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전자 공장 생산라인.
삼성전자가 234억원을 출연해 만들어진 무궁화전자는 삼성전자의 자회사도 협력업체도 아니다. 장애인들만의 독립기업이다. 자생력이 강한 무궁화를 회사 이름으로 삼고 정원에 무궁화를 심은 이유도 그래서다. 그 후 10년, 이 회사는 청소기 5만 대를 수출하는 흑자기업으로 성장했다. 올 초에는 자체 브랜드 스팀청소기를 개발, 시장을 공략 중이다.
이곳 직원의 75%(126명)는 장애인이다. 그래서 그들이 근무하는 이곳은 세상 어느 공장보다 편하게 지어졌다. 설계 단계에서부터 장애인들을 데려와 체험토록 해 충분한 시뮬레이션을 거쳐 완공됐다. 경영 지원을 맡고 있는 김기경 차장은 “휠체어를 탄 중증장애인이 사업장 어느 곳이라도 혼자 힘으로 갈 수 있다”며 “비 오는 날에도 비 한 방울 맞지 않고 기숙사고 식당이고 어디든 이동할 수 있다”고 말했다.
장애 근로자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
삼성전자의 역할은 그것뿐이었다. 장애인 근로자들이 일할 수 있는 환경만 만들어주고 생산도 마케팅도 그들 스스로 하도록 했다. 초기에 인력을 파견해 준비를 도왔지만, 본격적으로 가동된 뒤에는 모두 철수했다. 이곳 장애인 근로자 수만큼 면제받는 부담금(직원의 2%를 장애인으로 고용하지 않는 기업에 부과하는 벌금. 직원 1명당 50만원 정도)을 전액 복지재단을 통해 무궁화전자에 지원한 것이 전부였다.
무궁화전자는 95년부터 유·무선전화기, 정수기 등을 생산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일본 장애인 회사인 혼다태양과 교환근무를 시작했다. 일본 닛산과 제휴해 장애인 운전보조장치인 핸드 컨트롤러 장착사업도 했다.
그러나 근무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장애인의 생산력은 일반인에 비해 떨어지게 마련이다. 불량률도 문제였다. 그런데도 시설과 인력에 대한 고정비용은 더 들 수밖에 없다. 김 차장은 “일반인에 비해 생산성은 25% 떨어지는데 비용은 25%가 더 들어 결국 우리는 절반의 경쟁력으로 살아남아야 했다”고 말했다.
그래서 97년 경제위기의 파고는 높기만 했다. 청소기 등 소형가전을 단순조립해 납품하는 것만으로는 만성적자를 벗어날 수 없었고, 그나마 가동률도 50%를 넘지 못해 일손을 놓고 지내는 직원도 상당수였다.
삼성전자도 고심했다. 그렇다고 직접적으로 지원할 방법은 없었다. 재단을 통해 기부 형태로 도움을 줄 수도 있었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근본적으로 자생력을 키울 수밖에 없었다. 삼성전자 출신으로 2002년 부임한 김동경 공장장이 해결사로 나섰다. 그가 찾아낸 답은 ‘디지털’이었다. 장애인이라고 편리한 근무환경만 제공하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그들에게 시장에서 경쟁력 있는 첨단분야에 도전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에 따라 TV, 휴대전화 등의 핵심 부품인 인쇄회로기판(PCB)을 조립하는 표면실장라인(SMP)을 증설했다. 이를 위해 지하 1층 작업장에 라인도 신설했다. 또 놀고 있는 조립라인에 삼성전자의 디지털TV 조립라인도 새로 설치했다. 기존에 생산하던 청소기, 유·무선전화기, 정수기 등보다 훨씬 시장성이 있는 디지털 가전으로 사업을 확장한 것이다.
아래층에서 작업 물량을 확보하면서 후공정을 하는 위층의 라인도 활기를 띠게 됐다. 삼성전자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주문이 쏟아졌다. 어느새 공장 가동률은 100%가 됐고 핸디형 청소기 등 수출 물량이 대폭 늘어나면서 자립경영의 기틀을 잡았다. 그리고 2003년 무궁화전자는 6억7000만원의 순이익을 내며 설립 9년 만에 드디어 흑자기업으로 우뚝 섰다. 지난 3년간 매출액은 총 350억원이 넘고 흑자 규모는 15억원 정도다.
김동경 공장장은 “당시 무궁화전자의 사업 혁신을 통한 흑자 전환은 우리 직원들에게는 하나의 신화였다”며 “그것은 가전회사였던 삼성전자가 반도체 사업을 수종해 지금의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것에 견줄 만큼이나 기록적인 사건이었다”고 자평했다.
자신감을 얻은 직원들은 더욱 욕심을 냈다. ‘우리 손으로 우리 브랜드를 만들자’는 꿈을 가꾸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무궁화전자가 생산하는 모든 제품은 ‘삼성’ 브랜드로 팔리고 있었다. 이런 OEM(주문자상표 부착)방식이 아닌 자체 브랜드를 가진 제품을 만들기 위해 직원들은 머리를 맞댔다.
고심 끝에 찾아낸 아이템은 스팀청소기. 삼성전자의 브랜드 파워에 기대지 않으면서 그동안 쌓아온 청소기 개발 노하우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아이템이라고 판단했다. 2월 출시한 ‘바로바로 스팀청소기’가 그것이다.
무궁화전자가 자체 브랜드로 개발, 생산해 시판 중인 ‘바로바로 스팀청소기’. 초극세사 소재의 걸레가 장착됐고, 100℃의 스팀이 살균까지 해준다고 회사 측은 설명한다.
바로 그때 공장장이 직원들을 독려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우리는 우리 힘으로 최고의 제품을 만들었다. 우리가 공들이고 노력한 만큼 제값을 받을 것이다.”
무궁화전자는 스팀청소기 분야에서 후발주자면서도 ‘바로바로’를 기존 유명 브랜드보다 비싼 값에 출시했다. 제품이 더 뛰어나다는 자신감에서다.
책임감, 협동심은 비장애인보다 뛰어나
그러나 막상 대형 할인점에 제품을 들여놓고는 모두가 마음을 졸였다. 이마트 매장을 둘러보기 위해 나간 한 장애인 직원은 “‘사람들이 값이 더 비싼 이름 없는 제품을 사갈까’ 하는 마음에 하루 종일 노심초사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악조건에도 제품은 반응이 썩 좋았다. 써본 사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더니 현재 월 판매대수 1500대를 돌파하며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이고 있다.
김 공장장은 “장애인 근로자 중에는 일반인보다 뛰어난 집중력을 가진 사람이 많다”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신제품 디자인을 알아서 스케치해 제안하는 열정을 보이는 직원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직원들의 가장 큰 장점을 맡은 일은 어떻게든 끝마치는 ‘책임감’과 ‘협력을 통한 경쟁’으로 꼽았다.
무궁화전자 직원들은 여느 중소업체 직원 못지않는 급여를 받고 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다. 그들이 받는 급여는 그들 스스로 만들어낸 부가가치의 대가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우리는 그들에게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아준 적이 없다”며 “단지 우리가 고기를 잡았던 방법을 알려주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홀로서기에 성공한 무궁화전자는 지금 대어를 낚기 위해 힘껏 그물을 던졌다. 만선을 할지는 역시 그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