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야 케즈만, 아르옌 로벤, 디디에 드로그바 (왼쪽부터)는 지난 시즌 첼시에서 함께 뛰었다. 맨 오른쪽은 잉글랜드 국가대표 조 콜.
각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의 인연도 얄궂다. 아르헨티나의 주포 에르난 크레스포, 네덜란드의 파괴자 아르옌 로벤, 세르비아몬테네그로의 킬러 마테야 케즈만, 코트디부아르의 간판 골잡이 디디에 드로그바는 모두 전·현직 첼시맨이다. 런던의 동지가 독일 땅에서 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런던의 동지들 ‘얄궂은 인연’
어떤 기분일까. 얼굴을 맞대고 미소 짓다 등을 돌리고 창을 겨눠야 한다는 것이. 4총사 모두 첼시의 영광을 함께했는데, 크레스포와 로벤, 드로그바는 첼시에서의 활약을 이어가고 있으며 케즈만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첼시를 떠나 스페인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했다. 케즈만은 로벤, 드로그바와 함께 지난 시즌 첼시가 반세기 만에 프리미어리그 정상에 오르는 데 일조했고, 크레스포는 지난해 여름 AC밀란 임대생활을 정리하고 복귀한 뒤 쾌조의 골 감각을 과시하며 리그 2연패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좀더 안으로 들어가보면 첼시에서의 생활이 4총사 모두에게 행복한 기억만 남긴 것은 아니다. 크레스포는 부침에 시달렸다. 1999년 파르마 소속으로 UEFA(유럽축구연맹)컵 우승 등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화려한 자취를 남긴 그는 2003년 여름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잉글랜드 무대로 적을 옮겼다. 하지만 런던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달라진 리그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며 부진을 거듭했고 1년 만에 AC밀란으로 임대되는 시련을 맞았다. 이탈리아 리그에서 절치부심,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2골 등 재기에 성공한 끝에 다시금 첼시로 복귀할 수 있었다.
케즈만의 시련은 더욱 가혹했다. 박지성, 이영표와 함께 네덜란드 에인트호벤의 전성시대를 이끌면서 이 클럽 역사상 최다골을 터뜨린 케즈만은 2004년 유럽 언론의 집중 조명 을 받으며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갑부 클럽 첼시의 초특급 골잡이들과의 주전 경쟁에서 밀리며 벤치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결국 선발 기용 문제로 주제 무리뉴 감독과 마찰을 빚어 방출되듯 팀을 떠나고 말았다.
반면 드로그바와 로벤은 승승장구했다. 나란히 2004년 여름 첼시에 둥지를 튼 두 사람은 팀 내 입지를 굳히며 ‘블루스(첼시의 애칭) 전성시대’를 이끌고 있다. 드로그바는 두 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하며 첼시의 주전 스트라이커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다. 프랑스 마르세유 소속으로 UEFA컵 득점왕에 올랐을 만큼 큰 무대에 강한 면모를 과시해온 드로그바는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빛을 발했고, 조국 코트디부아르를 사상 최초로 월드컵 본선으로 이끄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가 조지 웨이 이후 아프리카 축구 역사상 두 번째 FIFA (국제축구연맹) 올해의 선수상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로벤도 첼시에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에인트호벤에서 뛰며 당시 팀 동료이던 박지성에게 “믿어지지 않는 플레이를 하는 선수”라는 극찬을 받은 로벤은 첼시 이적 후에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이적 초반 언어와 성격 탓에 적응에 애를 먹는 모습을 잠시 보이기도 했으나 특유의 폭발적인 스피드와 돌파로 그라운드를 헤집으며 첼시 전력에서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코트디부아르의 킬러 디디에 드로그바.
첼시에서 성적 희비 엇갈려
저마다 조국의 간절한 특명을 부여받은지라 4총사의 격돌이 더 기다려진다. 크레스포는 월드컵을 맞는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아르헨티나는 잉글랜드, 스웨덴, 나이지리아와 함께 죽음의 조(F조)에 편성돼 결국 조별예선 탈락이라는 고배를 들이켰기 때문이다. 선배들의 눈물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크레스포는 “이번만큼은 다르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
로벤도 마찬가지다. 네덜란드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오렌지 군단은 히딩크 감독의 지휘 아래 4강에 올랐던 98년의 프랑스월드컵 환희를 잊지 않고 있다. 8년 만의 설레는 외출인 만큼 영광을 재현하겠다는 다짐이 남다르다. 네덜란드 2006년팀은 아드보카트 감독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유로2004 4강 멤버를 주축으로 이뤄져 있다.
케즈만에게는 이번 독일월드컵이 특별할 수밖에 없다. 유고슬로비아 시절 월드컵 단골손님이었으나 탈냉전을 거치며 체제 붕괴 등 사회 혼란을 겪었고, 2003년 2월 세르비아몬테네그로라는 국가연합을 출범시킨 뒤 출전한 첫 월드컵 본선무대이기 때문이다. 네덜란드 리그에서 3차례나 득점왕에 오르는 등 개인적인 성취는 이룰 만큼 이뤘으나 대표팀에 이렇다 할 보탬을 주지 못한 만큼 월드컵을 향한 그의 시선은 매서울 수밖에 없다.
드로그바에게도 이번 월드컵은 설레는 첫 경험이다. 4총사 중에서는 대표팀에서의 이력이 가장 초라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부 아프리카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작은 나라 코트디부아르가 국제무대에 나설 기회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사정이 다르다. 아프리카 지역예선에서 카메룬을 눌렀을 만큼 멤버와 전력이 탄탄하다. 프랑스에서 성장한 드로그바는 프랑스 대표팀을 선택할 수도 있었으나 모국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는 자신의 결단이 옳았음을 보여주겠다며 각오를 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