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가 말갛다. 우유 빛깔이다. 큼직큼직한 이목구비가 작은 얼굴에 조화롭게 자리 잡았다. 도톰한 입술은 웃을 때마다 바이킹이 타고 다니는 배처럼 양끝이 시원하게 올라갔다. 이마를 덮은 앞머리는 동그랗게 말렸다. 송혜교(30)가 직접 손질한 헤어스타일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해 질 녘, 영화 ‘오늘’ 개봉을 앞두고 만난 그는 여전히 앳돼 보였지만 한결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풍겼다. 왜 그럴까 했더니 다 이유가 있었다. 이 영화에서 다큐멘터리 PD 다혜 역을 맡은 그는 그간 경험해보지 못한 심도 깊은 내면연기에 푹 빠졌더랬다. 그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어떤 캐릭터기에 그의 주변을 이토록 맴돌고 있을까.
“다혜는 약혼자를 뺑소니 사고로 잃어요. 죽고 싶을 만큼 괴로우면서도 약혼자를 죽인 중학생을 용서하고 잘살기를 바라죠. 하지만 1년 뒤, 살인사건 피해자들을 인터뷰하고 뺑소니 사고의 진실을 알게 되면서 섣부른 용서가 더 큰 화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요. 그 속에서 미묘한 감정 변화를 일으키며 얼굴로 연기하는 법을 배웠어요. 얼굴 근육을 쓰는 법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 표정연기 하는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거죠.”
‘오늘’은 이정향 감독이 ‘집으로’ 이후 9년 만에 선보이는 작품이다. ‘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심은하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본 뒤부터 그는 이 감독의 팬이 됐다. 이번 영화를 선택할 때도 이 감독에 대한 호감이 크게 작용했다.
“다작을 하지 않는 감독님이 오랜만에 선보이는 영화고, 같은 여자로서 여자 캐릭터를 잘 표현해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첫 만남에서도 좋은 인상을 받았고요. 지난해 5월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도 느낌이 참 좋아서 바로 하겠다고 연락드렸어요.”
극중 다혜는 그와 여러모로 닮았다. 싫어도 싫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 한 예다. 이 감독은 “송혜교는 하고 싶은 말을 30%밖에 꺼내지 않는다”며 “애늙은이 같다”고 표현했다. 그도 “감독님이 저를 빨리 파악하시긴 했다”며 맞장구를 쳤다.
“지금은 그나마 나아졌지만 이상한 상황에 몰려도 나만 참으면 되지 하며 감정을 억누를 때가 많아요. 그게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터지죠. 사람 많을 때가 아니라 혼자 있을 때요. 다혜도 그런 캐릭터예요. 서로 닮은 점이 많아서 다혜에게 다가가기가 쉬웠어요.”
영화촬영은 지난해 12월 시작돼 올해 3월 끝났다. 이 기간에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추위였다. 어떤 날에는 입이 얼어서 대사가 안 나올 정도였다. 촬영이 끝난 뒤 캐릭터에서 헤어나기가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품처럼 감정 몰입이 필요한 작품을 하고 나면 헤어나기가 더 힘들어요. 영화 ‘황진이’와 드라마 ‘가을동화’를 찍고 나서도 그랬어요. 재충전 없이 다른 작품에 바로 들어가면 더 힘들었을 텐데, 지금까지는 캐릭터를 떠나보낼 시간을 충분히 가졌던 것 같아요.”
학창 시절 그는 디자이너를 꿈꿨다. 절실하게 갈구했던 건 아니고, 또래 여자아이들처럼 막연하게 동경했다. 그의 운명을 바꿔놓은 건 중3에서 고1로 넘어갈 무렵 우연히 출전한 선경 스마트 모델 선발대회다. 이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1996년 교복 브랜드 ‘스마트’의 광고 모델로 발탁된 것. 광고를 찍고 얼마 후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단막극 오디션을 보라는 통보였다. 운 좋게 합격의 영광을 안은 그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연기생활을 시작했다.
감정 몰입 필요한 작품 끝나면 후유증
은광여고 재학 시절 그의 이름을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SBS 시트콤 ‘순풍산부인과’가 그것이다. 이 시트콤에서 통통 튀는 말괄량이 캐릭터를 맛깔나게 소화한 그는 연예계의 유망주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가 출연한 드라마 ‘가을동화’ ‘올인’ ‘풀하우스’는 국내뿐 아니라 아시아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어느새 그는 대한민국을 넘어 아시아를 대표하는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데뷔 후 승승장구해온 그에게도 아쉬운 것이 있을까.
“또래 친구들처럼 학창시절 추억이 없다는 게 안타까워요. 학창 시절부터 계속 만나는 친구가 딱 세 명 있어요. 초중고를 같이 다닌 친구들이죠.”
숱한 대표작 가운데 그를 한 단계 성장시킨 작품은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이라고 한다. 이유는 이렇다.
“노희경 선생님 팬이 된 이유가 대사가 실제 말 같아서예요. 그래서 연기하기가 수월할 줄 알았는데 초반에는 너무 버거웠어요. 연출을 맡은 표민수 감독님에게 느긋하게 하라는 조언을 듣고 나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군요. 그때부터 매 신이 재미있고 뿌듯했어요. 그래도 끝까지 어렵더라고요. 드라마 대부분은 5~6회를 하고 나면 탄력받아서 쭉 가는데 ‘그들이 사는 세상’은 매회가 다 어려웠어요.”
지금까지의 출연작은 대부분 인기를 끌었지만 그중에는 그와 잘 맞지 않는 작품도 있었다. ‘가을동화’를 끝내고 출연한 드라마 ‘호텔리어’가 그랬다.
“그 작품에서는 제가 할 게 없었어요. 작은 배역이라도 작품에 보탬이 되는 캐릭터면 신나서 할 텐데 존재감이 없고 계속 겉도는 거예요. 배우로서 속상하고 혼란스러웠어요. 그래도 그 작품 덕에 깨달았어요. 흥행하든, 못하든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해야 후회가 없다는 걸요.”
영화 ‘황진이’를 끝내고 미국 독립영화 ‘페티쉬’와 비상업주의 작가로 알려진 노희경의 ‘그들만이 사는 세상’에 출연하자 그의 행보를 두고 ‘의외’라는 반응을 보이는 이가 많았다. 그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고를까.
“어떤 계산을 하고 작품을 고르진 않아요. 마음에 꽂히는 작품을 하죠. 드라마는 대개 대본에 꽂혀서 선택하고, 영화를 할 땐 감독님을 많이 보는 것 같아요. 또 캐릭터보다는 줄거리가 전반적으로 재미있는지를 더 눈여겨봐요.”
촬영 현장에서 그에 대한 평판은 어떨까. 그와 작업한 몇몇 감독은 “대사를 완벽하게 외워 오는 성실한 배우”라고 입을 모았다. 그 말을 전하자 그는 “배우가 대사를 외워 오는 건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다음 생이 있다면 미술가나 음악가 될 것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왼쪽)과 이정향 감독의 영화‘오늘’.
“쪽대본이 잘 외워지더냐”고 질문을 던지자 기억을 더듬듯 그의 시선이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완전 집중할 때요. 그 대신 여유를 가지고 외운 대사는 한참 지나도 생각이 나는데 급하게 외운 것은 연기하고 나면 다 까먹어요.”
내친김에 최근 배우 한예슬이 드라마 촬영 중 쪽대본 등 열악한 제작 여건에 반기를 들고 미국으로 도피한 사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한예슬과 그는 1981년생 동갑내기다.
“오가다 한 번 정도 인사한 사이인데 저도 좀 속이 상하더라고요. 작품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행동한 것도 마음 아프고, 본인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짐작이 가니까 그것도 마음 아팠어요. 잘했다고 할 순 없지만, 드라마가 끝난 뒤에 항의하면 안 먹히고 흐지부지 넘어갈 테니 촬영 도중에 한번 강하게 해보자, 그런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하지만 좋게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당시에는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어느덧 그도 16년 차 배우가 됐다. 현재 그는 연기생활에 만족하고 있을까.
“지금이 좋아요. 이제 연기를 좀 알게 된 것 같고 표현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서 20대 때보다 오히려 좋아요. 20대와 30대는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차이가 없어요. 30대가 되면 우울증이 온다고 하지만 일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새 이 나이가 됐어요.”
‘풀하우스’에서는 티 없이 맑고 밝은 명랑소녀였고, ‘황진이’에서는 도도하면서도 까칠한 희대의 기녀였던 그. 실제 성격은 어느 쪽에 가깝냐는 질문에 그는 “두 가지 면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답했다.
“정말 편하고 거리낌 없는 자리에서는 완전히 풀어놓는 스타일이고, 상대방이 공격적으로 나오거나 불편하면 까칠해지는 것 같아요. 아무 말 안 하고 있으면 무섭다고 할 정도로요. 하지만 매사에 긍정적인 성격이에요.”
연예계에서 그가 멘토처럼 따르는 선배는 중견배우 윤여정과 김지영이다. 그는 ‘풀하우스’에서 시할머니로 출연했던 김지영을 지금도 ‘할머니’라고 부르며 따른다.
“선생님들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도 몰라요. 연기보다 사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는데 얼마나 재미있는지…. 사석에서 뵐 때는 나이 차도 잊게 돼요. 무서울 땐 되게 무섭지만 소녀 같은 감성이 있으세요. 죄송한 말씀이지만 어떤 때는 귀엽다니까요(웃음).”
지난 3년간 그는 ‘오늘’ 외에도 두 작품을 더 찍었다. 강동원과 주연한 다국적 옴니버스 영화 ‘카멜리아’와 왕자웨이 감독의 신작 ‘일대종사’다. 두 작품은 각기 연내와 내년에 개봉한다. 최근에는 영화에만 집중했지만 그는 언제든 ‘마음에 꽂히는’ 드라마가 있으면 안방극장으로 복귀할 것이라고 했다.
송혜교에게 연기란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시간이 갈수록 연기가 자연스럽게 나올 줄 알았는데 자꾸만 더 어려워지기 때문. 연기자가 된 것을 후회해본 적은 없지만 다시 태어나도 굳이 배우가 되고 싶지는 않단다.
“배우라는 직업이 매력적이긴 하지만 다음 생이 주어진다면 미술이나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요. 그쪽 방면에 특출한 재능이 있어서가 아니에요. 악기를 잘 다루거나 노래를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워요.”
그동안 많은 작품을 통해 각양각색의 삶을 체험한 그에게도 욕심나는 배역이 있을까. 그는 “하고 싶은 역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대한 적이 없다”며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는 배우, 그때마다 조금씩 발전하는 배우로 인식되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시사회 이후 ‘송혜교의 재발견’이라는 호평이 쏟아진 영화 ‘오늘’은 10월 27일 개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