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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 | 곽영진의 시네마 에세이

시대의 아이러니 귓속말로 조롱

호라티우 마라엘레 감독의 ‘사일런트 웨딩’

시대의 아이러니 귓속말로 조롱

시대의 아이러니 귓속말로 조롱

시대의 아이러니를 재치 있게 풍자한 ‘사일런트 웨딩’은 실화에 기초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고백하건대 필자는 새 개봉작들이 별로 신통치 않아 이 글의 소재와 방향을 정하는 데 애를 먹었다. 장쯔이·소지섭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소피의 연애 매뉴얼’과 밀라 요보비치 주연의 스릴러 ‘퍼펙트 겟어웨이’는 세계적인 미녀 스타도 ‘구제’하지 못할 만큼 ‘별로’였다.

유승호 주연의 캠퍼스 스릴러 ‘4교시 추리영역’은 농담처럼 느껴지는 극단적 반전과 시간이 갈수록 무너져내리는 내러티브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 걸작 ‘서스페리아’를 일부 모방한 듯한 한국 공포영화 ‘요가학원’도 필자가 보기엔 결함이 많았다.

개연성 있는 이야기와 밀도 있는 캐릭터가 크게 부족했다. 다만 강렬한 이미지와 미술효과는 봐줄 만했다. 2주 전 개봉한 ‘10억’도 인물의 구도가 느슨하고 서스펜스가 약해 반응이 그다지 좋지 않다. 1930년대 미국의 실화를 다룬 갱스터 영화 ‘퍼블릭 에너미’는 리얼리티를 살린 액션 신과 긴장감 있는 구성이 좋은 작품이다. 거장 감독 마이클 만과 조니 뎁이라는 슈퍼스타의 만남이라는 점도 주목할 만했다. 하지만 드라마와 캐릭터의 약점이 있어 추천작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독립영화 ‘독’은 일상의 혼란과 무력감, 무의식의 어두운 욕망과 공포를 그려낸 좋은 작품이지만, 꽤나 소수 취향이라 이 또한 제외했다.

과감히 어느 한 작품을 추천작으로 내세울 수 없어 고심하고 있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한국 현대사의 거목이 영면했다는 것과 함께 20년 전인 1989년 평민당 총재 시절 그를 인터뷰했던 기억이 떠올라 잠시 숙연해졌다. 당시 “주체사상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위에서부터 떨어지는 자주와 밑에서부터 솟구치는 자주가 있다. 무엇이 더 중요하겠느냐”며 반문하듯 답했다.

이번 주 지면을 채울 주제로 ‘예술(영화)과 정치’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독일 적군파를 소재로 한 웰메이드 정치 드라마 ‘바더 마인호프’와 정치 다큐멘터리 ‘야스쿠니’가 생각났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민의 자주성과 다양성을 유린한 오욕의 역사를 재현하며 레퀴엠(진혼곡)을 바치는 작은 영화 ‘사일런트 웨딩’을 추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극장 관람 기회를 놓쳤더라도 몇 달 뒤면 DVD로 나올 테니 말이다.



‘침묵의 결혼식’이란 뜻의 이 영화는 스탈린식 독재와 레드 파시즘이 동유럽 인민의 자유와 해학, 다양성을 옥죄던 시절의 이야기다. 힘찬 기운으로 타오르는 루마니아 영화의 에너지와 동유럽의 풍광이 돋보이는 영화다.

1953년 루마니아는 사실상 소련의 식민지였다. 시골 작은 마을의 유명한 커플이 결혼을 결심하자 둘의 결혼식은 마을 최고의 성대한 파티가 돼 모두 시끌벅적하게 준비한다. 그런데 하필 결혼식 당일 스탈린의 갑작스러운 ‘서거’가 발생한다. 소련군은 일주일간을 애도기간으로 선포하고 파티, 집회, 웃음을 금지한다. 눈물을 머금고 뿔뿔이 흩어진 가족과 하객들.

하지만 묘책을 생각해낸 마을 사람들의 조용하고 분산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결혼식과 피로연이 열린다. 사람들은 박수와 환호 없이 립싱크로 연주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귓속말로 축하인사를 전한다. 이토록 식장은 유머와 다양성으로 가득하다.

급변하는 세상과 달리 급조된 침묵의 비밀 결혼식을 치르는 마을 사람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은 시대의 아이러니를 재치 있게 풍자한다. 영화배우, 연극연출가 출신의 호라티우 마라엘레 감독이 실화에 기초한 소설을 직접 각색했다. 한 시대의 정치적 질곡을 사실적으로 담아낸 드라마로 독특한 리얼리즘을 구현한 것. 현실과 판타지를 오가는 영화적 표현은 한 걸음 진보한 ‘뉴웨이브’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처럼 ‘사일런트 웨딩’은 역사의 한 단면과 깊은 상처를 기지(機智)가 넘치는 희비극에 담은 것이어서 더욱 여운이 오래 남는다.



주간동아 2009.09.01 701호 (p76~76)

  • 곽영진 영화평론가 747838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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