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대 후반에서 50대까지의 독자라면 코흘리개 시절, 어른들 몰래 들렀던 만화방에 대한 추억이 있을 것이다.
- 흑백 TV마저 동네에 한두 대 있던 시절, 1원짜리 동전으로 만화책을 몇 권 보면 TV까지 공짜로 볼 수 있던 만화방은 당시 어린이들에게
- 유일한 오락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었다. 그 속에 자리했던 추억의 만화가들을 찾아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하씨 집안의 맏형인 하고명 선생은 1939년에 일본 기류시에서 출생해 부산의 해양고등학교와 동아대학교를 거쳤다. 60년대 스타 작가인 박기당의 문하생 출신인 하 선생은 64년 ‘배짱 좋은 소년’으로 데뷔한 뒤 ‘일류 멋쟁이’ ‘갈비전’ 등으로 특A급 작가군에 진입했고, 이후 20여 년간 승승장구했다. 지금은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 둥지골에 있는 둥지만화박물관의 관장으로 있다. 이 박물관은 국내에서 가장 많은 만화 자료를 소장한 곳. 하 선생이 이곳으로 이사 올 당시 그가 소장한 만화와 원고 등이 2.5t 화물차 9대 분량이었다고 한다.
하 선생은 만화가 생활 이후 지금까지 40년 동안 5만여 권의 만화책을 수집했는데, 1954년 출간된 김성환 만화집 ‘세태만상’과 56년 나온 국내 최초의 만화잡지 ‘만화춘추’ 창간호를 소장하고 있다. 또한 김종래의 ‘염불재’, 산호의 ‘유리천사’, 이근철의 ‘폭격기’ 등 희귀한 한국 스타 작가들의 만화책들과 박기당의 ‘천리안’ ‘월광주’ 등 옛 작가들의 육필 원고 1500여 점, ‘쾌남 홍길동’ ‘우주대장 애꾸’ 등 50여 점의 만화영화 포스터, 미국과 일본의 옛 만화 3000여 점 등도 소장하고 있다. 현재 국내의 만화박물관은 경기도 부천의 만화박물관과 이천의 청강문화산업대학 등에 있지만, 하 선생의 둥지만화박물관이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기에 한국 출판만화의 역사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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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년 ‘배짱 좋은 소년’으로 데뷔 20여 년간 승승장구
하 선생에겐 1960~70년대에 어린이였던 올드팬들에게서 편지가 오고 그들이 직접 찾아오기도 한다. 교수, 공무원, 기업체 사장 및 회장 등 다양하다. 그들은 모두들 하나같이 하 선생과 그의 만화 주인공 ‘청이’가 닮았다고 한다. 손님들은 둥지만화박물관 옆의 펜션에서 가족과 함께 숙박하면서 옛 만화책을 훑어보고, 하 선생과 밤새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한단다.
하 선생이 활동할 당시 만화책 뒷면엔 ‘독자란’ 코너가 있었는데, 그림을 좀 그릴 줄 안다는 전국의 독자들이 솜씨를 뽐내고, 작가에게 그림을 평가받는 면이었다. 지금도 유명한 많은 만화가들과 삽화가들은 이 ‘독자란’을 통해 배출됐다. 당시의 만화 내용은 지극히 단순한 스토리였지만, 해피엔딩과 권선징악, 휴머니즘을 담은 것들이어서 어린이 독자들은 주인공을 따라 울고 웃었다. 서너 평 남짓한 만화방에는 코흘리개 꼬맹이들이 표지를 뜯은 신간 만화책을 학수고대했고, 그것이 진열되면 쟁탈하다시피 만화책을 낚아채곤 했다. 이런 풍경은 만화방의 일상이었다.
하 선생의 인기가 절정이던 60~70년대에 특A급 원고료를 받던 작가들로는 박기정, 이근철, 손의성, 엄희자 등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하 선생은 만화계의 유명한 멋쟁이로, 일명 ‘신촌 백구두 멤버’였다. 그 멤버는 4명으로 이근철, 손의성, 백산, 하고명이었다. 신촌에 있던 나이트클럽 ‘신촌회관’에 신촌 백구두 멤버가 입장할 때면 밴드 마스터가 음악을 멈추고 환영 팡파르를 울릴 정도로 그들의 인기는 요즘의 연예인 못지않았다.
신촌회관 마담은 만화가들과 허심탄회하게 지냈는데, 하 선생은 그녀의 닉네임을 ‘이미자’로 정했다. 나중에 그곳을 오가는 모든 손님들이 그녀를 ‘이미자’라고 불러 신촌회관의 대명사가 됐다. 신촌회관 손님들 중 인기 1위는 신촌 백구두 멤버들이었고, 2위는 신촌세브란스병원 의사들이었다고 한다. 신촌 백구두 멤버들은 만화가들 중에 최초로 자가용을 산 이근철 선생과 서울 시내를 주름잡았는데, 당시만 해도 서울엔 차량이 거의 없어서 논스톱으로 달렸다고 한다. 하 선생의 지방 출장길엔 지방 독자들이 환영 플래카드를 들고 마중을 나올 정도였다고 하니, 말 그대로 한국 만화계의 황금기였던 셈이다.
60년대 말 부산 송도에서 많은 만화가들이 며칠간 단체 유람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는 출판사에 작가들의 원고가 워낙 많이 쏟아져 출판사 사장이 원고 공급을 줄이려고 기획한 것이었다. 이때 해운대의 건달들이 찾아와 만화가들에게 텃세를 부리면서 시비를 걸었는데, 맷집과 깡이 좋고 날렵한 스포츠맨인 송도 출신 하 선생이 그들을 바닷물 속으로 끌고 들어가 소탕해버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만화계에서는 하 선생에게 시비 거는 작가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굵은 터치와 시원한 여백 … 이야기 보편성 탁월
하 선생은 자신의 만화 주인공 ‘청이’처럼 항상 웃고 쾌활하게 생활하여 지금도 40대 청년같이 산다. 아직도 단단한 근육질이다. 차도 지프를 몰고 다닌다. 하 선생을 비롯한 당시의 만화가들은 황금시간대에 편성된 ‘명랑 복덕방’ 등 여러 TV쇼에 출연해 만화 쇼를 펼쳐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스타였다. 고(故) 신동우, 고 이재화, 계월희, 최석중, 박진우 등도 단골로 TV에 출연해 많은 인기를 얻었다.
1969년에 시작해서 75년까지 열렸던 ‘문화공보부 장관기 쟁탈 문화예술인 야구대회’에서는 가수팀과 영화인팀, 팝스팀, 만화가팀이 친선 경기를 치렀다. 이때 만화가팀은 만화가협회 차원에서 이끈 게 아니라 신촌 백구두 멤버의 손의성, 백산, 하고명 등이 사비를 털어 이끌었다. 당시 하 선생은 만화가팀의 부단장과 주장을, 이근철 선생은 감독을 맡았다.
이 대회는 해마다 서울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렸는데 영화인팀 선수들은 장동휘를 단장으로 이대엽, 황해, 장혁, 독고성, 신성일 등이었다. 가수팀은 김상국, 차중광, 서유석, 어니언스 등이었고, 팝스팀엔 김세환, 임창제 등이 있었다. 만화가팀은 평상시에도 만화가들이 많이 살던 경기도 화전역 앞 덕은국민학교와 항공대에서 꾸준히 야구를 해왔기에 급조한 다른 팀보다 막강한 전력을 갖춰 매번 좋은 성적을 거뒀다.
하 선생의 그림체는 단순하면서도 경쾌한 느낌의 굵은 터치와 면이 시원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단순하면서도 묘사할 것은 세밀히 묘사한 점이 예사롭지 않다. 스토리 전개도 명쾌하고, 그림과 일체감을 느끼게 하면서 템포가 엄청나게 빠르다. 이처럼 선생의 그림과 스토리는 군더더기가 없는 게 가장 큰 특징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쉽게 와 닿았다. 이야기의 보편성에서도 탁월하여 그 시대 일반인들의 마음을 잘 읽고 만든 수작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린 독자들은 선생의 만화책을 읽고 주인공 ‘청이’처럼 살겠다고 단호한 결심을 했을 법하다. 그렇기에 부모님이나 선생님 몰래 그렇게 읽히지 않았나 싶다.
하 선생은 매달 많은 분량의 작품을 창작했는데, 주인공 ‘청이’가 등장하는 배경도 아주 다양했다. 일제강점기 독립군으로 나오는가 하면, 조선시대 야담과 전설의 주인공으로 나왔고, 학창시절 의리의 사나이와 서부의 사나이로 등장하기도 했다. 당시 청이는 전국 만화방을 찾은 꼬마들의 우상이었고 따뜻한 친구였다. 지금도 40, 50대들은 하 선생의 청이를 보면 국민학교 시절의 잃어버린 옛 골목 동무를 만난 양 반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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