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은 보통 박원순 서울시장을 ‘박 변호사’ ‘박변’이라고 부른다. 그의 모습이 변호사로 각인됐기 때문에 서울대 사회계열에 입학해 80일 만에 제적됐음에도 그가 쓴 수십 권의 책 가운데 몇몇 책에는 서울대 법과대학 제적이라고 적혀 있다. 서울대 사회계열은 요즘 말로 치면 법과대와 사회과학대를 통합한 대계열이었고, 그의 친구 중 많은 사람이 법대로 가서 변호사가 됐기에 자연스럽게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것처럼 인식된 듯하다.
박 시장이 학벌에 집착했다면 1980년대 서울대 법대에 재입학할 수 있다는 통지를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랬던 그가 한나라당의 학력 조작 시비에 시달렸다. 그의 희망캠프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고, 서울대 법대를 나온 나경원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는 TV토론에서 이 점을 물고 늘어졌다. 답답한 마음이 지속됐다. 박 시장은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나를 몰아세울 수 있느냐”고 할 뿐이었다. 지지율은 낮아졌고, 캠프에는 위기가 닥쳤다.
학력 시비가 커지자 그의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직접 나서서 ‘오마이뉴스’에 ‘학력, 내가 아는 진실’이라는 기사를 썼다. 그 기사는 박 시장의 학력과 관련된 진실을 드러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열아홉 살 청년을 제적시킨 시대적 억압과 그러한 시대적 아픔에 굴하지 않고 성취를 이룬 박 시장의 삶의 역정에 대해 얘기했다. 한 교수 외에도 이화여대 K교수, 한양대 J교수 등이 위기의 순간 그의 주변에서 마음으로 도왔다. 특별히 부탁받은 것도 아닌데, 위기에 처한 ‘박원순 변호사 구하기’에 자발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박 시장이 평생을 자신의 부와 특권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이러한 친구들의 도움은 없었을 것이다. 늘 사회 약자 편에 서서 시민운동을 해왔던 그의 이력이 친구의 도움을 얻어낼 수 있는 신통방통한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결정적인 도움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서 나왔다. 5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던 안 원장이 5% 남짓한 그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것이다. 그리고 선거를 이틀 앞두고 안 원장은 다시 한 번 그를 확실히 지지하기 위해 희망캠프를 방문했으며, 2쪽짜리 의미 있는 편지를 건넸다. 안 원장은 이 편지에 선거를 통해 세상을 바꾸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특히 젊은 층에게 초점을 맞췄다. 위기 속에서 안 원장은 두 번이나 그를 도왔다. 박 시장에게는 이와 같이 남의 도움을 자발적으로 끌어내는 매력이 있다. 이것이 그의 힘이다. 세상일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 서울시장은 왜 나왔을까
박 시장은 어떻게 출마하게 됐을까. “시민운동가로서 조용히 잘사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보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왔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버릇처럼 하는 부모님 이야기를 들으면 남을 먼저 배려해왔던 가족력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소리가 있다고 한다. 바로 “내 입에 밥숟가락 넣기 전에 남의 입에 밥 들어가는지를 꼭 살피라!”는 말이다. 경쟁에서 남을 이겨야 살아남는다는 말로 아이를 키우는 요즘 부모에게는 얼마나 낯선 말인가. 경남 창녕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늘 주변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이것을 지금도 생활신조처럼 새기고 있다. 식당이나 차에서 김밥이라도 먹을라치면 수행비서에게 “밥을 먹었느냐?”고 묻는다. 김밥과 음료는 물론, 때로는 본인이 먹을 약도 같이 먹자고 한다. 그가 남을 챙기는 버릇은 부모님의 DNA로부터 유전된 듯하다.
몇십 년 전 그의 어머니는 서울에 올 때마다 “서울의 저 많은 가게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 거리의 저 많은 처녀는 누구랑 결혼하느냐”고 걱정하시곤 했단다. 자신만 즐겁다고 모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도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창녕 시골 마을의 삶의 지혜가 서울에서도 통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가족력이다. 그가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 것은 가정교육에서 비롯했다. 남이 갖지 못한 박 시장의 힘이다.
그의 선거홍보용 공보를 보면 영화 포스터 같은 느낌이 든다.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노인과 찍은 사진은 서울을 하나의 마을공동체로 바라보는 시선을 담았다. 영화 포스터 같은 이 선거공보는 사진도 좋고, ‘서울시민 편에 서는 첫 번째 시장이 되겠습니다’라는 문구도 무난하다. 이러한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중시해온 그의 가치 지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 박원순의 현충원 참배
선거운동 기간에 그는 엄청난 사상 검증 과정을 겪었다. 10월 10일 서울시장 선거의 첫 번째 TV토론이던 관훈클럽 토론에서 나경원 후보는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에 대한 견해를 물으며 그의 국가관을 검증하려 했다. 나 후보가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고 믿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서도 “그러나 정부를 신뢰하지 못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왜 신뢰를 잃었는지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북한 소행이라고 믿는다고 했지만,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두고 색깔론이 나왔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충격적인 발언”이라면서 “이런 안보관, 국가관을 가지고는 서울시장직을 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진보 진영에서도 북한 소행이라고 믿는다는 발언을 크게 문제 삼으며 반발했다. 혹독한 사상 검증의 시작이었다. 나 후보는 마지막 토론에서도 “박 후보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 등 국민의례도 하지 않는다”며 국가관을 들먹였다. 이에 그는 “국민의례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툭 받아치면서 “나는 국가관이 확실하다”고 답했지만, 나 후보는 색깔론을 계속 제기했다. 21세기에도 냉전시대의 색깔론이 선거의 단골메뉴가 되는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현충원 참배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많은 정치인이 중요한 결정을 앞둔 시점에 의례적으로 현충원을 참배한다. 그도 서울시장 후보 공식 출마 선언을 한 뒤 현충원을 참배하러 갔다. 하지만 그의 참배는 남달랐다. 역대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러 간 것이 아니라, 사병묘역을 방문하는 데 의미를 뒀다. 충혼탑에 헌화하고, 사병묘역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것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연출로 드러낼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이다.
그는 그곳에 ‘자유와 정의가 숨 쉬는 곳’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렇다. 사병묘역을 방문해 그곳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숨진 영혼을 위로한 것이다. 국가관 검증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선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대통령 등 영웅의 스토리텔링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정의를 지키다가 사라져간 무명의 병사가 겪은 고통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지도자라면 이와 같이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익과 좌익을 넘어서 시민을 보살피는 역사관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학과 출신다운 면모다.
# 내가 어떻게 네거티브를 하느냐
선거가 시작되면서 한나라당에서 네거티브 포문을 열었다. 선거사상 이렇게 네거티브가 많았던 적은 없었다고 민주당 당직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전략회의에서 네거티브에 좀 더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그가 말렸다. 특히 병역기피 의혹에 대해서는 할 말 없어 했다. 13세 때 일을 어떻게 해명하라는 것인가. 그의 말은 “시민도 다 알 텐데 우리까지 나서서 네거티브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쯤 그의 지지도가 빠진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경원 후보가 앞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래서 전략회의에서 다시 한 번 나 후보를 강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어떠냐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정권심판과 정책대안 제시 등 정공법으로 선거에 임하자는 것이었다. 나 후보의 1억 원짜리 피부미용 논란, 700만 원짜리 2캐럿 다이아반지, 13억 원대 차익을 거둔 부동산투자 등에 대한 네거티브 선전을 박 시장 스스로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마지막 방송기자 클럽 TV토론에서 그는 “나도 나경원 후보에 대해 할 말이 없어서 가만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약간의 침묵 속에서 그의 결기를 느낄 수 있었다. 참모들이 박수를 쳤고, 상황실에 속이 후련하다는 시민의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이제까지 그의 마음속 응어리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점심때 식사를 하며 이것이 아침밥인지 점심밥인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잠시 쉬는 시간이 있으면 바로 잠들어버리는 피곤한 일정 속에서도 박 시장은 시민에게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말을 계속했다. 강남역에서 몇십 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부터 그에게 성원한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려고 제주도에서 달려왔다는 사람까지 그는 많은 이에게 큰 빚을 졌다고 했다. 이들이 그에게는 큰 힘이 됐다. 그 빚을 갚으려고 99% 순수서민을 위한 서울시정을 펴겠다는 각오가 남다르다. 서울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지켜볼 일이다.
박 시장이 학벌에 집착했다면 1980년대 서울대 법대에 재입학할 수 있다는 통지를 거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단국대 사학과를 졸업했다. 그랬던 그가 한나라당의 학력 조작 시비에 시달렸다. 그의 희망캠프에서는 어쩔 줄 몰라 했고, 서울대 법대를 나온 나경원 한나라당 서울시장 후보는 TV토론에서 이 점을 물고 늘어졌다. 답답한 마음이 지속됐다. 박 시장은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나를 몰아세울 수 있느냐”고 할 뿐이었다. 지지율은 낮아졌고, 캠프에는 위기가 닥쳤다.
학력 시비가 커지자 그의 친구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한인섭 서울대 법대 교수가 직접 나서서 ‘오마이뉴스’에 ‘학력, 내가 아는 진실’이라는 기사를 썼다. 그 기사는 박 시장의 학력과 관련된 진실을 드러내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열아홉 살 청년을 제적시킨 시대적 억압과 그러한 시대적 아픔에 굴하지 않고 성취를 이룬 박 시장의 삶의 역정에 대해 얘기했다. 한 교수 외에도 이화여대 K교수, 한양대 J교수 등이 위기의 순간 그의 주변에서 마음으로 도왔다. 특별히 부탁받은 것도 아닌데, 위기에 처한 ‘박원순 변호사 구하기’에 자발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박 시장이 평생을 자신의 부와 특권만을 위해 살아왔다면, 이러한 친구들의 도움은 없었을 것이다. 늘 사회 약자 편에 서서 시민운동을 해왔던 그의 이력이 친구의 도움을 얻어낼 수 있는 신통방통한 비결이라면 비결이다.
결정적인 도움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서 나왔다. 5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던 안 원장이 5% 남짓한 그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한 것이다. 그리고 선거를 이틀 앞두고 안 원장은 다시 한 번 그를 확실히 지지하기 위해 희망캠프를 방문했으며, 2쪽짜리 의미 있는 편지를 건넸다. 안 원장은 이 편지에 선거를 통해 세상을 바꾸라는 메시지를 담았다. 특히 젊은 층에게 초점을 맞췄다. 위기 속에서 안 원장은 두 번이나 그를 도왔다. 박 시장에게는 이와 같이 남의 도움을 자발적으로 끌어내는 매력이 있다. 이것이 그의 힘이다. 세상일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 서울시장은 왜 나왔을까
박 시장은 어떻게 출마하게 됐을까. “시민운동가로서 조용히 잘사는데, 이명박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보니까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나왔다”는 그의 말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버릇처럼 하는 부모님 이야기를 들으면 남을 먼저 배려해왔던 가족력 때문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님에게 귀에 박히도록 들었던 소리가 있다고 한다. 바로 “내 입에 밥숟가락 넣기 전에 남의 입에 밥 들어가는지를 꼭 살피라!”는 말이다. 경쟁에서 남을 이겨야 살아남는다는 말로 아이를 키우는 요즘 부모에게는 얼마나 낯선 말인가. 경남 창녕의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늘 주변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랐다. 그는 이것을 지금도 생활신조처럼 새기고 있다. 식당이나 차에서 김밥이라도 먹을라치면 수행비서에게 “밥을 먹었느냐?”고 묻는다. 김밥과 음료는 물론, 때로는 본인이 먹을 약도 같이 먹자고 한다. 그가 남을 챙기는 버릇은 부모님의 DNA로부터 유전된 듯하다.
몇십 년 전 그의 어머니는 서울에 올 때마다 “서울의 저 많은 가게는 어떻게 먹고 사느냐? 거리의 저 많은 처녀는 누구랑 결혼하느냐”고 걱정하시곤 했단다. 자신만 즐겁다고 모두가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른 사람도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창녕 시골 마을의 삶의 지혜가 서울에서도 통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가족력이다. 그가 스스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한 것은 가정교육에서 비롯했다. 남이 갖지 못한 박 시장의 힘이다.
그의 선거홍보용 공보를 보면 영화 포스터 같은 느낌이 든다. 느티나무를 배경으로 노인과 찍은 사진은 서울을 하나의 마을공동체로 바라보는 시선을 담았다. 영화 포스터 같은 이 선거공보는 사진도 좋고, ‘서울시민 편에 서는 첫 번째 시장이 되겠습니다’라는 문구도 무난하다. 이러한 디자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중시해온 그의 가치 지향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 박원순의 현충원 참배
선거운동 기간에 그는 엄청난 사상 검증 과정을 겪었다. 10월 10일 서울시장 선거의 첫 번째 TV토론이던 관훈클럽 토론에서 나경원 후보는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에 대한 견해를 물으며 그의 국가관을 검증하려 했다. 나 후보가 “천안함 폭침이 북한 소행이라고 믿느냐”고 묻자 그는 “나는 천안함 사건이 북한 소행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서도 “그러나 정부를 신뢰하지 못해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상당히 있다고 생각한다. 정부가 왜 신뢰를 잃었는지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북한 소행이라고 믿는다고 했지만,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는 발언을 두고 색깔론이 나왔다. 홍준표 한나라당 대표는 “충격적인 발언”이라면서 “이런 안보관, 국가관을 가지고는 서울시장직을 할 수 없다”고까지 말했다. 진보 진영에서도 북한 소행이라고 믿는다는 발언을 크게 문제 삼으며 반발했다. 혹독한 사상 검증의 시작이었다. 나 후보는 마지막 토론에서도 “박 후보는 태극기에 대한 경례 등 국민의례도 하지 않는다”며 국가관을 들먹였다. 이에 그는 “국민의례도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툭 받아치면서 “나는 국가관이 확실하다”고 답했지만, 나 후보는 색깔론을 계속 제기했다. 21세기에도 냉전시대의 색깔론이 선거의 단골메뉴가 되는 우리의 현실이 서글프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일까. 그의 현충원 참배 이야기로 풀어보고자 한다. 많은 정치인이 중요한 결정을 앞둔 시점에 의례적으로 현충원을 참배한다. 그도 서울시장 후보 공식 출마 선언을 한 뒤 현충원을 참배하러 갔다. 하지만 그의 참배는 남달랐다. 역대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러 간 것이 아니라, 사병묘역을 방문하는 데 의미를 뒀다. 충혼탑에 헌화하고, 사병묘역을 자연스럽게 찾아가는 것은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연출로 드러낼 수 없는 그만의 매력이다.
그는 그곳에 ‘자유와 정의가 숨 쉬는 곳’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렇다. 사병묘역을 방문해 그곳에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숨진 영혼을 위로한 것이다. 국가관 검증에만 몰두할 것이 아니라, 역사를 바라보는 올바른 시선이 있는지도 확인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의 현대사는 대통령 등 영웅의 스토리텔링으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정의를 지키다가 사라져간 무명의 병사가 겪은 고통을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지도자라면 이와 같이 올바른 역사관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우익과 좌익을 넘어서 시민을 보살피는 역사관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사학과 출신다운 면모다.
# 내가 어떻게 네거티브를 하느냐
선거가 시작되면서 한나라당에서 네거티브 포문을 열었다. 선거사상 이렇게 네거티브가 많았던 적은 없었다고 민주당 당직자들은 말한다. 그러나 전략회의에서 네거티브에 좀 더 강력하게 대응하겠다고 하면 오히려 그가 말렸다. 특히 병역기피 의혹에 대해서는 할 말 없어 했다. 13세 때 일을 어떻게 해명하라는 것인가. 그의 말은 “시민도 다 알 텐데 우리까지 나서서 네거티브를 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쯤 그의 지지도가 빠진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심지어 나경원 후보가 앞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래서 전략회의에서 다시 한 번 나 후보를 강하게 물고 늘어지는 것이 어떠냐고 조언했다. 하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정권심판과 정책대안 제시 등 정공법으로 선거에 임하자는 것이었다. 나 후보의 1억 원짜리 피부미용 논란, 700만 원짜리 2캐럿 다이아반지, 13억 원대 차익을 거둔 부동산투자 등에 대한 네거티브 선전을 박 시장 스스로는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마지막 방송기자 클럽 TV토론에서 그는 “나도 나경원 후보에 대해 할 말이 없어서 가만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약간의 침묵 속에서 그의 결기를 느낄 수 있었다. 참모들이 박수를 쳤고, 상황실에 속이 후련하다는 시민의 전화가 많이 걸려왔다. 이제까지 그의 마음속 응어리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는 말이었다.
점심때 식사를 하며 이것이 아침밥인지 점심밥인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잠시 쉬는 시간이 있으면 바로 잠들어버리는 피곤한 일정 속에서도 박 시장은 시민에게 감사하고 행복하다는 말을 계속했다. 강남역에서 몇십 년 만에 만난 초등학교 동창생부터 그에게 성원한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려고 제주도에서 달려왔다는 사람까지 그는 많은 이에게 큰 빚을 졌다고 했다. 이들이 그에게는 큰 힘이 됐다. 그 빚을 갚으려고 99% 순수서민을 위한 서울시정을 펴겠다는 각오가 남다르다. 서울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