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생긴 외모에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수상한 분위기를 풍기는 배우 백윤식. \'지구를 지켜라\'로 젊은층의 인기를 끌었다.
그를 TV가 아닌 영화에서 처음 본 건, ‘불후의 명작’이었다. 에로 비디오 제작자로 나온 그는, ‘박하사탕’을 패러디한 영화 ‘박아-사랑’을 만들 거라면서 기찻길에서 무릎 꿇고 외치는 설경구의 명장면 ‘나, 다시 돌아갈래’를 흉내 내며 ‘나, 다시 할래’를 소리치는 짧은 신을 연기했다. 카메오 출연 수준이었다. 그러므로 백윤식의 진정한 데뷔작은 다음 작품인 ‘지구를 지켜라’(2002년)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 백윤식의 스크린 데뷔는 아주 오래전에 시작되었다. 그는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1970년 KBS TV 공채 9기로 탤런트 생활을 시작하다가 ‘멋진 사나이들’(1974년), ‘단 둘이서’(1976년)라는 두 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TV에서만 활동했다. 동아흥행에서 만든 ‘멋진 사나이들’에서 백윤식은 공군사관생도 역을 맡았다. 그 2년 뒤 세경흥업에서 찍은 로맨틱 코미디 ‘단 둘이서’에서 그는, 당시 뜨던 여배우 서미경과 공연했다. 그가 20대 시절이던,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이야기다. 그는 최고의 꽃미남이었다. 하지만 1947년생인 그는 이제 환갑이다.
“배우에게는 주민등록증에 적혀 있는 실제 나이보다 화면에 보이는 나이가 더 중요합니다.”
‘싸움의 기술’ 시사회가 끝난 뒤 백윤식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스크린 속에서는 실제 나이를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을 발휘하고 있다. 20대에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30대로 접어들면서 소리 없이 활동을 멈추는 조로 배우들과는 달리,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늦깎이 배우로 주목받는 백윤식은, 한국 영화에 아주 특별한 경험을 부여하고 있다.
늦깎이로 스크린 재도전 ‘성공’
백윤식이 외계인으로 등장하는 영화 ‘지구를 지켜라’
백윤식은 ‘지구를 지켜라’에서 강 사장 역을 맡았다. 마지막 반전이 있기까지 그가 진짜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일 거라고 생각한 관객은 거의 없었다. 충격적인 반전이 시도되자 객석에서는 경악에 가까운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너희들처럼 같은 종을 학대하고, 그걸 즐기는 생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 잘 생각해봐. 너희들은 정상이 아냐!”
김재규 역을 맡은 ‘그때 그 사람들’
장 감독은 ‘지구를 지켜라’를 지지하는 컬트 팬들 때문에 심리적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음 작품을 아직까지도 찍지 못하고 있지만, 백윤식은 ‘지구를 지켜라’를 통해 재발견된 뒤 현재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하는 배우가 되었다. ‘불후의 명작’까지만 해도 흔히 있는 TV 탤런트의 스크린 나들이 정도로 여겼던 많은 관객들은, ‘지구를 지켜라’를 보며 이 범상치 않은 포스를 뿜어내는 배우에 매료당하기 시작했다. 대종상 남우조연상 수상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2003년)에서 백윤식의 연기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꽉 짜여진 플롯과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범죄의 재구성’은 스릴러 영화의 참맛을 전해주었고, 백윤식은 영화라는 매체에 완전히 적응해서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백윤식만이 보여줄 수 있는 진경산수의 연기를 드러냈다. 김 선생 역을 맡은 백윤식은 이 영화로 청룡영화상 남우조연상, 대한민국 영화대상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다양한 싸움의 기술을 보여주는 코미디 ‘싸움의 기술’.
“제목이 싸움의 기술이지만 펼쳐보면 삶의 기술, 인생의 기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인생이라는 삶 자체가 투쟁’이라는 어떤 학자의 말도 생각난다. 내가 인생을 좀 살아봐서 아는데, 인생은 투쟁 그 자체다.”
‘싸움의 기술’ 시사회가 끝난 뒤 백윤식은 푸른빛이 감도는 검정색 벨벳 상의에 초록색 스웨터, 그 안에 셔츠를 받쳐 입고 황금빛 나비넥타이를 매고 등장했다. 그리고 영화 ‘싸움의 기술’에 대해서 위와 같이 설명했다.
숨어 있는 싸움 고수 역 열연
독서실에 방을 얻어 기거하는 정체불명의 중년 남자 오판수, 그가 동네 불량배들을 가볍게 제압하는 모습을 본 공고생 송병태는 그에게 맞지 않는 법, 즉 싸움의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조른다. 하지만 오판수가 송병태를 자신의 문하생으로 받아들여서 가르쳐주는 기술이라는 것은 조잡하기 짝이 없다. 두 손가락으로 상대의 눈을 찌르기, 목을 조이는 상대의 새끼손가락 비틀기, 자신의 멱살을 잡은 상대의 팔을 깍지 낀 손으로 내리치고 상대의 머리를 헤딩으로 박치기하기 등 뒷골목 건달세계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가십성 이야기에 그친다.
‘싸움의 기술’은 코미디다. 이 영화에서 웃음은 전적으로 백윤식에게서 시작되어 백윤식에게서 끝난다. 그렇다고 백윤식이 과장스런 코미디 연기를 하거나 슬랩스틱류의 엎어지고 자빠지는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난 정공법으로 가요. 코믹한 장르라고 해서 코믹한 기교를 쓰지는 않습니다.”
‘싸움의 기술’에서 숨어 있는 고수 오판수는, 그로테스크한 표정과 ‘삑사리’ 날 정도의 이상한 고음과 저음을 오가는 발성법으로 관객들을 휘어잡는다. 백윤식이 아니면 절대 할 수 없는 역할, 그는 그런 역을 골라 작품을 선택하고 있다. 백윤식의 아들 백도빈도 신인배우로 막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머리를 빡빡 깎인 상태에서 팬티 바람에 물파스로 고문받는 ‘지구를 지켜라’의 시나리오를 읽고 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던 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준 이도 아들 백도빈이었다.
형광등 휘두르기, 빨래 짜기 등 다양한 싸움의 기술을 선보인 신한솔 감독의 데뷔작 ‘싸움의 기술’은 영화사의 기대와는 달리 18세 이상 등급을 받았다가 재심 끝에 15세 이상을 받아 개봉된다. 분명한 것은 영화적 완성도와는 별도로 백윤식의 뛰어난 연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무심하게 한 마디 던지며 우리를 사로잡는 촌철살인의 연기가 또다시 장안의 화젯거리로 등장할 것이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