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페루 대통령으로 당선된 오얀타 우말라 후보(오른쪽) 가 부인 나디네 에레디아 씨와 함께 수도 리마의 광장에서 환호 하는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5개월이 지난 10월 17일, 언론에는 또 다른 기사가 실렸다. 다니엘 에밀리아노 모라 세바요스 페루 국방장관의 방한과 국회 방문 소식. “국회가 KT-1의 페루 수출을 성사시키려고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는 내용의 기사는 “이 전 부의장이 원유철 국회 국방위원장과 함께 세바요스 장관에게 KT-1 기본훈련기 도입을 긍정적으로 검토해달라고 거듭 요청했다”고 전한다.
이미 5개월 전에 성사된 수출사업을 다시 요청한다? 앞뒤가 맞지 않는 이러한 상황은 두 기사 중 하나가 사실과 달랐음을 의미한다. 5월에 쏟아져 나온 보도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성과를 과장한 것이거나 최근의 보도가 뭔가 잘못됐거나다. 과연 진실은 무엇이고, 이 같은 일은 왜 벌어졌을까.
장밋빛 기사에 페루 정부도 당혹
KT-1은 한국항공우주산업(KAI)과 국방과학연구소(ADD)가 1998년 독자 개발한 기본훈련기다. 전투기 조종사 후보생이 기초 조종술을 익히는 데 활용하는 이 항공기는 2001년부터 인도네시아에 12대를 수출했고, 40대 수출 계약을 체결한 터키에는 2007년부터 납품하는 중이다. 외신에 따르면 페루는 훈련기 도입 규모의 수량과 금액을 아직 확정하지 않았지만, KAI는 KT-1 12대와 이를 경공격기로 개량한 KA-1 12대를 2억 달러 내외에 공급할 수 있다고 제안해놓은 상태다.
5월 쏟아졌던 기사는 모두 5월 9일부터 6일간 남미를 방문했던 이 전 부의장의 발언을 전하고 있다. “페루 리마의 대통령궁에서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을 한 시간가량 면담했고, 이 자리에서 KT-1의 페루 진출을 확약받았다”는 것. 현지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이 전 부의장은 “이번 특사 방문의 핵심은 KT-1의 페루 진출”이라고 못 박기도 했다. 외교통상부 또한 보도자료를 내고 방문의 성과와 KT-1 수출을 위한 외교 노력을 홍보했다.
그러나 반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현재까지도 KT-1의 페루 수출에 관한 구체적인 진척 내용은 전혀 없는 상태. 당시 국내 언론 기사는 “조만간 가르시아 대통령의 서명과 우선협상 대상자 지정, 페루 국방부와의 본격적인 협의를 진행할 것”이라고 전했지만, 이러한 절차는 아직까지 어느 하나도 진행된 바 없다. 사업을 진행하는 KAI 측은 ‘주간동아’의 질의에 “사업자는 결정되지 않았고, 마케팅 작업이 한창”이라고 답했다. 페루 국방장관의 최근 방한 또한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 사업 진행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당시부터 이렇듯 요란한 보도는 오히려 수주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었다”고 말한다. 서울에서 수주를 기정사실화하거나 가르시아 대통령의 ‘확언’을 반복적으로 홍보할 경우 오히려 페루 정부의 입장을 곤란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 이렇듯 미묘한 상황은 5월 면담 직후 가르시아 대통령 본인은 결과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는 현지 언론 기사만 봐도 가늠할 수 있다. 또 다른 정부 관계자는 “왜 이런 보도가 쏟아져 나왔는지, 꼭 그래야 했는지 내부적으로도 분위기가 안 좋았다”고 전했다. 방산업계 일각에서는 이후 경쟁관계의 입찰자들이 페루 정부에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등 ‘행동’에 나서는 바람에 페루 공군이 난감해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상황을 좀 더 들여다보면 이렇다. 우파 성향의 가르시아 대통령이 속한 페루의 구(舊) 집권당은 6월 치러진 선거에서 패했고, 그를 강력하게 비판했던 좌파 성향의 오얀타 우말라 대통령이 새로 취임했다. ‘룰라식 중도실용좌파’를 표방하며 친(親)브라질 행보를 보이는 새 정부는 전임 정부의 부패를 비판하며 이전 정책을 총체적으로 점검하는 중이다. 총 19기로 페루 공군이 현재 가장 많이 운용하는 훈련기 EMB-312는 다름 아닌 브라질제(製)다.
수출을 추진 중인 KAI나 이 전 부의장 측 모두 이러한 페루의 정치상황을 몰랐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5월의 페루 방문은 정부가 바뀌기 전에 수주를 진척시키려는 것이었다는 게 당시 방문에 관여한 인사들의 설명. 문제는 정권교체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에서 나온 ‘사실상 성사’ 보도는 분명 사실과 달랐고, ‘국민을 속였다’고 비판받을 소지마저 있다는 점이다.
5월 남미방문의 공교로움
이 전 부의장 측은 ‘주간동아’에 “우리 쪽에서 언론을 상대로 당시 KT-1 관련 사항을 적극적으로 홍보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쏟아져 나온 보도 때문에 당혹스러워하기는 자신들도 마찬가지였다는 것. 이 전 부의장은 7월 우말라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참석해 면담했고, 이 자리에서 전임 정부의 검토 결과를 존중해달라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말라 대통령 또한 KT-1의 성능과 입찰조건에 대해 관심을 표시하는 등 “수주가 성사될 가능성은 여전히 매우 높다”는 게 이 전 부의장 측 설명이다.
“우리가 나서서 홍보한 게 아니다”라는 해명은 과연 사실일까. 이 전 부의장이 8월 펴낸 저서 ‘자원을 경영하라’에 담긴 KT-1 관련 내용은 5월 나왔던 일련의 보도에 더 가깝다. 당시 페루 방문에 대해 이 전 부의장은 “대통령 궁에서 알란 가르시아 대통령을 한 시간가량 만나 KT-1 기본훈련기의 페루 수출에 대해 긍정적인 확약을 받아냈다”고 기록했다. ‘KT-1의 페루 수출이 확정될 경우’라는 전제를 달긴 했지만 이 사안의 의미를 높게 평가하는 데 상당 부분을 할애한 것. 관련 부분은 “자신의 임기가 끝나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약속을 지켜준 가르시아 대통령의 미소 띤 얼굴이 지금 이 순간에도 눈에 어른거린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9월 국회 국정감사에서는 그간 이명박 정부가 대대적으로 홍보해왔던 자원외교 사업의 상당수가 ‘속 빈 강정’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이 대통령이 해외 순방 시 체결한 양해각서 가운데 현재까지 계약 체결로 이어진 사업은 하나도 없다는 게 그 골자다. 여야 의원들은 법적 구속력이 없는 양해각서 체결을 두고 대박을 터뜨린 것처럼 부풀리기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제기했다.
‘KT-1 수주 성사’ 기사가 쏟아져 나왔던 5월은 공교롭게도 정두언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한나라당 소장파 일각에서 ‘쇄신론’을 펴며 이 전 부의장의 2선 후퇴와 총선 불출마를 강하게 촉구했던 시점이다. 남미 방문에 대해서도 “화살이 쏟아지는 여의도 정치권을 떠나 ‘국익 외교’에 매진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행보”라는 평가가 만만치 않았다. KT-1 페루 수출이 완전히 좌절된 것은 분명 아니지만, 당시의 장밋빛 홍보기사는 오히려 사업 성공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위험한 부풀리기였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