무장지대 신을 촬영했다. 분위기는 최적이었다. 그러나 중간에 펀딩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서 촬영이 중단되었고, 주연배우 김래원 등이 교체된 뒤 지난해 촬영을 재개해 올 여름까지 보충촬영을 했다. 그리고 메이킹 필름을 일본에 돌려서 결국 도에이 영화사가 투자를 결정하고 극장에서 개봉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DMZ: 비무장지대’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반드시 이 영화를 일본에서 개봉하겠다고, 그리고 일본인들을 적어도 세 번은 웃게 만들고 세 번 이상 울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은 일본에서 15년 동안 산 그의 자존심이었다. 11월9일, 일본에서 첫 시사회를 한 결과 그는 일본 관객들의 눈에서 눈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 시사회 호평 …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내 영화”
그의 목에는 아직까지 군번줄이 매달려 있다. 영화가 개봉될 때까지는 자신을 군인이라고 생각하고 항상 군번줄을 목에 차고 다닌다는 것이다. 공수 마크라도 있는 힘든 부대에 들어가야 군대영화를 제대로 만들 것 같아서 그는 수색대에 자원했다. 그런데 수색대에 들어간 지 며칠 뒤 그에게 지뢰밭을 걸어야 하는 임무가 내려졌다. 지금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런 장비 없이 계급이 낮은 순으로 지뢰가 묻혀 있을지도 모르는 그곳을 걸어가야 한다. 그때의 공포라니….
그는 하늘을 향해 기도했다. 하나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시면 좋은 군대영화 만들게요. 하나님 이야기도 할게요.
그런데 무전병이 대인지뢰를 밟았다. 판초 우의에 조각난 시신들을 담아 운반했다. 그는 이 친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다. 그것이 ‘일등병 오딧세이’다.
“인생에서 가장 힘든 게 나이를 먹는 거다. 후배들에게 치여 사라질 때 가장 비참하다. 영화만이 아니다. 40대의 눈물이다. 그러나 너희에게 감각이 있다면 나에게는 이제 인생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난 서른 살에 만든 영화가 흥행성적 1위를 거두었는데, 당시를 생각해봐도 ‘나이 드신 분들이 나를 어떻게 감당하겠어. 지금 대학생들의 말투를 그들이 어떻게 알아, 그랬지만 이제는 거꾸로 내가 그 세대가 되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없는 힘, 나에게는 살아온 인생이 있어’ 라고 생각한다.”
결국 우리들의 이야기는 인생의 바닥에까지 도달했다. 나는 그에게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느 날 월트 디즈니의 생애를 보니, 그는 인류 발명품 중 가장 위대한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결국 전쟁이라는 것도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하는 행위다. 대부분의 군인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싸운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나는 끝없이 공부하면서 변해가는 저 테마를 풀어나갈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사랑의 폭이 넓어졌다. 인간이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내가 영화에서 가장 소중히 다루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