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6

..

복돌이는 울리고 호야는 웃기고 ‘감동 강펀치’

탄탄한 스토리의 대명사 최석중

  • 안중규 만화가 titicaca@korea.com

    입력2006-12-26 10:53: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복돌이는 울리고 호야는 웃기고 ‘감동 강펀치’
    1. 저는 예전 만홧가게에서 고개가 아프도록 만화를 즐겨 보던 소녀였는데 지금은 45세의 두루뭉술한 아줌마입니다. 최석중 선생님이 아직도 생존해 계신지 궁금합니다. ‘복돌이’ ‘호야’ ‘꽁순이’ ‘수정이’ ‘복돌이 아빠’ ‘호야 엄마’ 등 선생님의 만화 주인공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작품들을 다시 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볼 수 있을까요? 오래전부터 인터넷을 다 뒤져도 정보를 찾을 수가 없네요. 부천만화박물관에도 문의해봤는데 없는 것 같다고 하네요. 실낱같은 정보라도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2. 어릴 때 많이 봤던 최석중 선생님의 만화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단 한 페이지라도 봤으면 좋겠습니다.

    3. 저는 40대 중반의 중학교 교사입니다. 정겹고 감동적인 최석중 선생님의 만화를 다시 보고 싶습니다. 그 만화책이 있다면 우리 반 아이들과 자녀들에게 당장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 글들은 최석중 선생을 그리워하는 올드팬들이 한국만화가협회 사이트를 비롯한 여러 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사연이다. 그러나 사이트 운영자들은 이에 대한 답변을 못하고 있는데, 이는 선생의 만화들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한 포털사이트 카페의 ‘얄개만화박물관’에 선생의 그림 자료가 약간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고 하겠다.

    이렇듯 30년이 넘은 지금까지 선생의 만화를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선생의 만화가 감동적인 이야기와 치밀한 구성, 등장인물들의 진지하면서도 재미있는 말과 표정으로 꾸며졌고 심리묘사가 탁월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만화 주인공 ‘호야’로 1960~70년대 어린이들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선생은 일본에서 태어나 청년 시절까지 부산에서 살았으며, 일찍이 부산의 어린이신문을 통해 단컷 만화를 발표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 모 신문사 특파원이었던 ‘세계서림’ 사장의 부탁을 받고 ‘백설공주’ ‘피노키오’ 등 세계적 동화를 각색해 만화로 만들어 공전의 히트를 치기도 했다. 당시 읽은 세계 명작들의 스토리는 선생의 만화 텍스트 구실을 했고, 만화 제작의 기본 방향이 됐다.

    선생은 해군 제대 후 부산시청에서 공무원으로 2년간 근무하기도 했는데 브리핑 차트를 기록하는 차트사 일이었다. 선생은 그림 실력까지 발휘해가며 차트를 만들어 당시 인기가 상당했다고 한다.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작품 구상, 심리묘사 탁월

    선생은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상경해, 당시 ‘땡이’로 유명한 임창 선생 밑에서 1년 정도 수학했으며 나중에 독립한 뒤 곧 인기작가 대열에 합류했다. 선생의 전성기 때 남가좌동 화실에는 제자들이 17명 정도 있었다. 한 달에 쌀을 몇 가마니씩 먹어 돈이 많이 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고 운치 있던 시절이었다고 선생은 회고한다.

    복돌이는 울리고 호야는 웃기고 ‘감동 강펀치’

    최석중 선생의 만화책 표지와 대표 캐릭터인 꽁순이, 최복돌, 호야, 수정이(왼쪽부터).

    선생은 스토리를 구상할 때,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는 데 가장 중점을 두었다. 그 때문에 선생은 항상 어린이 놀이터에서 스토리 구상을 시작해 화장실에서 원고를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짓곤 했다. 놀이터에서 재잘거리는 아이들을 관찰하고 메모해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작품을 살펴보니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과 너무도 흡사해 자서전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선생의 만화에 한 어른이 덜 익은 포도를 먹으면서 “포도가 와 이래 시노?” 하자 어린 주인공이 포도 농사짓는 사람에게 포도나무 뿌리에 설탕을 뿌리라고 말하라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어린이들의 심리를 꿰고 있지 않으면 찾아내기 어려운 대목으로, 선생이 어린이들 시각에서 만화를 작업했음을 알 수 있다.

    복돌이는 울리고 호야는 웃기고 ‘감동 강펀치’
    또 한번은 지압을 소재로 만화를 그렸다. 이때 전국에서 수많은 독자들이 자신의 아픈 곳을 말하면서 어떻게 지압을 하면 좋은지 묻는 편지를 보내와 곤혹스러웠다고 한다. 선생은 지압 전문가가 아니라 지압 만화를 그리기 위해 약간 공부했을 뿐인데 말이다.

    ‘영원한 홀수’라는 과학 만화도 크게 인기를 얻었다. 과학물이면서도 어느 정도 신비의 세계를 다뤘던 작품으로 선생이 많은 애정을 갖고 있다. 또 기억나는 작품은 약간 무서운 만화다. 인도에서 주인공에게 인형을 보내왔는데 그 인형이 밤마다 “부쯔라카~! 부쯔라카~!”라는 이상한 소리를 내며 혼자 돌아다녔다. 누군가가 주인공을 공격해오니 조심하라는 경고음이었는데, 그런 미스터리를 안고 전개되는 이야기는 손에 땀이 날 정도로 재미있어 독자들의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아쉽게도 최 선생 자신조차 그 작품의 제목을 기억 못하고 있는데, 그때만 해도 한 달에 수십 권의 책을 쏟아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선생이 아끼는 대표작 중 하나가 1972년에 발표한 ‘차전놀이’다. 이 작품으로 선생은 문화공보부 산하 도서출판윤리위원회에서 작품상을 받았다. 요즘처럼 한국 만화가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면 만화 한류의 원조가 되었을 법한 뛰어난 작품이다.

    당시만 해도 만화를 그리기 위해 심층 취재를 한다는 것이 생경하던 시절이었지만, 선생은 ‘차전놀이’를 그리기 위해 안동까지 내려가 어느 고등학교에서 차전놀이하는 모습을 촬영하면서 기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구성해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선생의 만화에 등장하는 다양한 장르의 주인공들은 ‘호야’를 비롯해 ‘복돌이’ ‘수정이’ ‘꽁순이’였는데 그들은 우리 이웃의 정겨운 친구요, 다정한 누이요, 따뜻한 동생이요, 꿋꿋한 형이었다. 이들 캐릭터만 연구해도 한국의 60~70년대 시대상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듯하다.

    당시 독자이던 많은 어린이들은 ‘호야’와 ‘복돌이’가 펼치는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매료되어 만화책을 넘기면서 눈물과 콧물을 훌쩍거리기도 하고, 깔깔거리며 웃기도 하고, 성질을 내기도 했던 것이다.

    선생의 만화에서 빠지지 않는 요소는 ‘인간적인 감동’이었다. 그것이 만화가 크게 히트한 요인이었다고 선생은 회고한다. 선생은 지극히 교과서적인 단어인 ‘윤리’ ‘자유’ ‘민주주의’ ‘평화’ 등 나름대로의 기준을 만들어놓고 어린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도록 배려하면서 작품에 임했다. 그러면서도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며 감동을 주었던 선생의 작품을 보면, 한 편의 잘 짜여진 문학작품을 보는 듯했다.

    당시는 만화 검열이 심해 모든 작가들의 원고에 칼질과 화이트(수정액) 자국이 난무했지만, 선생의 작품은 검열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철저한 권선징악과 해피엔딩 스토리였다.

    그래서 만화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던 70년대에도 선생의 만화책은 교과서보다 더 잘 정돈된 ‘도덕 교과서’이상의 역할을 한 것이다.

    권선징악과 해피엔딩 … 만화책보다 ‘도덕 교과서’

    선생이 70년대 사회지도층 인사들과 수원에 있는 새마을연수원에서 일주일 동안 새마을 교육의 하나인 정신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다. 선생은 만화가협회 소속 작가들인 고우영, 박진우, 이재학, 장훈 등과 그곳에 있었는데, 함께 들어간 다른 분야의 여러 사람들에게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요즘엔 정부에서 이런 교육을 실시하면 반발이 많겠지만, 당시는 새마을 교육을 받는 자체가 ‘가문의 영광(?)’이던 시절이었다.

    1970년 초반, 아동만화가협회와 창작만화가협회가 통합돼 한국만화가협회가 탄생했을 때 협회를 헌신적으로 일으켜 세운 분이 당시 회장이던 박기당 선생과 부회장이던 최석중 선생이다. 당시엔 협회 재정이 열악해 박 회장은 협회 운영을 위해 집을 팔았고, 최 선생은 ‘소년한국일보’와 신촌의 ‘합동’ 등을 다니면서 구걸하다시피 찬조를 받아냈다. 두 사람의 열정적 노력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한국만화가협회로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만화계엔 언론에 많이 오르내려 잘 알려진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걸출한 작품을 수없이 남기고도 후대에 이름이 별로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이 많은데 최 선생은 후자에 속하는 대표적 작가다.

    그러나 선생은 지금도 외국에서 연락해오는 올드팬들이 있고, 아직도 ‘호야’를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아 무척 행복하다고 말한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