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810

2011.10.31

노인을 위한 정치 그리고 미래 세대

실버 데모크라시

  • 김동엽 미래에셋자산운용 은퇴교육센터장 dy.kim@miraeasset.com

    입력2011-10-31 10: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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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인을 위한 정치 그리고 미래 세대
    “고령사회에서 정치권은 노심(老心)을 얻으려고 노심초사(勞心焦思)할 수밖에 없다.”

    경영학의 태두 피터 드러커는 일찍이 선진국의 출산율 감소와 고령화 현상이 정치에 대혼란을 가져올 것이라 전망했다(‘21세기 지식경영’ 참조). 그는 고령화가 진전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걸쳐 노인의 욕구 표출이 가속화할 뿐 아니라 노인이 정치집단화해 ‘고령시민 권력’ 또는 ‘실버 파워’가 급상승하리라 예견했다.

    고령자는 정치적 영향력을 과시하고자 ‘선거참여’와 ‘단체참여’ 방법을 사용한다. 먼저 선거를 통한 정치참여 예를 들어보자. 오래전 얘기지만 1994년 5월 실시된 네덜란드 총선에서 고령자 정당이 두 곳이나 등장해 화제가 된 바 있다. 고령자가 직접 정당을 결성해 후보자를 내세우고 선거를 치른 것이다. 한 정당의 명칭은 ‘전국고령자연합’이고, 또 다른 정당은 ‘55세 이상 당’이었다. 두 정당은 연금을 수령하는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집단 성격을 띠었는데, 총선거에서 각각 6석, 1석을 획득했다. 네덜란드 하원 정원이 150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시할 성과는 아니다.

    고령자 수가 늘어나면서 정치인은 행여 고령자 눈에 거슬릴까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다. 고령자에게 밉보였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17대 총선에서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20~30대 젊은 층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면서 “60~70대는 투표하지 않고 집에서 쉬셔도 괜찮다”는 말을 했다가 선거대책위원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이는 선거에서 고령자의 ‘실버파워’가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고령자의 힘이 커지는 까닭은 단순히 고령자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이들의 투표율이 젊은 층보다 견실하다는 데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표한 18대 총선 관련 자료를 분석해보면, 전체 선거인 중 60세 이상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은 18.6%로 아직은 20대(22.4%)나 30대(22.6%) 선거인 수에 미치지 못하지만, 실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을 보면 60세 이상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3.6%로 가장 컸다(표 참조).



    노인을 위한 정치 그리고 미래 세대
    고령 유권자에 비해 젊은이의 투표율이 낮은 이유는 뭘까. 미국 플로리다대 마거릿 컨웨이 교수는 젊은 층의 투표율이 낮은 이유 중 하나로 상대적으로 높은 이동률을 꼽았다. 특정 장소에 비교적 단기간 거주하는 사람은 장기 거주자에 비해 투표할 가능성이 낮은데, 젊은 층은 고령자에 비해 이동이 빈번하기에 투표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젊은 유권자는 부모로부터 독립해 학교에 다니거나, 주소상 거주지와 실제 생활하는 곳이 다른 경우가 많으며, 출장과 여행 등으로 지리적 이동이 잦다.

    일본 시마네현의 투표율이 높게 나타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일본 중의원 총선에서 시마네현은 1969년부터 96년까지 연속 10회, 참의원 총선에서는1962년부터 92년까지 연속 11회 전국 1위의 투표율을 차지했다. 참고로 시마네현은 노인대국으로 불리는 일본에서도 ‘최고령 지방자치단체’로 꼽히는 곳 중 하나다.

    앞서 언급했듯 고령자가 정치에 참여하는 또 다른 방법은 ‘이익집단’을 통하는 것이다. 특히 ‘압력단체’ ‘시민단체’라 부르는 미국 고령자단체의 힘은 막강하다.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대통령 다음의 권력자로 미국은퇴자협회(AARP) 사무총장을 꼽았다. 그도 그럴 것이 50세가 넘으면 은퇴 여부와 상관없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이 단체는 전직 대통령을 비롯해 회원 수가 4000만 명에 이른다. 상근 직원 수만 2000명이 넘고, 의회 로비를 담당하는 전담인력도 150명이 넘는다. 또한 1년 예산이 1조 원에 달한다. AARP가 미국의 거의 모든 정책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단체는 65세 이상 저소득층 노인에게 무료 의료혜택을 제공하는 노인의료보험인 ‘메디케어(medicare)’를 법제화하고, 고용에서 연령 차별을 폐지하는 법률을 제정하도록 한 주역이다. 최근에는 오바마 정부의 의료보험 개혁에 찬성하는 등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적극적으로 협회의 의견을 표출한다. 고령자단체가 정부, 의회를 상대로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하고자 펼치는 로비를 미국에선 ‘그레이 로비(grey lobby)’라고 부른다.

    미국에 비해 아직은 미미하다 하겠지만 한국의 ‘노인파워’도 만만치 않다. 1969년 결성돼 약 200만 명의 회원을 확보한 대한노인회는 국회의원 총선이나 대통령선거 때마다 노인복지 정책에 관련한 의견을 제시한다. 2002년 설립된 대한은퇴자협회(KARP)도 아직은 회원수가 16만 명에 못 미치지만 국회가 연령차별금지법을 제정할 때, 주택연금제도를 도입할 때 적지 않은 구실을 했다.

    고령화는 민주주의 자체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과거엔 정치적 의사결정의 중심이 납세자에게 있었다. 하지만 고령화는 그 중심축을 납세자에서 연금수급자로 옮겨놓았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지지를 얻은 세력에게 정치적 의사결정권을 위임하는 다수결 원리에 기반을 둔다. 따라서 고령화가 진전할수록 힘의 중심이 고령자에게 이동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치권이 노골적인 ‘수(數)의 정치’만 앞세워서는 주된 납세자인 경제활동인구와 노령자의 갈등이 깊어진다. 연금 수급자는 더 많은 연금을 받고자 그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려 들 것이고, 그로 인해 더 많은 부담을 져야 하는 납세자는 불만이 커질 것이다. 이러한 ‘세대 간 전쟁’에 대한 우려는 고령화가 진행함에 따라 그 강도가 강해질지언정 약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인을 위한 정치 그리고 미래 세대
    미국 정치평론가 월터 리프만은 “노인은 나무가 자란 뒤 자신은 그 나무가 만드는 그늘에서 쉴 수 없는 나무를 심는다”고 말했다. 실버 데모크라시의 성패는 단순한 ‘수(數)’가 아니라 미래 세대와의 ‘공생’에 달렸다고 하겠다. 실버 데모크라시는 단순히 ‘노인의, 노인에 의한, 노인을 위한 정치’를 말하는 게 아니다.

    * 미래에셋 투자교육연구소 은퇴교육센터장으로 일반인과 근로자를 대상으로 한 은퇴교육과 퇴직연금 투자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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