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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양반도둑 아니겠소”

희대의 독설가 정수동, 통음으로 세도정치 폐해 조롱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양반도둑 아니겠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양반도둑 아니겠소”

조선시대 대표 ‘말술’ 정수동은 촌철살인 ‘취중토크’로 기득권층의 위선을 꼬집으며 종종 양반들의 술맛을 잃게 했다. 그림은 신윤복의 풍속화 ‘주사거배’(酒肆擧盃·1805년).

조선 말술과 해학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로 정수동(鄭壽銅·1808~1858), 김병연(金炳淵·1807~1863, 삿갓), 방학중 등을 들 수 있는데, 각기 일가를 이룬 이들 중 단연 압권은 정수동이었다.

대주가(大酒家), 대시인(大詩人), 희대의 독설가, 익살꾼 등으로 유명한 정수동은 조선 철종 때 활약한 위항시인(委巷詩人)으로 본관은 동래이고 본명은 지윤(芝潤)이며 자는 경안(景顔), 호는 하원(夏園)이다. 그는 왜어역관(倭語譯官)의 가계에서 태어났으나 문인으로 활동하며 당대 명사인 김흥근(金興根), 김정희(金正喜), 조두순(趙斗淳) 등과 교유했다.

정수동은 당시 기만과 위선에 찬 세도정치기의 말폐 현상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사회 모순을 날카롭게 풍자하며 권력과 금력에 대해 술을 빌려서 저항했다. 만일 두뇌가 명석한 그가 당대 실력자들과 영합했다면 충분히 출세가도를 달렸겠지만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평생을 처사(處士)로 유유자적하게 풍류를 즐기고 품격을 지키며 살았다.

그와 관련된 허다한 일화가 ‘정수동설화(鄭壽銅說話)’로 전하는데, 본인이 ‘하원시초(夏園詩)’를 남겼고 한말 장지연이 엮은 ‘일사유사(逸士遺事)’에 구전설화가 소개돼 있다. ‘정수동설화’는 술과 관련된 이야기와 당대 명사들의 허위의식을 통해 양반 지배층에 대한 풍자와 부정부패 고발 등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와 관련된 에피소드 몇몇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수표교에서 설경 보며 술 두 말 동낸 酒黨



어느 해 섣달그믐 영의정 김흥근은 궁교(窮交)와 빈족(貧族)에게 세찬(歲饌)을 나눠주게 됐는데 정수동도 궁교로 분류되어 세찬을 받았다. 김 정승이 정수동에게는 특히 술 두 말과 명태, 꿩 등을 곁들여 주었는데 그의 힘으로는 이것을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 정승은 자기 집 하인에게 운반하라고 한 뒤 “정 서방 뒤를 따라가 꼭 정 서방 댁에 두고 오너라”라고 했다.

김 정승댁 하인은 분부대로 정수동의 뒤를 따라 세찬 짐을 지고 가는데, 갑자기 밤에 함박눈이 쏟아졌다. 정수동이 짐을 진 하인을 데리고 수표교 근처에 당도했을 때 “꽤 무거운 모양이군. 여기다 내려놓게”라고 하자, 하인은 정수동의 집이 수표교 근처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서방님 댁이 근처에 있습니까. 어차피 여기까지 왔는데 댁까지 가져다드리겠습니다”라며 여전히 짐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수동은 “고마운 말이지만 그 무거운 짐을 우리 집까지 져다줄 것 없네. 여기 내려놓게” 하고 세찬 짐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하인은 김 정승의 명령을 저버릴 수 없어 세찬 짐을 정수동의 집까지 져다주기로 하고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정수동은 여전히 세찬 짐을 붙잡고 서서 “무거운 짐을 지고 갈 것 없이 우리 뱃속에 넣고 가세”라며 막무가내로 짐을 내려놓게 했다.

할 수 없이 세찬 짐을 내려놓은 하인이 “그럼 이제 돌아가란 말씀입니까”라고 말하니 정수동은 껄껄 웃으면서 “돌아가면 안 돼. 내가 이것을 내려놓게 한 것은 자네를 빨리 돌아가게 하기 위함이 아닐세. 두말 말고 이웃집에 얼른 가서 큼직한 사발이나 대접 하나만 얻어오게”라고 했다.

하인은 정수동의 얼굴을 쳐다보며 “이 눈 오는 밤에 길거리에서 술을 잡수시겠단 말씀입니까. 참 망령이올시다” 하고 다시 짐을 지려고 했지만 정수동은 “빨리 사발이나 얻어와. 설경을 바라보면서 한 잔 마시는 게 좋지 않은가” 했다. 하인은 더 버틸 수가 없어 이웃집에서 사발 하나를 얻어다 주었고, 정수동은 세찬 짐을 지고 온 하인을 술벗 삼아 두 말 술을 뱃속에 넣고 말았다.

또 어느 날 정수동의 친구들이 시회(詩會)를 개최했는데 정수동도 참석했다. 그는 참석하기가 무섭게 “시에도 술이 따라다니는 법인데 술 준비는 많이 했는가”라고 주최 측에게 물어보았다. “술은 마실 만큼 준비했으니 걱정 말고 시나 짓게”라는 답변을 듣고 정수동은 얼른 앉아 잠시 생각하고는 일어서서 “내가 지은 시를 읊을 테니 누가 좀 받아쓰게”라고 하며 시를 읊기 시작했다.

정수동의 시를 받아쓰던 친구는 그의 시가 자자구구 모두 관주(貫珠·시문을 따져 보면서 잘된 곳에 치던 동그라미)감이라서 덩달아 무릎을 쳤다. 그 후 정수동이 목이 마르다고 주최 측에게 얘기하자 곧 술과 안주가 준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급한 정수동은 슬그머니 술이 준비된 방을 찾아나서는데 술 두 동이가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자 정수동은 속으로 ‘겨우 두 동이야. 이걸 가지고 다섯 명이 먹자는 말이지. 간에 기별도 안 가겠군. 나 혼자 다 먹어치우자’라고 하면서 우선 한 동이를 마시고 두 번째 동이도 마시고 말았다. 정수동이 방에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자 친구들은 그가 돌아오기만 기다리면서 주연을 베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술을 감춰둔 골방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려 가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술동이 두 개는 이미 비어 있고 그는 대취해 찬 방에 쓰러져 자고 있었다. 친구들은 하도 어이가 없어 웃으면서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어디 있나. 술도 술이지만 체통을 지켜야지” 하고 잡아 일으키려 했으나 좀처럼 일어나지 않자 화를 벌컥 내면서 깨우니 정수동이 일어났다.

동전 삼킨 아이 보고는 “몇만 냥 삼킨 대감도 탈 없다”

“글쎄 여보게. 술 두 동이를 다 마셨단 말인가. 친구지간에도 체면은 지켜야지.” 친구의 말에 정수동은 “자네, 내 말 좀 들어보게. 내가 술 두 동이를 다 마신 것은 한 동이는 술로 마시고 또 한 동이는 안주로 먹었다네. 여보게, 안주 없이 어떻게 술을 마시나. 자네들도 그 정도는 알겠지”라고 한 뒤 다시 쓰러져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런 일이 있은 며칠 뒤 당대 세도대신 조두순의 집에 주연이 있어 정수동도 초대를 받았다. 정수동은 양반 시인은 아니었으나 당대 내로라하는 양반치고 추사(秋史)도 인정한 정수동의 시재(詩才)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초대받은 정수동이 솟을대문을 들어서는데, 어린아이가 동전 한 닢을 삼켰는데 장에 동전이 붙으면 죽는다고 온 집안이 야단법석이었다.

그러자 정수동은 사랑에 모인 대감들이 들으라는 투로 “걱정할 것 없네. 아랫배만 슬슬 쓰다듬어주면 그만일세. 어느 대감은 남의 돈 몇만 냥을 삼키고도 배만 쓸고 있으면 아무 일 없는데 까짓 제 돈 한 닢을 삼키고야 무슨 배탈이 나겠는가”라고 소리치자 대감들은 흠칫했다. 술잔이 오가고 유흥이 무르익자 조두순이 좌중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어느 대감은 호랑이라 하고 누구는 도둑이라 하는데, 한 대감이 나서서 “양반의 호령 한마디면 호랑이도 잡고 도둑도 잡으니 양반네의 명령에 누군들 꿈쩍하지 않겠소. 그러니 가장 무섭고 두려운 것은 양반이오” 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이에 잠자코 있던 정수동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호랑이를 탄 양반도둑입니다. 가슴에 호랑이(호패)를 달고 온갖 도둑질을 자행해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삼천리강산을 망치니 이보다 무서운 게 어디 있겠소”라고 말하자 대감들은 술맛을 잃고 말았다.

정수동은 그 후에도 방일(放逸)과 초탈(超脫)로 일관했으며, 부정한 재물은 술로 씻어야 한다면서 통음(痛飮)하며 세상을 조롱하다 지천명(知天命)이라는 나이에 지주(止酒)를 못한 채 과음으로 학을 타고 진애(塵埃) 세상을 훨훨 벗어났다.



주간동아 2009.09.01 701호 (p66~67)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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