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차세대 전투기 KF-21. [뉴스1]
“좀 더 매끄럽게 대처할 필요”
인도네시아(인니) 사정에 밝은 한 외교 소식통은 올해 초 한국항공우주산업(KAI)에서 발생한 인니 파견 연구원의 보안 유출 사건에 대한 처리를 이렇게 평가했다. “우리 방산 기술을 보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첨단무기를 공동개발할 정도로 관계가 깊은 국가와 관련해 이 같은 보안 이슈가 발생했다면 최대한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사건 처리가 지나치게 장기화할 경우 중요한 방산 파트너인 인니와의 협력에 차질이 우려되기 때문이다. 인니는 한국과 차세대 전투기 KF-21를 공동개발하는 파트너이자 개발이 완료되면 최초 수입이 유력한 국가이기도 하다.
1월 17일 경남 사천 KAI 본사에 파견된 인니 연구원이 미인가 이동식저장장치(USB)를 소지한 채 퇴근하려다 검색대에서 적발됐다. 보안 규정에 따라 KAI는 이를 즉각 방위사업청과 국가정보원 등 관계 기관에 통보했다. 방위사업청·국군방첩사령부·국가정보원으로 구성된 합동조사단은 해당 직원을 한 달여간 조사한 끝에 3월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에 정식 수사를 요청했다. 사건을 넘겨받은 경상남도경찰청(경남도경)은 같은 달 방위사업법 위반 혐의로 인니 연구원들의 주거지 등을 압수수색했다. 해당 USB에 파일 수천 개가 저장돼 있었고 그중 일부는 설계도면 등 KF-21 관련 자료인 것으로 전해졌다. KAI는 “해당 USB에 있던 자료 중 유의미한 것은 10건 미만이며 일부는 원래 기술 공유 대상”이라는 입장이다. 경남도경 관계자는 11월 20일 기자와 전화 통화에서 “현재 수사는 마무리 단계다. 사건을 최대한 빠르게 종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면서도 “수사와 관련해 자세한 것은 밝힐 수 없다”고 말을 아꼈다.
KF-21은 한국 공군이 오랫동안 운용하던 F-4·F-5 기종의 도태에 따른 전력 공백을 막기 위해 개발 중인 한국형 차세대 전투기다. 당초 ‘한국형 전투기(KF-X) 사업’으로 불린 KF-21 개발은 2002년 ‘장기 신규 소요’에 반영된 후 13년간 7번 사업타당성 평가를 거칠 정도로 곡절이 많았다. 2016년 인니가 연구개발에 참여하면서 사업이 본격적으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공동개발이 완료되면 인니는 KF-21 48대를 구매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전투기 사업은 보통 200대 이상을 판매해야 손익분기점을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새로 개발된 전투기의 경우 판로 확대를 위해 신뢰성 확보가 급선무다. 한국 공군에 이어 인니 공군이 KF-21을 운용하는 것은 수출 성과뿐 아니라, 신뢰성 확보 측면에서도 중요도가 높다.
그간 인니는 한국의 주요 방산 파트너로서 수출 마중물 역할을 해왔다. 가령 KAI가 개발한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을 2011년 처음 수입한 국가가 인니다. 한국과 인니 공군의 실운용으로 우수한 성능이 입증됨에 따라 FA-50을 비롯한 T-50 플랫폼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 결과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중동, 유럽에서도 총 138대 수출 계약이 성사됐다. 인니는 KF-21뿐 아니라 기존에 운용 중인 KT-1과 FA-50의 추가 구매 의사도 밝혀 KAI와 협상을 진행하고 있다. KT-1, T-50 추가 수출과 KF-21 최초 수출이 성사될 경우 수출 규모는 약 10조 원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인니 관계 미묘한 기류
문제는 최근 보안 이슈가 신속히 해결되지 않으면서 인니와의 방산 협력 부분에서 각종 리스크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보안 유출 사건에 대한 수사가 장기화함에 따라 인니 측과의 공동개발 기본합의서 및 비용분담합의서 개정이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한-인니 관계에 미묘한 기류가 감지돼 우려를 키우고 있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신임 인니 대통령이 공식 취임을 전후해 미국, 프랑스, 일본, 중국 등 주요국을 잇달아 순방했음에도 한국은 찾지 않은 것이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3성 장군 출신 정치가로 이전 정부에서 국방장관을 지냈다. 국방장관 재임 시절 한국과의 방산 협력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평을 받았다. 그런 그가 주요 방산 협력국인 한국을 찾지 않은 것은 불만을 우회적으로 표출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이런 가운데 최근 중국이 인니에 잇달아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당선인 신분으로 중국을 찾은 데 이어 취임 후 첫 순방지로 중국을 택했다.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서 양국이 ‘중첩해역’에서 공동개발 협력을 모색한다는 발표도 나왔다. 그간 인니와 중국은 남중국해에 인접한 북(北)나투나해에서 영유권 분쟁을 벌여왔다. 그랬던 두 나라 정상이 북나투나해를 특정하진 않았지만 분쟁 지역에서 협력 의지를 보인 것이다. 최근 중국은 대(對)인니 투자 규모를 급격히 늘리고 있다. 미국의 경제 봉쇄에 대응한 시장 확대 일환이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군 시절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는 입장이었다고 한다. 그가 국방장관으로 부임하자 중국은 공식 외교 라인은 물론, 화상(華商) 인맥까지 동원해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결과가 프라보워 대통령 당선·취임 후 잇따른 방중으로 이어졌다는 관측이다. 한국으로선 미·중 전략 경쟁 속 중국의 영향력이 인니에서 크게 확대되는 것은 아닌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다.
한-인니 관계는 2017년 ‘특별 전략적 동반자’로 격상됐다. 한국은 인니에 대한 외국인직접투자(FDI) 규모에서 중국, 싱가포르에 이은 3위권 국가다. 방산을 위시한 경제협력뿐 아니라 국제 안보 측면에서도 인니와의 관계는 중요한 자산이다. 외교 소식통은 최근 보안 유출 사건 대응과 한-인니 관계 발전 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과거 방한한 인니 특사단 숙소에 한국 정보기관 직원들이 잠입해 각종 자료를 훔치려다 들통이 나지 않았나. 해당 직원들이 현장에서 붙잡힌 데다, 국내 언론에 대서특필돼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당시 인니 정부의 공식 입장은 ‘우리는 그런 사건에 대해 모른다’였다. 물론 막후에서 우리 측 사과는 받았겠지만 외교 현안으로 쟁점화하지 않은 것이다. 인니 입장에서도 유쾌할 리 없지만 당장 급한 협력을 위해 냉철하게 대응한 것이다. 당시 인니에서 ‘한국이 우리 자료를 탈취했다’며 반한 감정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따라서 실제로 인니 연구원이 보안 유출을 저질렀다면 인니로부터 제대로 사과를 받되, 기존 방산 협력은 그대로 이어가는 현명한 대처가 필요하다.”
김우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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