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일을 이틀 앞둔 10월 24일 안철수 원장이 박원순 후보의 희망캠프를 방문했다.
기성 정당의 보완재 아닌 대체재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역대 선거에서도 ‘제3후보’ 선호 현상이 나타나곤 했지만 기존의 제3후보는 여야 정당구도의 보완재였지 대체재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범야권 단일후보로 나선 무소속 박 후보가 당선함으로써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한 정치세력이 기성 정당의 보완재 구실을 넘어 대체재로 부상했다는 점에서 이번 선거 결과는 한국 정치의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시민사회가 기성 정치의 대안으로 부상한 현 상황은 과거에도 종종 나타났던 인물 중심의 제3후보 현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지금 시민사회에 대한 대중의 기대는 참신한 인물뿐 아니라, 인물로 표상되는 ‘가치’를 선호하는 측면이 크다. 청년실업, 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문제 등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경제 질서에 대한 절실한 요구가 ‘안철수’라는 인물로 투영된 셈이다. 이렇듯 ‘안철수 현상’을 만든 동력은 다분히 가치 지향적이며 가치의 방향은 공익, 공정, (경제)정의로 나타났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우리 사회를 지배한 주요 이슈는 대통령이 제기한 어젠다가 아니라 시민사회가 제기한 것이 많다. 무상급식, 복지 논쟁이 대표적 사례다. 이 대통령이 주도한 어젠다는 대중에게 외면당하고 그 자리를 시민사회의 어젠다가 대신했다. 이 대통령은 ‘공정’과 ‘공생’을 외치지만 대중은 ‘공정’과 ‘경제정의’를 ‘안철수’에게서 발견하고 시민사회에 희망을 건 것이다.
그런데 정당으로 대표되는 기성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정치 일반에 대한 불신은 구별해야 한다. 대중이 불신하는 대상이 정치 일반이라면 투표 불참 같은 정치 보이콧으로 이어질 확률이 높다. 하지만 공동체가 직면한 중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정치가 제구실을 해야 한다는 열망이 강할 경우에는 보이콧이 아닌 대안 추구라는 적극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대안 추구의 흐름 위에 안철수-박원순으로 대변되는 시민정치세력이 부상했다.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한 ‘MB 어젠다’
기성 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일차적으로 이 대통령과 여당을 향했다. 이 대통령이 제기한 미디어법, 세종시 건설안 수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및 미국산 쇠고기 수입 등 주요 어젠다는 그 내용에 관계없이 평균 찬성률이 40% 수준에 그쳤다. 이 대통령이 제기한 핵심 정책이 대중과 소통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 재임 때는 대통령이 제기한 행정 수도 이전, 언론 관련법 개정, 국가보안법 폐지, 대기업 개혁, 사학법 개정 등 어젠다 지지율이 평균 50% 이상으로 나타났다.
대통령이 대중과 소통하는 통로, 즉 민심을 반영하고 이를 정책으로 현실화하는 통로가 어젠다다. 따라서 대통령의 어젠다가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할 때 대중은 자신을 대변할 새로운 세력을 찾아 떠난다. 2007년 대선에서 노무현 정부에 실망한 대중은 그 대안을 한나라당에서 찾았다. 하지만 2011년 이명박 정부에 실망한 대중은 그 대안을 ‘여의도’ 너머에서 구하는 중이다.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안철수 원장의 선거 지원과 젊은 층의 투표 참여다. 박 후보의 승리는 야권 단일후보로서 ‘반(反)한나라당 민심’을 모았다는 점 외에도 20~30대를 중심으로 확산된 새 정치에 대한 요구가 안 원장과 결합하면서 투표 참여로 이어져 가능했다. 젊은 층이 원하는 새로운 정치는 ‘탈정당’ ‘탈이념’ ‘탈지역’으로 요약할 수 있고, 그 상징이 바로 ‘안철수 바람(안풍·安風)’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를 이틀 앞두고 안 원장은 박 후보의 희망캠프를 전격 방문했다. 외견상 박 후보 지지를 위한 방문이었지만, 그는 편지 형식을 빌려 서울시민, 나아가 대한민국 국민에게 일종의 출사표를 던졌다. 1960년대 미국 흑인민권운동의 계기가 됐던 로자 파크스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안 원장의 편지는 그가 추구하는 정치가 기성 정당의 정치와 어떻게 다른지를 잘 말해줬다. 그는 편지에서 시민운동 차원에서 정치에 참여하려 한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안 원장은 편지 말미에 “여러분도 저와 함께해주시기를 간곡하게 청합니다”라며 투표 참여를 호소했고, 대중은 7.2%포인트의 표차로 박 후보를 당선시키는 것으로 화답했다.
20~30대의 투표 참여가 박원순 후보 당선에 큰 힘을 발휘했다.
안 원장이 캠프 방문과 편지 전달 같은 비정치적 행위로 사실상 정치 행보를 시작함에 따라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안 원장이 어떤 정치행로를 걷느냐에 따라 대선구도가 소용돌이 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기존의 ‘여-야’ 구도가 ‘기성 정당과 새로운 제3정치세력’ 간 대결로 재편될 소지가 커졌기 때문이다.
안 원장이 박 후보 지지를 통해 승리할 수 있게 도왔다는 점에서 ‘안풍’의 실체는 확인됐다. 그리고 안 원장의 등장으로 제3정치세력화의 신호탄도 쏴 올린 셈이 됐다. 안 원장을 중심으로 한 제3정치세력이 민심을 얻는다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민심을 수렴하지 않는 기성 정당의 잘못으로 빚어진 대의정치(정당정치)의 위기가 실업과 양극화를 심화시킨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위기와 맞물리면서 새로운 정치 및 경제 시스템에 대한 요구가 그 어느 때보다 커졌기 때문이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변화를 바라는 민심을 확인할 수 있다. 10월 1일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중 66.4%가 ‘지지정당이 없다’고 답했다. 특히 20대(81.6%)와 30대(77.1%), 40대(70.9%)에서 ‘지지하는 정당이 없다’는 응답률이 높았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결과는 ‘지지정당이 없다’고 응답한 20~40대 연령층에서 박 후보를 대거 지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0월 26일 투표 직후 발표된 방송3사 출구조사에서는 20대 투표자의 69.3%가 박 후보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고, 30대(75.8%)와 40대(66.8%)에서도 박 후보는 높은 지지를 받았다.
안 원장이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이유는 기성 정치권에 희망을 잃은 국민이 새 정치에 대한 갈망을 그를 매개로 분출했기 때문이다. 그 시작은 2009년 6월 17일 방송된 MBC 프로그램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안철수 편’이었다. 당시 ‘무릎팍도사’를 본 사람들은 안 원장에게서 ‘공익성’과 ‘애국심’, ‘도전정신’과 ‘겸손함’을 느꼈다고 한다.
제3정치세력화의 신호탄?
박원순 서울시장이 첫 출근한 10월 27일 서울시 공무원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미국 기업으로부터 1000만 달러의 인수합병 제안을 받았지만 거절한 대목에서는 금전적 유혹보다 국가를 생각하는 안 원장의 ‘애국심’을 느꼈다. 또 그의 삶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의 연속이었다. 의사에서 벤처기업 최고경영자(CEO), 교수로 이어지는 안 원장의 변신은 자기 변화와 혁신 자체였다. 그리고 타인에 대한 존중과 ‘겸손함’도 빼놓을 수 없는 덕목이다. TV를 통해 안 원장의 진면목을 접한 대중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이후 안 원장은 전국을 순회하며 ‘희망 공감 청춘콘서트’를 열어 청년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청년에게 인생의 방향타이자, 성공의 롤모델이 됐다. 청년들은 안 원장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실천하는 유일한 존재” “그가 우리 사회에 있어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대중에게 정치권은 ‘자기 이익을 위해 싸움만 하고, 우리의 처지와 의사를 대변하지 않는 쓸모없는 집단’으로 각인됐지만 안 원장은 ‘참신함’과 ‘새로움’으로 기성 정치권의 ‘낡음’과 대비됐다. 대중이 안 원장을 ‘미래의 희망’으로 여긴 이유다.
이런 점에서 안 원장이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방향과 내용으로 제3정치세력화를 추진한다면, 청년이나 학생뿐 아니라 다수의 무당층으로부터 지지를 얻을 가능성이 높다. 10월 1일 디오피니언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안 원장의 향후 정치적 선택에 대해 ‘기존 정당에 가입해 정당개혁을 주도’해야 한다는 의견이 26.5%인 반면, ‘제3당 창당이나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해야 한다는 쪽이 63.6%로 압도적이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 정치권의 시계는 이제 내년 총선과 대선으로 향해 있다. 유력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안 원장이 변화를 갈망하는 국민의 열망을 어떻게 수렴할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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