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1일 열린 B보이 댄스 경연 ‘배틀 오브 더 이어 코리아 2006’(좌).한국형 키치·루저·양아치 문화의 종합선물세트인 애니메이션 ‘아치와 시팍’(우).
루저(loser)·양아치·키치의 코드를 담은 ‘B급 문화’가 ‘웨이브’를 일으키고 있다. B급은 A급이 가진 엄숙주의, 권위주의를 조롱한다. 아니, 경멸한다. 20세기 ‘뽕짝 버라이어티 쇼’의 인기를 계승한 ‘21세기형 B급 문화’는 더 이상 ‘백스트리트 컬처(Backstreet culture)’가 아니다.
9월2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서교동 ‘B보이(브레이크댄스를 추는 남자)’ 전용극장. 퍼포먼스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를 보러 온 ‘남녀노소’ 관객들은 강렬한 동작과 귀를 때리는 비트에 ‘이성을 잃었다’. ‘돈 내고 극장에서 감상하는 예술’로 격상된 ‘B보잉’은 이제 ‘잘 팔리는’ 문화상품이다.
B급 패션 차브 아이콘은 싸이와 이효리
“길거리 양아치의 상징이던 B보잉이 어느 틈엔가 문화시장의 블루오션, 한류의 미래시장이 됐다.”(문화평론가 김경민)
B보이들은, 아니 ‘B의 세계’에 사는 젊은이들은 ‘Battle’을 즐긴다. 영한사전에서는 battle을 전투·싸움·교전·국지전이라고 해석한다. 발 빠른 네이버 국어사전엔 이 단어가 ‘제대로’ 설명돼 있다. ‘[명사] 춤이나 노래 따위에서, 우열을 가리는 일’. 세계 최고 권위의 B보이 대회의 이름은 ‘배틀 오브 더 이어(battle of The year)’다.
“랩, 댄스, 게임에서의 배틀은 ‘전쟁’이나 ‘경쟁’이 아니에요. ‘나는 다르다’는 사실을 뽐내면서 대중을 장악하는 창조적 행위죠. 배틀은 매력적인 이성에게 접근하는 퍼포먼스가 되는가 하면, 사회를 꼬집는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B보이 김진규)
PC게임방이든, 길거리든, 동대문 패션가든 배틀의 복장은 단출하다. 야구모자에 허름한 청바지, 혹은 ‘추리닝’에 슬리퍼. 장신구는 덩치가 큰 싸구려 액세서리다. ‘B세대’의 옷차림은 ‘싸구려패션’ ‘백수패션’이라며 깎아내리기엔 오히려 ‘쿨’하다. ‘B급 패션’은 “그래, 나 싸구려다. 그래서 뭐가 잘못됐는데?”라면서 ‘된장녀’의 허영을 꼬집는다.
B보이 퍼포먼스 마리오네트(좌).‘백수들의 저녁식사’로 이름 지어진 한 ‘추리닝 파티’(우).
사회학의 석학들에 따르면 패션은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도구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구별짓기(La Distinction)’에서 “못 배운 게 한이 되고, ‘뿌리 없는 후레자식’과 ‘백이나 줄이 없는 못난이’가 사회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적 메커니즘을 분석하면서 문화행위와 취향, 안목은 ‘계급(Class)’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B급 패션은 상위계급을 지향하는 문화적 구별짓기의 일반적 메커니즘을 전복한다. 즉, 역으로 ‘양아치 취향의 배타적인 소유자’임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유행이 (경제적, 문화적) 하위 계급과의 차별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B급 패션은 이러한 유행을 조롱하고 비웃는 셈이다.
영국인들은 이러한 B급 패션에 차브(chav)라는 이름을 붙였다. 뒷골목에서 흔히 마주치는 ‘양아치 패션’이 유행의 중심에 선 것이다. 축구선수 웨인 루니와 그의 애인인 콜린 맥러플린, 해리 왕자가 대표적인 차브족. 한국의 차브 아이콘은 누가 뭐래도 싸이와 이효리다. 이효리는 홍대 앞을 ‘추리닝 바지’로 물들 게 한 바 있다.
“양아치든 5선 의원이든 생긴 대로 자연스럽게 살자”고 노래하는 싸이는 자타가 공인하는 ‘B급 딴따라’다. 키치·루저·양아치 코드의 원조 격인 DJ DOC는 “A급을 만나도 꿀릴 게 없고 오히려 A급보다 더 당당하다”고 말한다. B급 딴따라들의 노랫말은 어깨에 힘을 뺐으되 사회를 예리하게 응시한다.
B급은 A급의 엄숙주의를 비웃으며 진화하고 있다. ‘무쓸모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한 영화 ‘다세포소녀’의 원작인 만화 ‘다세포소녀’는 ‘도덕군자’인 양 행세하는 A급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꼬집는다. 한국형 B급 문화의 종합선물세트인 애니메이션 ‘아치와 시팍’은 또 어떤가.
로댕갤러리가 마련한 ‘사춘기 징후’(11월5일까지)에 참가한 작가들은 유희적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양아치의 시선과 B급 이미지를 통해 한국 사회를 들여다본다. 전시된 만화와 조악한 플라스틱 장난감을 보면 어디까지가 예술이고 어디까지가 장난인지 불분명하지만, 그들이 조롱하는 대상은 선명하다.
주류문화가 B급 문화 훔쳐오기도
영화 '다세포소녀'
칼럼니스트 김규항은 자신을 ‘B급 좌파’라고 부른다. 인기 블로그인 ‘EASTASIA
HOJAi’(www.eastasia.co.kr)의 간판은 ‘A journalist Grade B, 호자이… B급 기자’인데, 이 블로그의 ‘쥔장’은 메이저 언론사의 기자다. ‘19禁 순정만화’라는 모순된 컨셉트의 만화 ‘다세포소녀’의 저자 이름(필명)은 ‘B급 달궁’.
어쩌면 “B급 문화는 ‘마이너인 척하는 메이저들의 문화’”(B급과 키치를 연상케 하는 케이블 TV ‘순결한 19’를 연출하는 KMTV 김태은 PD)일지도 모른다. B급 영화의 마니아면서 B급 코드가 물씬 풍기는 영화를 만들어내는 박찬욱과 류승완 감독의 작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주류문화가 B급 문화를 훔쳐오거나 받아들이는 사례도 늘고 있다. B급 코드가 주류의 자리로 올라서고 있는 것이다. B급의 힘은 ‘문화권력을 갖고 있지 않아도 창조해낼 수 있다’는 다양성에서 나온다.”(영화평론가 하재봉)
‘프로가 되기를 강요하는’ 시대를 꼬집으며 B급·루저·아마추어들의 ‘복음서’가 된 박민규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한겨레문학상 수상작)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필요 이상으로 바쁘고, 필요 이상으로 일하고, 필요 이상으로 크고, 필요 이상으로 빠르고, 필요 이상으로 모으고, 필요 이상으로 몰려 있는 세계에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 인생은 삼천포에 있다.”
스스로 루저가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루저인 척하는 ‘진짜 프로’인지도 모른다. 주류에서 한참 벗어난 듯한, 때로는 저급하고 촌스럽기도 한 ‘삼천포 코드’가 주류를 조롱하며 활개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