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거미가 어스름하게 깔리던 9월19일 저녁 6시30분. 대학 동기 사이인, 갓 마흔에 접어든 남성 셋이 서울 신촌의 한 호프집에서 때이르게 500cc 잔을 부딪친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 직장생활 13년째인데 비전은 보이지 않고, 출근길이 어찌나 허망하게 느껴지는지…. 거, 왜 있잖아. 작가 김훈이 말한 ‘밥벌이의 지겨움’ 같은…. 모두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아.”(K 씨)
“예전에 KBS TV ‘인간극장’에 나왔던, 산골로 간 젊은 부부 기억나? 무주였던가? 어쨌든 그 사람들 사는 모습 참 보기 좋더라. 부러웠어. 그때 제목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였지 아마? 내가 바라는 미래를 현시점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너무 멋져 보였어. 난 언제쯤 그렇게 살아보나?”(또 다른 K 씨)
“웰빙(참살이) 웰빙 하고 떠드는데, 고기와 패스트푸드 대신 생선이랑 유기농 식품 먹는다고 삶이 크게 달라지냐? 만날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는데, 대체 뭐가 진정한 웰빙인지, 원! 직장도 조만간 지방으로 옮겨간다는데 이참에 확 때려치워? 아, 각박한 사회의 틀을 벗어나고 싶다. 윤시내의 노래도 있잖아, ‘벗어나고 푸아~’. 그런데 갑자기 가족들 얼굴이 삼삼해지네.”(P 씨)
시간은 흐르고… 빈 잔은 점점 쌓여만 간다.
우리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꾼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명확히 깨닫는 삶, 하여 웬만한 역경엔 굴하지도 않는 삶을. 그러나 ‘어떻게?’라는 반문에 “삶을 재발견했다”고 답할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1990년대 이후 다양한 방식의 삶 탐구
우리가 바라는 게 그렇게도 거창한 것인가?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지금 행복한가?”라는 자문(自問) 앞에선 한없이 초라해진다. 강남 아파트, 조기 유학, 노후 대책을 굳이 말머리에 올리지 않더라도 행복의 가치는 많은 부분, 물질적 요소로 ‘재단’될 뿐이다.
하지만 조금만 눈 돌려보면 다른 삶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이른바 ‘대안적 삶’이 그것이다. 경쟁과 성취에 매몰된 현시대의 왜곡된 삶의 가치 대신, 밥벌이에서 소외된 자기 자신을 소박한 삶의 주인공으로 탈바꿈시키면서도 내적으로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 전환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적 삶’일까. 흔히 대안적 삶은 ‘에코토피아(Ecotopia·생태주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Ecological’과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의 합성어로, ‘생태적 이상사회’를 의미)’로 상징되는 생태주의적 삶의 방식과 동일시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이후 다양한 방식의 대안적 삶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 이래, 생태마을이나 생활협동조합 등이 곳곳에 생겨났다. ‘자연이 최고의 교과서’라는 믿음에 근거해서다.
학술적 논의도 활발하다. 2005년 10월 인제대에서 열린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적 삶’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그 한 예다. 이 자리에선 돈과 경쟁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풍요로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업 중심의 소공동체, 각자가 지닌 물건·노동력·기술을 교환하자는 지역통화(通貨) 운동 등이 논의됐다. 그러나 대안적 삶을 누리고 싶다고 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던 루소의 말을 따라 우리 모두가 ‘귀농(歸農)’이라는 과감한 의식을 치를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안의 선택은 언제나 기존의 것들에 대한 ‘비움’을 전제로 하는 법이다. 상당수 현대인들에겐 도시를 벗어나는 데서 파생될 ‘경제적 퇴행’이 큰 고민거리다.
생태공동체운동센터 이근행 사무국장은 “대안적 삶의 정의를 굳이 생태공동체 활동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단순히 직업을 바꾸는 정도의 ‘생업 전환’도 대안적 삶이라고 볼 수는 없다”며 “현재의 삶의 틀을 벗어나되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연과 사회, 타인과 지금과는 다른 지속가능한 ‘관계 맺음’을 통해 한 단계 거듭날 수 있어야 대안적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경북대의 일부 교수들은 한때 이 같은 고민을 토론을 통해 풀어나가려 시도하기도 했다. 김영기 교수(철학) 등 경북대 교수 10여 명은 1997년 6월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모임’(이하 ‘대안 모임’)을 만들어 2005년 2월까지 꾸려왔다. 모임의 취지는 현대문명과 사회 현안들에 대한 대안을 모색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자는 것. 매월 한 번 교수 휴게실에 모여 지방분권, 지방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한국의 재벌 문제 등 사회 각 분야의 현안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기득권 포기 ‘경제적 퇴행’ 가장 큰 고민거리
모임의 좌장이던 김 교수는 “대학사회에서 교수들 간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감안, 각자의 ‘정신적 건강성’을 지키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으나 결국 일상에 떠밀려 해체한 뒤 ‘경전 읽기’ 모임으로 바뀌었다”며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교수도 한때 ‘대안 모임’의 회원으로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에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다”고 전한다.
과연 대안적 삶을 위한 작은 실천법은 어떠해야 할까.
삶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라고 했다. 그러니 사회운동연구소 정수복 소장이 제시한 ‘새로운 삶을 위한 7가지 제안’을 눈여겨봐도 좋을 듯하다. ▲자기만의 시간 갖기 ▲내면의 평화 만들기 ▲느림의 생활양식 만들기 ▲가난한 삶 선택하기 ▲성찰성과 영성 키우기 ▲녹색 감수성 키우기 ▲보살핌의 윤리 실천하기가 그것이다.
대안적 삶을 위해서는 전향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일견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대안적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경전’으로 통하는 ‘조화로운 삶’의 저자 헬렌 니어링은 말했다. “생각한 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지금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 직장생활 13년째인데 비전은 보이지 않고, 출근길이 어찌나 허망하게 느껴지는지…. 거, 왜 있잖아. 작가 김훈이 말한 ‘밥벌이의 지겨움’ 같은…. 모두들 그저 죽지 못해 사는 것 같아.”(K 씨)
“예전에 KBS TV ‘인간극장’에 나왔던, 산골로 간 젊은 부부 기억나? 무주였던가? 어쨌든 그 사람들 사는 모습 참 보기 좋더라. 부러웠어. 그때 제목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였지 아마? 내가 바라는 미래를 현시점에서 살아가는 그들이 너무 멋져 보였어. 난 언제쯤 그렇게 살아보나?”(또 다른 K 씨)
“웰빙(참살이) 웰빙 하고 떠드는데, 고기와 패스트푸드 대신 생선이랑 유기농 식품 먹는다고 삶이 크게 달라지냐? 만날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는데, 대체 뭐가 진정한 웰빙인지, 원! 직장도 조만간 지방으로 옮겨간다는데 이참에 확 때려치워? 아, 각박한 사회의 틀을 벗어나고 싶다. 윤시내의 노래도 있잖아, ‘벗어나고 푸아~’. 그런데 갑자기 가족들 얼굴이 삼삼해지네.”(P 씨)
시간은 흐르고… 빈 잔은 점점 쌓여만 간다.
우리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꿈꾼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지 명확히 깨닫는 삶, 하여 웬만한 역경엔 굴하지도 않는 삶을. 그러나 ‘어떻게?’라는 반문에 “삶을 재발견했다”고 답할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1990년대 이후 다양한 방식의 삶 탐구
우리가 바라는 게 그렇게도 거창한 것인가? 누구나 행복을 바라지만 “지금 행복한가?”라는 자문(自問) 앞에선 한없이 초라해진다. 강남 아파트, 조기 유학, 노후 대책을 굳이 말머리에 올리지 않더라도 행복의 가치는 많은 부분, 물질적 요소로 ‘재단’될 뿐이다.
하지만 조금만 눈 돌려보면 다른 삶이 전혀 불가능한 것만도 아니다. 이른바 ‘대안적 삶’이 그것이다. 경쟁과 성취에 매몰된 현시대의 왜곡된 삶의 가치 대신, 밥벌이에서 소외된 자기 자신을 소박한 삶의 주인공으로 탈바꿈시키면서도 내적으로 충만한 삶을 추구하는 행복의 가치 전환이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적 삶’일까. 흔히 대안적 삶은 ‘에코토피아(Ecotopia·생태주의를 뜻하는 그리스어 ‘Ecological’과 이상향을 뜻하는 ‘Utopia’의 합성어로, ‘생태적 이상사회’를 의미)’로 상징되는 생태주의적 삶의 방식과 동일시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이후 다양한 방식의 대안적 삶에 대한 탐구가 시작된 이래, 생태마을이나 생활협동조합 등이 곳곳에 생겨났다. ‘자연이 최고의 교과서’라는 믿음에 근거해서다.
학술적 논의도 활발하다. 2005년 10월 인제대에서 열린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적 삶’이라는 주제의 심포지엄이 그 한 예다. 이 자리에선 돈과 경쟁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벗어나 아름답고 풍요로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보자는 취지에서 자급자족이 가능한 농업 중심의 소공동체, 각자가 지닌 물건·노동력·기술을 교환하자는 지역통화(通貨) 운동 등이 논의됐다. 그러나 대안적 삶을 누리고 싶다고 해서 “자연으로 돌아가라”던 루소의 말을 따라 우리 모두가 ‘귀농(歸農)’이라는 과감한 의식을 치를 수는 없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거니와 바람직하지도 않다. 대안의 선택은 언제나 기존의 것들에 대한 ‘비움’을 전제로 하는 법이다. 상당수 현대인들에겐 도시를 벗어나는 데서 파생될 ‘경제적 퇴행’이 큰 고민거리다.
생태공동체운동센터 이근행 사무국장은 “대안적 삶의 정의를 굳이 생태공동체 활동에 국한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단순히 직업을 바꾸는 정도의 ‘생업 전환’도 대안적 삶이라고 볼 수는 없다”며 “현재의 삶의 틀을 벗어나되 그것이 궁극적으로 자연과 사회, 타인과 지금과는 다른 지속가능한 ‘관계 맺음’을 통해 한 단계 거듭날 수 있어야 대안적 삶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경북대의 일부 교수들은 한때 이 같은 고민을 토론을 통해 풀어나가려 시도하기도 했다. 김영기 교수(철학) 등 경북대 교수 10여 명은 1997년 6월 ‘대안적 삶을 모색하는 모임’(이하 ‘대안 모임’)을 만들어 2005년 2월까지 꾸려왔다. 모임의 취지는 현대문명과 사회 현안들에 대한 대안을 모색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살아보자는 것. 매월 한 번 교수 휴게실에 모여 지방분권, 지방대학의 위기, 인문학의 위기, 한국의 재벌 문제 등 사회 각 분야의 현안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
기득권 포기 ‘경제적 퇴행’ 가장 큰 고민거리
모임의 좌장이던 김 교수는 “대학사회에서 교수들 간 소통이 잘 이뤄지지 않는 현실을 감안, 각자의 ‘정신적 건강성’을 지키기 위해 모임을 만들었으나 결국 일상에 떠밀려 해체한 뒤 ‘경전 읽기’ 모임으로 바뀌었다”며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낸 이정우 교수도 한때 ‘대안 모임’의 회원으로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도입에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한 적이 있다”고 전한다.
과연 대안적 삶을 위한 작은 실천법은 어떠해야 할까.
삶은 ‘생존’의 문제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라고 했다. 그러니 사회운동연구소 정수복 소장이 제시한 ‘새로운 삶을 위한 7가지 제안’을 눈여겨봐도 좋을 듯하다. ▲자기만의 시간 갖기 ▲내면의 평화 만들기 ▲느림의 생활양식 만들기 ▲가난한 삶 선택하기 ▲성찰성과 영성 키우기 ▲녹색 감수성 키우기 ▲보살핌의 윤리 실천하기가 그것이다.
대안적 삶을 위해서는 전향적 결단이 필요하다. 그것은 일견 혁명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대안적 삶을 꿈꾸는 이들에게 ‘경전’으로 통하는 ‘조화로운 삶’의 저자 헬렌 니어링은 말했다. “생각한 대로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지금 당신은 얼마나 행복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