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애꿎은 만남도 다 있다. 소녀는 말기암 환자로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았으며, 소년은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자신 역시 임사(臨死) 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났다. 소년은 생판 모르는 남의 장례식장에 가서 남의 추도사를 경청하고, 고인의 얼굴을 사뭇 진지하게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낸다. 소녀는 친척이 죽어 장례식에 참석했고 소년은 ‘장례식 불청객 놀이’를 하는 중이다. 소년의 이름은 에녹(헨리 호퍼 분), 소녀의 이름은 애너벨(미아 바시코프스카 분)이다.
남의 장례식장에서 들킬까 봐 조바심 내던 에녹을 애너벨은 신기하게도 한눈에 알아본다. 3개월 남은 시간을 함께해줄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짝을.
가장 생기 있게 빛나야 할 10대에 아이러니하게도 소년과 소녀는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서로를 알아차린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애너벨에게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현실. 다윈의 진화론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조잘대기도 하지만, 소녀는 곧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부모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에녹에게 죽음은 현실과 맞바꾸어도 좋을 이상이다. 그는 죽음과 현실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외로운 삶을 산다. 에녹에겐 심지어 자신만 볼 수 있는 유령 친구가 있을 정도다.
우연한 만남 이후 그들에게 닥친 건 첫사랑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영화가 전개되는 남은 시간 동안 에녹과 애너벨의 찬란한 사랑을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결국은 이루지 못할 아픈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이런 내용의 영화라면, 신파극으로 치달을 게 뻔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 거스 밴 샌트는 이들에게 전혀 색다른 기운을 불어넣는다. 둘은 즐겁게 애너벨이 입원한 병원의 영안실을 침입하고, 이내 관리인에게 쫓겨나 도피행각을 벌인다. 손을 잡고 달리는 둘의 모습을 보노라면 ‘졸업’의 마지막 장면, 더스틴 호프만이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데리고 나올 때의 환희가 떠오른다. 핼러윈 데이의 가장행렬과 길거리에서 나누는 예쁜 키스, 그리고 길바닥에 누워서 하는 시체놀이 역시 즐겁긴 매한가지다. 에녹과 애너밸 또래의 아이에게 한참 유행인 시체놀이조차도 밴 샌트 감독의 손을 거치면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된다.
죽음과 가장 인접한 불안의 나날이지만 에녹과 애너벨은 오히려 눈에 띌 정도로 많이 웃고 많이 뛰어다니며 젊음을 소비한다. 어른을 흉내 내려는 아이처럼 둘은 생의 에너지로 충만한 이만이 내지를 수 있는 동작과 탄성을 고스란히 모방하고 재연한다. 그 모습이 하도 즉각적이고 동물적이며 생생해서 잠깐 동안이나마 우리 모두는 그 둘에게 고난 따윈 없다는 착각에 빠진다. 혼자라면 절대 극복하지 못했을 ‘죽음’ 앞에서 둘은 함께 그 의미를 깨닫고 성장해나간다.
밴 샌트 감독은 말한다. “‘레스트리스’는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아내는 삶에 관한 영화다. 애너벨은 죽을 것이다. 애너벨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는 놀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 곁에 죽음을 그림자처럼 붙여놓고 하는 변명이라니! 감독에게 애꿎은 원망이 생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밴 샌트 감독에게 ‘죽음’은 따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닌 ‘젊음’과 데칼코마니였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두 청년이 사투하다가 결국 한 명만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그린 실험적인 영화 ‘게리’(2002)에서부터 그는 죽음의 연대기를 써내려왔다. ‘엘리펀트’(2003)에서 또래 학생들을 살해한 미국 내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죽음을 형상화했고, ‘라스트 데이즈’(2005)에서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록밴드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을 통해 죽음을 그렸다. 또 ‘파라노이드 파크’(2007)는 10대 스케이트 보더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살인을 하고 괴로움을 삭이는 모습을 담았다. 이들 죽음의 연작은 대학 청소부로 지내던 청년과 한 스승의 소통을 그린 ‘굿 윌 헌팅’(1997)이나, 흑인소년과 황혼기에 접어든 유명한 백인 소설가의 우정을 그린 ‘파인딩 포레스터’(2000) 같은 착하면서도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과는 전혀 다른 선상에서 읽힌다.
‘레스트리스’는 청춘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죽음의 연작’처럼 보이지만 전작과는 다소 결을 달리하는 작품이다. 실험적이고 몽환적이며 난해하게 청춘과 죽음의 문제를 풀어왔던 밴 샌트 감독에게 ‘레스트리스’는 다소 감정적인 답안지와 같은 작품이다. 애너벨이 에녹에게 연극을 제안하는 장면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이 떠나고 남겨진 에녹을 가정하는 내용의 상황극에서 발랄했던 둘의 연애담은 곧바로 아픈 현실이 된다. 밴 샌트 감독이 의도한 대로 아이들은 자신만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정신없이 그들의 연애담에 이끌려왔던 관객이 감정의 파고를 수습하는 건 쉽지 않다. 재빨리 극장 문을 나서본들, 비틀스의 음악과 한데 어우러진 바시코프스카의 보이시한 단발머리, 호퍼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불러일으키는 잔상은 쉽사리 잊기 힘들다.
애너벨 역의 바시코프스카는 팀 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개봉할 당시 ‘최고의 흥행배우’ 2위에 오른 주목할 만한 신예다. ‘레스트리스’의 차기작으로 ‘제인 에어’를 찍겠다고 하자, 밴 샌트 감독이 그를 ‘제인 에어’의 감독에게 소개해줬을 정도다. 지금은 니콜 키드먼과 함께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의 촬영을 마쳤다. 에녹 역의 호퍼는 얼마 전 타계한 데니스 호퍼의 아들로 올해 스무 살이다. 미술을 전공했고, 본격적인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의 진가를, ‘굿 윌 헌팅’에서 맷 데이먼과 밴 애플릭의 매력을 발굴한 밴 샌트 감독은 헨리의 연기를 보고 “그의 연기는 마치 다른 세대에서 온 것 같은 품격을 갖췄다”고 극찬했다.
‘레스트리스’는 이 두 배우가 만드는 반짝반짝 빛나는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이자, 죽음 앞에서도 어쩔 수 없이 성장하고마는 청춘의 표상과도 같은 영화다. 밴 샌트 감독의 필모그래피(영화목록를 차지한다는 의미를 떠나, 감정적 동화로 따져볼 때 ‘레스트리스’는 분명 우위에 있다.
남의 장례식장에서 들킬까 봐 조바심 내던 에녹을 애너벨은 신기하게도 한눈에 알아본다. 3개월 남은 시간을 함께해줄 가장 아름다운 영혼의 짝을.
가장 생기 있게 빛나야 할 10대에 아이러니하게도 소년과 소녀는 ‘죽음’이라는 키워드로 서로를 알아차린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애너벨에게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현실. 다윈의 진화론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조잘대기도 하지만, 소녀는 곧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부모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에녹에게 죽음은 현실과 맞바꾸어도 좋을 이상이다. 그는 죽음과 현실을 정확하게 구분하지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닌 외로운 삶을 산다. 에녹에겐 심지어 자신만 볼 수 있는 유령 친구가 있을 정도다.
우연한 만남 이후 그들에게 닥친 건 첫사랑이다. 슬프게도 우리는 영화가 전개되는 남은 시간 동안 에녹과 애너벨의 찬란한 사랑을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결국은 이루지 못할 아픈 사랑일지도 모르겠다. 일반적으로 이런 내용의 영화라면, 신파극으로 치달을 게 뻔하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 거스 밴 샌트는 이들에게 전혀 색다른 기운을 불어넣는다. 둘은 즐겁게 애너벨이 입원한 병원의 영안실을 침입하고, 이내 관리인에게 쫓겨나 도피행각을 벌인다. 손을 잡고 달리는 둘의 모습을 보노라면 ‘졸업’의 마지막 장면, 더스틴 호프만이 결혼식장에서 신부를 데리고 나올 때의 환희가 떠오른다. 핼러윈 데이의 가장행렬과 길거리에서 나누는 예쁜 키스, 그리고 길바닥에 누워서 하는 시체놀이 역시 즐겁긴 매한가지다. 에녹과 애너밸 또래의 아이에게 한참 유행인 시체놀이조차도 밴 샌트 감독의 손을 거치면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된다.
죽음과 가장 인접한 불안의 나날이지만 에녹과 애너벨은 오히려 눈에 띌 정도로 많이 웃고 많이 뛰어다니며 젊음을 소비한다. 어른을 흉내 내려는 아이처럼 둘은 생의 에너지로 충만한 이만이 내지를 수 있는 동작과 탄성을 고스란히 모방하고 재연한다. 그 모습이 하도 즉각적이고 동물적이며 생생해서 잠깐 동안이나마 우리 모두는 그 둘에게 고난 따윈 없다는 착각에 빠진다. 혼자라면 절대 극복하지 못했을 ‘죽음’ 앞에서 둘은 함께 그 의미를 깨닫고 성장해나간다.
밴 샌트 감독은 말한다. “‘레스트리스’는 살 수 있는 데까지 살아내는 삶에 관한 영화다. 애너벨은 죽을 것이다. 애너벨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화에서 ‘살아 있는 동안에는 놀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이들 곁에 죽음을 그림자처럼 붙여놓고 하는 변명이라니! 감독에게 애꿎은 원망이 생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밴 샌트 감독에게 ‘죽음’은 따로 존재하는 무엇이 아닌 ‘젊음’과 데칼코마니였다. 사막에서 길을 잃은 두 청년이 사투하다가 결국 한 명만 살아 돌아온 이야기를 그린 실험적인 영화 ‘게리’(2002)에서부터 그는 죽음의 연대기를 써내려왔다. ‘엘리펀트’(2003)에서 또래 학생들을 살해한 미국 내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으로 죽음을 형상화했고, ‘라스트 데이즈’(2005)에서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권총자살로 생을 마감한 록밴드 너바나의 보컬 커트 코베인을 통해 죽음을 그렸다. 또 ‘파라노이드 파크’(2007)는 10대 스케이트 보더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살인을 하고 괴로움을 삭이는 모습을 담았다. 이들 죽음의 연작은 대학 청소부로 지내던 청년과 한 스승의 소통을 그린 ‘굿 윌 헌팅’(1997)이나, 흑인소년과 황혼기에 접어든 유명한 백인 소설가의 우정을 그린 ‘파인딩 포레스터’(2000) 같은 착하면서도 대중적으로 성공한 작품과는 전혀 다른 선상에서 읽힌다.
‘레스트리스’는 청춘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죽음의 연작’처럼 보이지만 전작과는 다소 결을 달리하는 작품이다. 실험적이고 몽환적이며 난해하게 청춘과 죽음의 문제를 풀어왔던 밴 샌트 감독에게 ‘레스트리스’는 다소 감정적인 답안지와 같은 작품이다. 애너벨이 에녹에게 연극을 제안하는 장면에 주목해야 한다. 자신이 떠나고 남겨진 에녹을 가정하는 내용의 상황극에서 발랄했던 둘의 연애담은 곧바로 아픈 현실이 된다. 밴 샌트 감독이 의도한 대로 아이들은 자신만의 가혹한 환경 속에서 성장했지만, 정신없이 그들의 연애담에 이끌려왔던 관객이 감정의 파고를 수습하는 건 쉽지 않다. 재빨리 극장 문을 나서본들, 비틀스의 음악과 한데 어우러진 바시코프스카의 보이시한 단발머리, 호퍼의 사슴 같은 눈망울이 불러일으키는 잔상은 쉽사리 잊기 힘들다.
애너벨 역의 바시코프스카는 팀 버튼 감독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개봉할 당시 ‘최고의 흥행배우’ 2위에 오른 주목할 만한 신예다. ‘레스트리스’의 차기작으로 ‘제인 에어’를 찍겠다고 하자, 밴 샌트 감독이 그를 ‘제인 에어’의 감독에게 소개해줬을 정도다. 지금은 니콜 키드먼과 함께 박찬욱 감독의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의 촬영을 마쳤다. 에녹 역의 호퍼는 얼마 전 타계한 데니스 호퍼의 아들로 올해 스무 살이다. 미술을 전공했고, 본격적인 연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이다호’에서 리버 피닉스의 진가를, ‘굿 윌 헌팅’에서 맷 데이먼과 밴 애플릭의 매력을 발굴한 밴 샌트 감독은 헨리의 연기를 보고 “그의 연기는 마치 다른 세대에서 온 것 같은 품격을 갖췄다”고 극찬했다.
‘레스트리스’는 이 두 배우가 만드는 반짝반짝 빛나는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이자, 죽음 앞에서도 어쩔 수 없이 성장하고마는 청춘의 표상과도 같은 영화다. 밴 샌트 감독의 필모그래피(영화목록를 차지한다는 의미를 떠나, 감정적 동화로 따져볼 때 ‘레스트리스’는 분명 우위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