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8

2003.06.12

물과 神의 도시 ‘신라 전설’이 흐른다

  • 글·사진/마쓰에·이즈모=전원경 기자 winnie@donga.com 한국토지공사 협찬

    입력2003-06-04 17:3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물과 神의 도시 ‘신라 전설’이 흐른다

    독수리가 날아가는 듯한 형상의 마쓰에 성.

    외국 도시에 서면 항상 낯선 ‘냄새’가 난다. 마쓰에(松江)에서 찾아낸 냄새는 물의 냄새다. 그러나 그 냄새는 항구도시의 그것처럼 비릿하지 않다. 싸하고 시원한 페퍼민트 향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쓰에는 바다가 아닌, 호수와 강으로 둘러싸인 물의 도시다. 마치 바다처럼 파도가 치는 신지코 호수. 둘레가 무려 45km나 된다. 아침저녁으로 이 넓은 호수에서 피어난 물안개가 마쓰에를 둘러싼다. 아련한 안개 속에 서린 일본 전통가옥들의 자태가 유난히 곱다.

    서부 혼슈의 작은 도시 마쓰에와 이즈모(出雲)는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낯선 이름이다. 웬만한 관광 가이드북을 뒤져보아도 마쓰에라는 이름을 찾아내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 마쓰에는 역사의 고장으로 친숙하다. 이곳에는 1607년 축조되어 한 번도 전화(戰禍)를 입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는 마쓰에 성이 있다. 또 바로 이웃한 소도시 이즈모는 20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 최고의 신사 ‘이즈모타이샤(出雲大社)’가 자리한 신들의 고향이다.

    마쓰에, 이즈모가 위치한 시마네 현은 일본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의 남서쪽에 있다. 시마네에 면한 바다로 곧장 나가면 한국의 경북 지역, 그리고 연해주와 맞닥뜨린다. 이 같은 지리적 여건 때문에 시마네 현은 과거 중국대륙과 한반도를 잇는 창구로 일본 고대사의 주요한 무대였다. 포항 영일만에서 떠내려와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연오랑 세오녀’의 전설에서 연오랑 세오녀가 떠내려온 지역이 바로 이곳이라고 한다.

    1819년에는 경북 울진군 평해읍에서 출발한 상선 한 척이 난파되어 시마네 현 인근인 돗토리 현의 아카사키 앞바다에 표류해 온 사건도 있었다. 난파선을 발견한 돗토리번 아카사키 번소는 이들을 잘 대접하고 배를 고쳐 평해로 되돌려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2세기 가까이 구전되어 내려오다 1991년 돗토리현립도서관에서 안의기 선장 등 12명의 선원들을 그린 족자가 발견되어 사실임이 밝혀졌다. 그렇다면 전설 속의 연오랑 세오녀가 표류 끝에 닿은 곳도 이곳 시마네 현일 법하다. 실제로 시마네 현의 서쪽 끝 지역인 히노미사키에 있는 히노미사키 신사에는 신라에서 온 신 수사노오노 미코토를 모신 ‘한국 신사’도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물안개에 둘러싸인 일본 전통가옥 환상

    마쓰에와의 첫 만남은 신지코 호수의 ‘하쿠초(백조)’ 유람선으로 시작된다. 50분 동안 신지코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이다. 마쓰에 역 인근의 비즈니스 호텔에 체크인 하자마자 역 바로 뒤편에 있는 유람선 승강장으로 달려가보니, 하루 여섯 번 운항되는 이 유람선의 마지막 유람선이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이 유람선을 탔는데 그것은 행운이었다. 신지코 호수는 특히 석양이 아름다워 여섯 번째 유람선은 항상 석양을 볼 수 있는 시간에 운항되기 때문이다.

    물과 神의 도시 ‘신라 전설’이 흐른다

    석양에 물든 신지코 호수(위). 마쓰에에서는 어디를 가나 강, 호수 등을 만나게 된다.

    수면 위로 천천히 내리는 석양 속에서 배는 바다처럼 넓은 호수 위를 떠내려간다. 호수 인근으로 펼쳐지는 마쓰에 시의 정경은 그림처럼 고즈넉하다. 아기자기한 전통가옥들 사이로 흰색 현대식 건물인 마쓰에 현립미술관, 파리 센강에 놓인 퐁네프 다리의 일본판인 듯한 마쓰에 오하시 등이 눈에 띈다. 아득히 멀어진 물의 도시는 안개 때문에 아스라한데, 해가 지면서 하나 둘씩 등불이 켜지고 있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갈 때쯤에는 어둠이 완연하다. 푸르고 투명한 초여름의 어스름 너머로 불빛들은 부드럽게 빛난다.

    물의 도시답게 마쓰에에서는 어디를 가도 운하와 강, 호수 등과 맞닥뜨린다. 마쓰에를 둘러싼 호리카와 강은 인공으로 만들어진 강이다. 1611년 완공된 마쓰에 성 둘레로 판 해자(일본어로 ‘호리’라고 한다)가 신지코 호수와 이어지면서 ‘호리카와 강’이 되어버린 것이다. 호리카와 강을 따라 운항하는 유람선도 있다. 이 유람선을 탈 때는 16개에 이르는 다리 아래를 지나갈 때마다 배 갑판 위에 납작하게 엎드려야 한다. 강이 좁은 만큼 다리도 야트막하기 때문이다.

    마쓰에 관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마쓰에 성. 요나고 공항에서 만난 아시아나 항공의 일본인 직원은 “마쓰에를 보러 왔다”는 기자의 말에 “꼭 마쓰에 성에 올라가 보십시오. 정말 아름다운 성입니다. 일본인들 모두 자랑스러워하는 곳이에요” 하며 반드시 이곳에 가볼 것을 권했다.

    마쓰에 성은 이 성의 번주 호리오 요시하루가 1607년부터 5년에 걸쳐 건축한 성이다. 호리오 번주는 높은 지대에 성을 건축하고 둘레에 넓게 해자를 파 난공불락의 요새를 만들었다. 성의 번주는 호리오에서 교고쿠로, 다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손자뻘인 마쓰다이라 나오마사로 바뀐다. 이후 메이지 유신에 이를 때까지 10대에 걸쳐 마쓰다이라 가(家)가 마쓰에 성의 번주로 군림했다. 그러나 성 안에 깊이 24m의 우물을 팔 만큼 철저하게 전쟁에 대비했던 이 성은 정작 한 번도 전화를 입지 않았다. 덕분에 성의 본채인 천수각(天守閣)은 건축 당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30m 높이인 천수각은 검은 5층 탑처럼 생겼다. 날렵한 모습이 마치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막 날아오르는 것 같다. 신발을 벗고 어두운 실내로 들어가니 비상식량을 저장하는 움막과 돌을 떨어뜨리는 창, 우물 등이 눈에 띈다. 마쓰다이라 가의 가보였던 갑옷과 무기, 그릇 등 200여점의 유물도 보관되어 있다. 온몸을 감싸는 일본 무사의 갑옷들이 어둠 속에 웅크린 채 방문객을 맞는다.

    바깥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천수각 안은 가파르다. 5층이 모두 오동나무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전시에는 적이 아래층에서 올라오지 못하도록 이 계단들을 위층으로 끌어올릴 수 있다고 한다. 헉헉거리며 최상층인 5층에 이르니 침침하던 아래층과는 달리 사방이 모두 트인 망루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건물의 70% 이상이 전통가옥이라는 마쓰에 시의 전경이 눈 아래 오밀조밀 펼쳐진다.

    물과 神의 도시 ‘신라 전설’이 흐른다

    히노미사키 신사 한 귀퉁이에서 발견한 한국 신사. 초라한 사당에 불과하지만 ‘韓國神社’라는 팻말은 선명하다.

    마쓰에 시는 교토, 나라와 함께 일본 정부가 지정한 3대 국제문화관광도시다. 그러나 ‘일본의 베니스’라고 불릴 법한 이 소도시는 어찌 된 일인지 외국인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실제로 외국인 관광객이 오는 일이 거의 없는 듯 비즈니스 호텔의 프런트나 역의 관광안내소에서도 영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마쓰에 시 인근, 다마쓰쿠리(玉造) 온천에 있는 교쿠센 호텔의 지배인 사카네 요시가쓰 씨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신도 정확한 이유를 몰라 답답하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시마네 현이 교토나 나라에 비해 역사적 중요성이 떨어진다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아요. 일본 최고의 신사인 이즈모타이샤만 봐도 그렇지요. 해외에 덜 알려졌을 뿐입니다.”

    마쓰에가 물의 도시라면 이즈모는 ‘신(神)의 도시’다. 일본의 신화 가운데는 이즈모 시를 무대로 한 이야기들이 많다. 이들 신화 속에서 이즈모는 ‘신들의 고향’으로 등장한다. 일본의 신석기인 조몬 시대, 또 기원전 3세기경인 야요이 시대의 유적도 이곳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무엇보다 이즈모에는 신 중의 신으로 불리는 오쿠니누시노 미코토를 모신 신사 ‘이즈모타이샤’가 있다. 일본에서 음력 10월은 ‘신이 없는 달’로 불리는데, 음력 10월이면 일본 전역의 신사에 모셔진 800만 신들이 이즈모타이샤에 모여 회의를 연다고 한다. 그래서 이즈모에서는 음력 10월마다 신들이 모이는 달인 ‘가미아리즈키’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린다.

    세 개의 문을 통과해 이즈모타이샤 본전으로 들어간다. 본전 건물은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신사 안의 나무마다, 울타리마다 소원을 적은 쪽지가 새하얗게 매달려 있다. 소원을 적어넣은 나무판들도 눈에 띈다. 특히 결혼을 앞두거나 결혼한 지 얼마 안 되는 신랑 신부의 소원이 많다. 오쿠니누시노 미코토는 인연을 맺어주는 신이기 때문이다.

    물과 神의 도시 ‘신라 전설’이 흐른다

    마쓰에 시 인근 다마쓰쿠리 온천.

    마침 본전 안에서는 갓 결혼한 듯한 젊은 남녀가 제사를 올리고 있다. 북소리 속에서 무녀가 엄숙하게 제사를 올리고 그 앞에는 제사의 주인공인 남녀가 꿇어앉았다. 구경 왔던 일본인들은 저마다 본전 앞에 가서 두 번 절하고 네 번 박수친 후 다시 한번 절하는 예를 올린다. 그 모습이 감히 카메라를 들이댈 수 없을 만큼 진지하다.

    이즈모타이샤에서 다시 차를 타고 혼슈의 서쪽 끝, 히노미사키(日御崎) 신사를 향해 달린다. 15km 가량 되는 해안도로는 왼쪽으로는 바다, 오른쪽으로는 절벽이 펼쳐진 아찔한 길이다. 불과 20여분간의 운전이었지만 손바닥이 땀으로 흥건하다. 이렇게 힘들게 히노미사키 신사를 찾아가는 까닭은 이곳에 신라에서 온 신인 수사노오노 미코토를 모시는 ‘한국 신사’가 있기 때문이다. 요나고 공항의 관광 가이드도 이 한국 신사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란다. 그러나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 신사의 존재를 꼭 확인해보고 싶었다.

    물과 神의 도시 ‘신라 전설’이 흐른다

    혼슈의 서쪽 끝에 선 히노미사키 등대(왼쪽). 일본 제일의 신사로 불리는 이즈모타이샤 전경. 신사 곳곳에는 소원을 적은 나무판들이 빽빽하게 걸려 있다. 이즈모타이샤의 무녀들(오른쪽 위부터).

    방문객들로 붐비던 이즈모타이샤에 비해 바닷가에 자리한 히노미사키 신사는 한적하다. 물새들의 어지러운 울음소리만이 적막한 신사를 채우고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한국 신사’라는 팻말은 보이지 않는다. 한참 경내를 돌다 한쪽 구석에서 기념품을 파는 할머니에게 짧은 일본어로 한국 신사의 위치를 묻는다. 할머니는 “한국에서 왔느냐?”고 묻고는 자신을 따라오라며 앞장섰다. 할머니를 따라 한참 계단을 올라 막다른 산기슭에서 만난 조그만 사당. 그곳에 ‘韓國神社’라고 한자로 씌어진 팻말이 붙어 있다.

    겨우 이 초라한 사당 하나를 만나려고 그 위험한 해안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허무하고 서운한 마음이 왈칵 인다. 신사 앞에서 예를 올리는 할머니에게 수사노오노 미코토가 언제 어디서 일본으로 건너왔는지 물었다. 할머니는 “3000년 전, 한산에서 왔다”고 대답한다. 수첩에 한자로 ‘韓山’이라고 써주기까지 한다. 3000년 전이면 기원전 1000년이다. 신라에서 배를 타고 건너왔다는 수사노오노 미코토는 과연 누구였을까. 그의 신라 이름은 정말로 연오랑이었을까.

    허탈한 걸음으로 히노미사키 신사를 나와 인근의 히노미사키 등대로 달린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높이 44m의 흰 등대가 우뚝 서 있다. 나선형 계단을 한참이나 올라 전망대에 올라섰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바다는 왜 이렇게 낯익은가. “아, 꼭 동해 같아!” 절로 입에서 감탄사가 나온다. 그러나 다음 순간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은 한국의 동해안과 맞닿아 있는 곳. 일본인들이 ‘일본해’라고 고집하는 바다, 바로 우리의 동해가 아닌가.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