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를 이용한 커닝은 전대미문의 사건이 아니다. 예전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발생할 전망이다. 지난해 경기 J고등학교에서도 학교 시험 때 문자메시지를 이용한 커닝 사건이 발생했다. 공부 잘하는 한 학생이 문자메시지에 답을 적어 다른 교실에서 시험을 보고 있는 친구들에게 전송한 것. 문자메시지 한 통에 3∼4개 교실, 10여명의 학생이 연루된 이 커닝 사건으로 평온하던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마음만 먹으면 하죠. 수업시간에도 엎드려서 문자 보내면 안 걸리는데, 시험 볼 때라고 해서 걸리겠어요?”(고3 수험생 C양)
시험장은 더 이상 파놉티콘(panopticon·원형감옥)이 아니다. 파놉티콘에서 재소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간수처럼 시험장 학생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감시하는 감독관들은 오늘날 ‘시선의 권력’을 잃었다. 학생들이 품속에 숨겨놓고 얼마든지 몰래 시험장 ‘밖’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휴대전화를 갖게 된 까닭이다.
휴대전화 커닝 수법은 이미 오래된 일 ‘예고된 일탈’
사실 학생들은 휴대전화까지 동원할 필요도 없다고 한다. 볼펜 딸각 거리는 소리, 발 신호, 기침 소리 등등 커닝의 방법은 무궁무진하기 때문이란다. 그런데 이런 수법은 낯익다. 어른들도 학생 때 즐겨 애용하던 수법이기 때문이다. 사실 조선시대 과거 시험장에서도 커닝이 벌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커닝은 역사적 행위 아니던가. 이번 광주의 수능부정 파문처럼 대규모 커닝은 그동안 안 한 것이 아니라, 휴대전화 같은 수단이 없어서 못한 것 아닌가.
요즘 청소년에게 휴대전화란 단순히 무선이동통신이 아니다. 노래와 게임과 사진 찍기가 가능한 장난감이자, 또래집단과 자신을 이어주는 끈이자, 화장실 갈 때조차 가지고 가지 않으면 찜찜한 ‘나만의 분신’이다. 깜빡 잊고 휴대전화를 집에 두고 나오면 지각을 불사하고서라도 집에 다시 돌아가는 게 요즘 청소년이다. 더 이상 수업시간에 몰래 ‘쪽지’를 전달하는 학생은 없다. 대신 ‘문자를 날린다’. 같은 반, 옆 반, 심지어 다른 학교 친구에게까지, 수업시간에 몰래 속닥대는 수다는 전파를 타고 공간을 초월하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는 박모 교사는 ‘휴대전화 키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했다.
“수업시간에 휴대전화를 사용하다 적발되면 1주일 압수하는 게 원칙이에요. 그러면 차라리 2주일 대청소하겠다며 매달리죠. 내일 꼭 받아야 하는 전화가 있다면서 내일 하루만 다시 돌려달라는 아이도 있어요.”
2002년 자발적으로 월드컵 거리응원에 나선 청소년들.
이번 대규모 커닝 사건에 대해 어른들은 “어떻게 전화기로 커닝할 생각까지 했을까”라며 놀라워하지만, 이들에게 이보다 더 친숙한 매체는 없다. 새로 출시되는 휴대전화 모델명과 광고모델, 제품 특성을 줄줄이 꿰는 것은 기본. 이번 휴대전화 커닝에 이용된 초경량 저가상품인 LG-NS1000 모델의 경우 TV 광고조차 하지 않지만, 휴대전화 시장에 통달한 청소년들이 커닝에 적합한 휴대전화 모델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지난해 J고등학교 휴대전화 커닝 사건이 벌어졌을 때 교사들을 질색하게 했던 것은 정작 커닝이란 일탈행위 자체가 아니라, 커닝에 대한 아이들의 인식과 태도였다. 커닝을 모의한 아이들은 이번에 광주에서 수능부정 파문을 일으킨 학생들처럼 철통 보안을 유지하며 비밀스럽게 휴대전화 커닝을 모의하지 않았다. 주변 아이들의 귀에 들릴 정도로 열린 자세로 커닝을 모의했고, 따라서 자연스레 학교 당국에도 알려지게 됐다.
한 교사는 “이 사건이 알려진 뒤 다른 학생들이 보인 반응이 커닝 자체보다 더욱 놀라웠다”고 털어놓았다. 학생들이 커닝 사건에 분개한 이유가, ‘친구들이 나쁜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하마터면 내가 손해볼 뻔했기 때문’이라는 것. 이 같은 반응은 이번 사태를 둘러싼 수험생들의 반응과도 비슷하다. 인터넷 게시판 등을 통해 ‘얘들이 적발되지 않았더라면 내가 손해볼 뻔했다’ ‘차라리 잘됐다. 덕분에 경쟁자가 많이 줄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광주 수능부정 사건에 가담한 학생 6명이 11월24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기다리고 있다.
일선 교사들은 요즘 청소년들이 이전 세대와 달라진 점에 대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쪽으로 의사결정을 하며 원칙보다 개인 사정을 더 중시하는 경향이 짙다’고 지적한다. 커닝도 비도덕적인 행위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커닝은 내게 불이익을 가져다주는 행위’로 이해하는 셈이다. 서울 시내 고교에 근무하는 김모 교사는 이 같은 청소년 특성이 드러나는 한 가지 예로 두발 검사 풍경을 제시했다.
“내가 학교 다닐 때는 나는 적발됐는데 나보다 머리 긴 친구가 적발되지 않으면 그 친구를 운 좋다며 부러워했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은 당당하게 몇 학년 몇 반 친구가 나보다 머리가 더 길다고 고발한다. 부당하게 혼자서만 불이익 받지 않겠다는 태도다.”
이 같은 청소년의 새로운 가치 판단기준에 대해 한국청소년개발원 이종원 연구위원은 “압축성장으로 인한 폐단이 청소년 세대에까지 미친 결과”라고 지적한다. 사회 전체가 급속하게 변화하면서 공정한 규칙에 의한 보상이 이뤄지는 사회 체제를 갖추지 못한 혼란스런 상태에서 청소년이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기준이란 ‘이득’이라는 설명이다.
수능부정 혐의 수험생들이 사용한 휴대전화는 ‘바(bar)형’으로 폴더를 여닫을 필요가 없다.
아예 ‘커닝’을 권하는 어른도 있다. 지난해 서울 강남의 M학원에서 입시 준비를 했던 강모양은 “유명 국어강사가 수능시험을 한 달쯤 앞둔 강의시간에 ‘수능 시험장에서 이제까지 커닝했다가 적발된 사례는 한 건도 없으니 정 급하면 커닝하라’고 했다”고 말했다. 올해 수능 감독관으로 참여했던 최모 교사는 “자칫 학생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부정행위를 적발하는 것은 무척 부담스런 일”이라고 털어놨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1994년 수능시험이 시작된 이래 적발된 부정행위는 4건의 대리시험 적발이 전부다. 커닝하다 시험지가 몰수된 사례는 없는 셈이다.
요즘 청소년은 휴대전화와 인터넷이라는 최첨단 정보화 기술을 즐겨 악용하는 악동이기만 할까. 이들에게서 정보화 기술을 거둬들여야만 과거의 온순한 아이들로 복귀할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정보화 시대의 아들 딸들인 우리 청소년이 표출한 새롭고도 긍정적인 현상을 경험했다. 2002년 월드컵 거리응원과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가 그것. 그런데 재미난 점은 이번 휴대전화 커닝의 행태가 2002년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월드컵 거리응원과 속성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교실에서 휴대전화 카메라를 이용해 찍은 ‘폰카 사진’.
이경상 위원은 “이번 휴대전화 커닝은 가상과 현실세계를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청소년의 특성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다”는 가담 학생의 고백처럼, 현실세계의 결과는 미처 예단하지 못한 채 가상의 게임을 즐기듯 커닝 행위를 즐긴 속성도 있다는 것.
월드컵 거리응원과 여중생 사망 추모 촛불시위가 이미 증명했듯, 우리 청소년의 디지털에 기반한 에너지는 무한히 긍정적인 방향으로 표출할 수 있다. 이번 대규모 수능부정 파문은 이 같은 에너지가 ‘학벌 지상주의’란 암초를 만나 그 방향을 180도 전환한 사건이라 하겠다. 한국청소년개발원 이종원 연구위원은 “기성세대가 정보화 시대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을 괴롭히는 몇 가지 암초를 제거해준다면, 이들이 가진 무한 에너지는 386세대가 민주화에 기여했던 것 이상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