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29

2006.04.04

잠과 꿈, 죽음을 보는 시각의 변천史

이미지로 논술 읽기 ②

  • 이주헌 미술평론가

    입력2006-04-03 11: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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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과 꿈, 죽음을 보는 시각의 변천史

    워터하우스, 잠과 그의 형제 죽음, 1874, 캔버스에 유채, 70x91cm, 개인 소장.

    봄은 꽃과 사랑의 계절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잠의 계절이다. 만물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봄에 피를 가진 동물은 모두 춘곤증에 빠져든다. 미인은 잠꾸러기라더니, 계절의 미인인 봄도 타고난 잠꾸러기인 듯하다.

    잠은 주기적으로 의식을 상실하는 일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의식 상실을 두려워하나 잠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다. 잠을 자고 나면 피로가 없어지고 새로운 활력을 얻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좋은 휴식이 되기에 사람들은 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실 잠자는 동안 낮에 섭취한 음식물이 소화·흡수되고, 어린이는 성장한다. 그만큼 잠은 생산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잠은 특별한 영토를 하나 가지고 있다. 바로 꿈이다. 꿈은 우리의 희로애락에 촉수를 대고 빈번히 현실 너머의 영상과 서사를 풀어 이성과 의식 저편의 세계를 들여다보게 한다. 예술가들이 잠을 창작의 중요한 소재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잠은 오랜 세월 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탐구돼왔다.

    죽음은 잠의 연장 … 영원한 휴식으로 묘사한 작품 많아

    그리스신화에서 잠의 신은 힙노스다. 그의 어머니는 밤의 여신 닉스인데, 그녀가 검은 날개를 활짝 펼치면 세상은 깊은 어둠에 잠긴다. 닉스는 힙노스 외에 아들을 하나 더 두었다. 죽음의 신 타나토스다. 그리스인들은 이처럼 잠과 죽음을 매우 밀접한 것으로 보았다. 19세기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가 그린 ‘잠과 그의 형제 죽음’은 이 두 형제의 특징을 잘 잡아 표현한 그림이다.



    빛을 받아 하얀 피부를 더욱 밝게 드러낸 힙노스는 어두운 피부를 그림자 속에 묻은 형 타나토스와 함께 지금 깊은 잠에 빠져 있다. 힙노스의 품에는 양귀비꽃이 안겨 있다. 이 아편의 재료는 늘 나른한 잠에 빠져 있는 힙노스의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주인 잃은 두 개의 피리는 한창 뛰어놀 나이의 두 소년이 얼마나 맥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는지를 잘 드러내준다.

    힙노스에 대한 이런 이미지에서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잠을 무엇보다 휴식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잠의 형제로 인정된 만큼 죽음 역시 (영원한) 휴식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다. 죽음이 그리스인들에게 꼭 두려움의 대상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죽음을 잠의 연장으로서, 그러니까 영원한 휴식으로서 긍정적으로 바라본 신화 이야기로는 엔디미온 이야기가 있다. 지로데가 그린 ‘엔디미온의 잠’(1793)은 주제를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이다.

    엔디미온은 양치기 일을 하는 미남 청년이었다. 어느 맑고 고운 달밤 세상을 내려다보던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혹은 셀레네)는 이 미남 청년이 자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됐다. 무척이나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에 달의 여신은 깊이 매료되고 말았다. 그래서 잠자는 청년에게로 몰래 내려와 그를 어루만지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아르테미스는 어떤 사악함도 다가오지 못하도록 잠자는 청년 옆에서 그를 지켜주었다.

    잠과 꿈, 죽음을 보는 시각의 변천史

    지로데, 엔디미온의 잠, 1793, 캔버스에 유채, 198x261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지로데의 그림에서 엔디미온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대각선을 그으며 길게 누워 있다. 누드인 그의 몸은 지금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난다. 바로 아르테미스의 사랑이 달빛이 되어 그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야광으로 몽롱하게 빛나는 그의 몸은 무척이나 아름답다. 왼쪽 공중에 떠 있는 소년은 큐피드다. 큐피드는 널리 알려져 있듯 사랑의 신. 그가 등장한 것은 아르테미스의 사랑이 엔디미온에게 미쳤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잠은 휴식이지만, 때로 우리는 잠에서 원초적인 공포를 만난다. 악몽이 그것이다. 악몽은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불안과 공포의 생생한 탈주극이다. 19세기 화가 헨리 퓨젤리는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선보인 화가로 유명하다. 스위스 출신으로 영국에 귀화한 퓨젤리는 셰익스피어와 밀턴·단테·호메로스·중세 전설 등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페스트와 관련된 잔혹한 이야기와 묵시록적인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았다. “예술에서 가장 탐사되지 않은 부분은 꿈”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인간의 내면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지닌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악몽’(1790~91)은 바로 그 미지의 영역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그림 하단에는 여인이 누워 있다. 그녀의 자세는 그리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목은 바닥 쪽으로 젖혀 있고 팔도 뒤로 넘어가 있다. 긴 다리는 화면으로부터 잘리지 않으려는 듯 잔뜩 구부리고 있다. 이렇게 불편한 그녀의 가슴 위에 작은 괴물 하나가 올라앉았다. 영악해 보이는 그 괴물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의 몸을 굽어본다. 우리가 이 여인의 꿈속에 들어가보지 않아도 여인이 지금 얼마나 흉악한 꿈을 꾸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배경에는 한 마리의 백마가 커튼을 헤치며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눈동자가 없는 장님 말이다. 그 인상이나 나부끼는 갈기가 진한 불안감을 조성한다. 여인은 지금 겹겹이 사악한 기운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잠과 꿈, 죽음을 보는 시각의 변천史

    퓨젤리, 악몽, 1790~91, 캔버스에 유채, 76.5x63.5cm, 프랑크푸르트 괴테 박물관.

    잠은 휴식이지만 악몽은 원초적 공포

    이 그림에서처럼 때때로 우리는 악몽을 꾼다. 그러나 우리에게 이런 종류의 공포와 두려움을 주는 존재를 현실에서는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것들은 대부분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가 약해지고 우리의 확신이 무너져내릴 때, 그것들은 감옥에서 풀려나온 사악한 범죄자처럼 우리의 꿈속을, 우리의 무의식 속을 헤집고 다닌다. 퓨젤리의 그림은 결국 우리가 의지와 확신을 잃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로 인해 악몽이 우리 영혼을 낚아채는 상황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것이지만, 특별히 이런 공포를 조장하는 시대가 있다. 퓨젤리는 자신의 시대로부터 이런 징조를 보았고, 그래서 그 전율을 이렇듯 생생히 표현한 것이다.

    화가들의 그림이 시사하듯 꿈은 우리에게 영원한 신비다. 우리는 우리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무의식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진정한 우리 자신의 모습 또한 알지 못한다. 밤은 우리에게 이런 깨달음을 준다. 시간은 단순한 물리적인 흐름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낮과 밤을, 의식과 무의식을, 익숙한 세계와 낯선 세계를 매일매일 오가게 하는 마법의 힘이다. 인생은 이렇듯 낮과 같이 명료하면서도 밤과 같이 불명료하다. 깨어 있을 때처럼 확실하면서 잠들어 있을 때처럼 불확실하다.

    박정하 교수가 제안하는 ‘생각거리’

    ① 옛사람들은 자면서 꿈을 꾸고, 그 꿈의 의미를 해석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를 통해 자신의 현실을 성찰하고 미래를 예측하면서 나아갈 길을 가늠해보고자 했다. 잠은 현실을 넘어서는 계기로서 초월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잠은 주로 건강과 관련해서 의미가 부여된다. 잠은 지속적인 노동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휴식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본주의 체제에 의해 사회적으로 관리되기도 한다. 결국 과거에는 꿈을 꾸기 위해 잠을 잤지만, 오늘날은 다음 날의 일을 위해 자는 셈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잠이 ‘일을 위한 휴식’의미 외에 어떤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②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영원한 휴식으로 보았다고 한다. 그들은 또 죽음을 육체에서 영혼이 해방되는 계기로 보고, 또 다른 의미에서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죽음이 과연 긍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현대사회의 의학 기술은 죽음을 연기시키거나 극복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에 비춰볼 때, 이런 의학 기술을 과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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