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55

..

원작 베끼기에서 대사 차용까지

  • 이서원 자유기고가

    입력2006-10-09 11:0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원작 베끼기에서 대사 차용까지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이번 주에 개봉된 ‘야연’은 중국판 ‘햄릿’이다. 물론 엄격하게 따진다면 조금 다르다. 햄릿의 어머니 거트루드와 햄릿이 사랑하는 여인 오필리아의 나이 차이가 크지만, 야연에서 이 두 여자의 역할로 등장하는 이들은 또래로 그려졌다. 또 야연에서 햄릿은 거트루드의 친아들이 아니다. 하지만 햄릿의 캐릭터 설정과 줄거리는 고대 중국을 무대로 한 이 팬터지의 세계에 그럴싸하게 잘 들어맞는다.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그대로 사용하는 대신 막연히 줄거리와 주제만 빌려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든 이런 영화가 또 있을까.

    물론 바즈 루어만의 ‘로미오 · 줄리엣’ 같은 영화들은 제외다. 이 작품은 현대 미국을 무대로 하고 있긴 하지만 셰익스피어의 대사들을 그대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줄리아 스타일즈와 히스 레저가 출연한 발랄한 틴에이저 코미디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호주 액센트를 쓰는 학교 건달이 내기 때문에 우등생 여학생과 데이트를 한다는 내용의 이 코미디는 셰익스피어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에서 소재를 가져온 것이다. 심지어 ‘10 Things I Hate About You’라는 영화 제목도 패러디다. 건성으로 들으면 마치 ‘Taming Of The Shrew’ 같다. ‘잔소리 심한 여자를 여과포로 거르기’라는 의미다. 다행히도 이 작품은 노골적으로 성차별적인 원작보다는 결말이 예의 바르고 건전한 편이다.

    진지한 영화광들이라면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을 선택할 것이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중세 일본을 무대로 한두 편의 근사한 셰익스피어 영화를 만들었다. 하나는 ‘맥베스’를 각색한 ‘거미집의 성’이고, 다른 하나는 ‘리어 왕’을 각색한 ‘란’이다.



    가볍게 원작의 스토리를 빌려 전혀 다른 주제의 이야기를 만들었던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와는 달리 구로사와 아키라는 완전히 정공법을 구사한다. 그의 영화는 셰익스피어에게 존경을 표시하는 대신 정면 대결을 시도한다. 나는 ‘란’이 ‘리어 왕’을 능가하는 걸작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거미집의 성’만큼이나 강렬한 ‘맥베스’ 영화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아마 로만 폴란스키의 피투성이 각색물 ‘맥베스’가 그 비슷한 수준까지 오르기는 했겠지만.

    그 이외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있다. ‘오델로’의 이야기는 현대 영국 경찰 세계를 무대로 한 텔레비전 시리즈와 미국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정원 장식용 난쟁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 버전 ‘Gnomeo and Juliet’가 개봉을 기다리고 있고, 앞으로도 비슷한 영화들은 계속 만들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셰익스피어가 그만큼 보편적으로 위대한 작가라고? 꼭 그런 건 아닐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이 이야기들을 직접 창작한 게 아니라 다른 책에서 빌렸으니까. 정답은 셰익스피어 시대에도 재미있었던 좋은 이야기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흥미롭다는 것이 아닐까.



    영화의 창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