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보리가 빚은 술에 내가 취했네. 재앙을 물리치는 술, 웃음이 넘치는 즐거운 술에 내가 취했네.”
이후 수수보리는 일본 술의 신으로 추앙받아 현재 ‘사가 신사(佐牙神社)’에 모셔 있다. 일본에서는 수수보리를 통해 최초 양조법이 전해졌다고 본다. 사가라는 지명이 사케(酒)의 유래가 됐다는 주장도 있다. 흥미로운 점은 사가라는 말이 한국어 ‘삭다’ ‘삭히다’ 발음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충남 부여 정림사지박물관에 복원돼 있는 백제인 생활상. [한국관광공사 제공]](https://dimg.donga.com/ugc/CDB/WEEKLY/Article/67/ca/5a/0f/67ca5a0f1196d2738250.jpg)
충남 부여 정림사지박물관에 복원돼 있는 백제인 생활상. [한국관광공사 제공]
백제, 일본 문화·산업에 영향
그렇다면 응신왕은 왜 하필 백제인을 불러 술을 빚게 했을까. 응신왕은 한반도와 매우 활발하게 교류한 인물이다. 백제·신라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백제 학자와 기술자를 초청해 일본 문화 발전을 촉진했다. 대표 인물로는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파한 왕인(王仁)이 있다. 그를 통해 일본에 한자와 학문이 보급됐으며, 응신왕은 지식과 교양을 중시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응신왕이 이처럼 한반도 지식인을 받아들인 것을 두고 그가 백제 왕족 출신이라는 설이 제기된다. 일본 역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는 책 ‘백제에서 건너간 일본 천황’에서 응신왕이 백제에서 건너온 왕족일 개연성을 거론한다. 또 응신왕이 백제 21대 개로왕의 아들 혹은 동생인 곤지왕이라는 주장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곤지왕은 개로왕으로부터 후궁을 하사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그가 개로왕의 아들이자 문주왕의 동생이라고 전해진다.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곤지왕은 461년 일본에 파견돼 15년 동안 오사카, 교토 등 간사이 지방을 개척했다. 이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되자 백제로 귀환해 최고위 관직인 내신좌평에 올랐다.
응신왕이 백제 왕족 출신인지 아닌지와는 별개로 이 시기 백제 지식인들은 일본 문화와 산업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고, 백제의 건축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자 현존하는 최고(最古) 목조 건축물인 호류지(法隆寺)를 건립했다. 대장장이들이 전해준 철기 기술을 통해 일본 무기와 농기구가 발달했으며, 백제 직물 기술이 일본 의복 문화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일본 교토 후시미에 정착한 백제인들이 술의 신을 모셔 놓은 ‘마쓰오타이샤 신사’. [명욱 제공]](https://dimg.donga.com/ugc/CDB/WEEKLY/Article/67/ca/5a/67/67ca5a672244d2738250.jpg)
일본 교토 후시미에 정착한 백제인들이 술의 신을 모셔 놓은 ‘마쓰오타이샤 신사’. [명욱 제공]
후시미에 자리 잡은 백제인은 일본에 술 빚는 법을 전파했다. 현재 후시미는 일본 최대 사케 생산지 중 하나로, 양조장 18곳이 밀집해 있다. 한국에서 유명한 일본 대표 사케 브랜드 ‘월계관’(月桂冠·겟케이칸) 역시 이곳에서 탄생했다. 단순히 양조법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농업 기술을 통해 쌀 생산력도 높였다. 쌀로 술을 빚는 터전 전반을 마련한 게 한반도 출신 이주민들인 셈이다.
술의 기원 속 한일 관계
1500년 전 역사로 일본에 대해 우월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그런 감정은 한국 국력과 국민 소득 수준 등이 일본보다 못하던 시절에 갇혀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지금 한국은 전 세계를 무대로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고, 특히 문화적으로 세계인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대를 열고 있다.
응신왕에 관해서는 설왕설래가 많다. 그의 실존 여부조차 100% 확신할 수 없으며, 그가 백제계가 아닌 신라계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중요한 것은 ‘술의 기원’을 매개로 이처럼 흥미로운 한일의 역사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마시고 취하는 데서 끝나기에는 술이 품은 시대적 배경과 역사성이 무척이나 크고 깊다.
명욱 칼럼니스트는…
주류 인문학 및 트렌드 연구가. 숙명여대 미식문화 최고위과정 주임교수를 거쳐 세종사이버대 바리스타&소믈리에학과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젊은 베르테르의 술품’과 ‘말술남녀’가 있다. 최근 술을 통해 역사와 트렌드를 바라보는 ‘술기로운 세계사’를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