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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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뜨락 국화꽃 향기

  • 이태동 / 서강대 영문학 교수·수필가

    입력2003-09-18 18: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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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을 뜨락  국화꽃 향기
    세상에는 삶을 혐오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죽음을 두려워할 만큼 아름다운 현상들이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도 투명한 햇살이 찬란하게 비치는 가을 뜨락에 핀 자줏빛 국화꽃 향기만큼 아름다운 것이 또 있을까. 짙은 국화꽃 향기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지만, 그것은 숨결처럼 호흡하며 느낄 수 있기에 더욱 절실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꽃향기가 얼마나 신비롭고 아름다운지는 봄날에 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라일락과 장미 곁에 가지 않더라도, 5월에 불꽃처럼 타오르는 아카시아 숲과 철길을 따라 피어 있는 가을국화 곁에만 가면 쉽게 느낄 수 있다. 꽃은 왜 향기를 발하는가? 식물학자들은 꽃가루를 옮겨야 하기 때문에 벌과 나비가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같은 향기는 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한테도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베풀어지는 사랑과 우정은 차가운 어둠 속에서도 오래도록 느낄 수 있는 국화꽃 향기만큼이나 향기롭다. 아마도 그것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순수한 사랑의 몸짓에서 나오는 것이리라.

    사람들 사이 사랑과 우정 긴 여운과 큰 감동 남겨

    많은 사람들이 각박한 세상이라 말하지만 나는 그간 짧은 인생을 살아오며 ‘보이지 않는 은혜’를 적지 않게 입은 축복받은 사람인 것 같다. ‘인생은 기억이다’라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을 확인시키듯 소중한 기억은 가끔 산울림처럼 왔다가 사라지곤 하지만, 국화꽃 향기같이 긴 여운을 남기며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몇 해 전 가을 날 오후, 내가 창 밖으로 비치는 햇살 속에 사루비아와 함께 무리 지어 핀 국화꽃을 보고 있을 때 우체부가 등기우편이 왔다며 문을 두드렸다. 그가 전해주고 간 것은 10여년 전 외교관으로 한국에 왔을 때 나와 가까이 지낸 벌리슨씨가 보낸 한 통의 편지였다. 봉투를 뜯어보니 그의 부인 기미가 그만 별세했다는 부음과 그녀가 죽기 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장미꽃 향기의 향수 몇 병을 우리 부부에게 전해주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가 벌리슨씨 부부를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어느 해인가 그가 서울 미국문화원 부원장으로 와 있을 때였다. 우연히도 그가 내 은사의 사촌이어서 우리는 곧 깊은 우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그가 머무는 안국동 미국 외교관 저택을 몇 번인가 방문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의 일본인 부인 기미를 만나게 됐다.

    기미는 외교관 부인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모와는 거리가 먼 노쇠해가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유머러스한 성격이 사람들을 편안하게 했다. 그녀가 보조개가 패이는 독특한 미소를 지으며 일본식 발음으로 영어로 말하는 것이 매력 아닌 매력이었다. 가끔 그녀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외출을 할 때면 기모노를 걸친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했다.

    처음 우리 부부는 기미가 일본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약간의 경계심을 느꼈지만, 그녀는 말할 수 없이 따뜻하게 우리를 대해 주었다. 기미가 우리 곁을 스치고 지나가면 장미꽃 내음이 났다. 어디선가 풍기는 장미꽃 향기가 좋다는 우리의 말에, 그녀는 집을 나서는 우리에게 장미꽃 향기가 담긴 향수 한 병을 선물로 주었다.

    아무리 좋은 향기라도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진한 향수는 역겨울 수 있건만 그 향기는 결코 싫지 않았다. 이렇게 벌리슨씨 부부는 1년 동안 한국에서 우리와 남다른 우정을 나누고 시애틀로 돌아가 은퇴했고, 그 후 1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세월의 흐름이 우리의 우정을 망각 속에 묻어버리려고 할 때 나는 벌리슨씨한테서 기미가 남기고 간 장미꽃 향기의 향수 네 병을 소포로 받았다. 기미는 죽음의 문턱에서 이방인인 우리 부부에게 우정의 장미꽃 향수를 뿌리고 갔다.

    기미는 우리를 떠났고 기미를 잃은 벌리슨씨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그녀가 남긴 장미꽃 향기는 잊혀지지 않는 먼 기억 속에서 불어오는 미풍처럼 우리 곁을 스친다. 기미의 죽음을 생각하다 ‘시들기 때문에 꽃이 향기로운 것’이라는 누군가의 말을 떠올리는 것은 결코 우연만은 아니리라.

    지금은 모든 것이 사라져간 옛일이지만, 이렇게 가을이 찾아와 향기 짙은 국화꽃이 뜨락에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이 모두 아름다운 우정이었다는 것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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