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보은, 진천, 경주 등 태권도공원 유치를 신청한 지자체들이 벌인 관련 행사들.
문화관광부(이하 문광부)는 당초 공원 유치를 신청한 17개 지자체 가운데 10개 이내로 1차 후보지를 선정하겠다며 그동안 모든 지역에 대한 현장 실사를 했다. 하지만 결과 발표를 하루 앞둔 24일, 돌연 ‘실무위원들의 개인 사정과 주무 부서 조직 개편’ 등의 석연치 않은 이유를 들어 이를 연기했다. 이에 따라 연내에 최종 부지를 선정한 뒤 2013년까지 태권도 공원의 조성을 끝마치겠다던 문광부의 계획도 실현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연내 최종 부지 선정 불투명
태권도 공원 조성 사업은, 태권도 종주국으로서의 위상을 세우고 국가의 관광 전략 상품을 만든다는 취지로 2000년 박지원 당시 문광부 장관이 추진한 것. 하지만 21곳의 지자체가 유치를 신청하면서 경쟁이 과열 양상으로 치닫자 그해 10월 무기한 연기된 바 있다.
문광부는 올 4월12일 이 사업의 재추진을 발표하며 사업 규모를 축소해 총사업비 1644억원, 총 70만평 규모로 태권도 명예의 전당, 종주국 도장, 종합 수련원, 운동장 등의 기본 시설과 세계문화촌, 숙박촌, 스포츠 콤플렉스, 전통한방 요양원 등 부대시설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문제는 공원 규모와 투자액이 첫 계획(100만평 대지에 2000억원 투입)에 비해 크게 줄었는데도 발표 즉시 지자체의 공원 유치 운동이 재점화됐다는 점이다. 문광부는 2000년, 태권도 공원이 들어설 경우 1500여명의 고용 창출과 연간 150여만명의 국내외 관광객 유치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경기침체와 관광수지 악화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지자체들로서는 이러한 부대 효과에 구미가 당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따라 재개된 태권도 공원 조성 사업에는 경북 경주, 전북 무주, 충북 진천, 광주 광산 등 전국 17개 지자체가 뛰어들어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며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지도 참조). 서울이 유치를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바람이 덜한 듯 느껴질 뿐, 해당 지역의 열기는 상상을 뛰어넘는다.
경북 경주시의 경우 ‘태권도 공원 경주 유치 범시민 추진위원회 국토순례단’이 구성돼 연인원 1000명의 시민이 9월4일부터 10월7일까지 34일 동안 전국을 걸으며 태권도 공원 경주 유치를 홍보했다. 이들은 총 100만명의 서명을 받아 최근 청와대와 문광부 등에 제출했으며, 11월18일에는 불국사 주지 종상 스님이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태권도 공원은 경주에 유치돼야 한다”는 견해를 밝힌 축원문을 청와대에 보내기도 했다.
경주시 추진위 관계자는 “시의회도 태권도 공원 조성에 필요한 시유지는 무상 출연할 수 있도록 적극 돕겠다는 내용의 동의서를 채택했다”며 “경주에서는 갓난아이를 빼놓고 전 주민이 서명에 참여했을 만큼 관심이 높은 상황”이라고 말했다.
충북 진천군의 열기도 이에 뒤지지 않는다. 2000년부터 ‘화랑의 본향 진천에 태권도 공원이 들어서야 한다’고 강조했던 진천군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김유신 장군 탄생지에 화랑무예태권도 성지 표지석을 세웠고, 태권도 공원의 모델로 꼽히는 중국 소림사에 조사단도 파견했다. 올 6월에는 해외 태권도인들까지 참여하는 ‘세계태권도 화랑 문화축제’를 열었으며, 태권도를 소재로 하는 모바일 게임을 자체 개발해 보급하고 있기도 하다. 교육청 차원에서 초등학생들이 등하교 때 태권도복을 입도록 지도해 진천 거리에서는 태권도복을 입고 다니는 어린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말 그대로 군 전체가 ‘태권도 공원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모양새다.
전북 무주군도 11월10일 아테네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 문대성 선수를 홍보 모델로 위촉해 본격 경쟁에 나서고 있다. 군 예산을 들여 문 선수가 무주군 마크가 찍힌 태권도복을 입고 운동하고 있는 모습을 담은 광고를 제작했으며, 이미 서울 지하철 구내에서는 ‘태권도 공원을 무주로’라는 내용이 담긴 이 광고가 방송되고 있다. 2000년 첫 경쟁 당시 도 내에서만 무주, 익산, 완주, 진안 등 4개 시·군이 유치 신청서를 내는 바람에 ‘전선이 분열됐다’는 자체 평가를 내린 전북도는 이번에는 후보지를 무주로 단일화하고 도 차원의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일부 시·군 수억원대 예산 쏟아부어
전북일보 사설에 “뜻있는 전북 도민들은 동계올림픽 개최지와 빅딜을 해서라도 태권도 공원만은 반드시 유치해야 한다고 목청을 돋우고 있다. 실수 없이 추진해줄 것을 촉구한다”는 내용이 실릴 정도로 무주군의 태권도 공원 유치 여부는 지금 도 전체의 관심거리다.
충북 보은, 광주 광산, 인천 강화 등도 최근 잇따라 시민대회 등을 열며 본격 경쟁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일부 시·군이 홍보전에 들인 예산은 이미 수억원대를 넘어섰다. 과열 경쟁을 막기 위해 태권도 공원 조성 사업을 뒤로 미룬다던 2000년의 취지가 무색해진 상황이다.
태권도 공원 조성 추진 실무위원회 한 관계자는 “유치 신청 지역 주민들은 지난 4년 동안 ‘왜 우리 지역이 태권도 공원 입지에 적합한지’에 대해 수없이 들어왔기 때문에 이제는 떨어질 경우 무조건 ‘선정 과정에 부정이 있다’고 나설 수밖에 없게 됐다”며 “상황은 오히려 더 나빠졌다”고 토로했다.
지자체들로서도 4년이나 추진해온 사업이 무산될 경우 주민들의 분노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경쟁, 예산 최대 투입’을 외치고 있는 상태다.
이 과정에서 갖가지 추문들이 불거지고 있다. 11월3일부터 6일까지 국기원에서 열린 ‘2004 세계 태권도 한마당’은 유치 신청 지자체들의 로비 마당이었다는 뒷말이 무성하다. 세계 15개국 태권도인이 참여한 행사인 까닭에 태권도 공원 입지 선정에 영향력을 행사할 만한 인사들이 대거 참가하자, 각 지역 추진위 관계자들이 이들을 따라붙어 대회 분위기를 흐렸다는 것이다.
일부 시장 및 군수가 직접 로비전에 뛰어들었다거나 지역 국회의원을 동원했다는 이야기도 설득력 있게 퍼져나가고 있다. 태권도협회의 한 관계자는 “지자체 관계자들의 방문이 잦아 문턱이 닳을 지경”이라며 “우리에게 실권이 없다고 말해도 물밑 로비를 시도하는 등 경쟁이 치열하다. 2000년 상황과 달라진 점이 하나도 없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경희대 태권도학과 전익기 교수는 “모든 태권도인들의 염원이었던 공원 조성 문제가 지자체의 경쟁과 예산 낭비 등으로 변질돼가는 것 같아 가슴 아프다”며 “지금이라도 태권도 공원의 조성 목적을 분명히 해 선정과정이 전 국민의 축제가 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익명을 요구한 태권도협회 한 관계자는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어느 지역이 태권도 공원으로 선정되든 후유증이 나타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실무위원들이 몸을 사리고 있다”며 “정치적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으면 태권도 공원 사업이 또 한 번 표류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