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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性폭력… 세상은 너무 무서웠다

가출 청소년 28.1% 강간 피해, 43.4% 성매매 제안 받아 … 피해 당해도 대응 못해 60.8%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입력2006-01-04 13: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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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性폭력… 세상은 너무 무서웠다
    지난 3년은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02년 초 술 취한 친오빠한테 성폭행을 당했다. 그 충격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무작정 집을 나온 뒤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 친구네 집에서 한 달 이상 머물자 눈치가 보여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주유소에서 시간당 1500원을 받고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런데 평소 잘해주던 직원들도 내가 가출했다는 것을 알자 태도가 달라졌다. 술을 권하는가 하면 은근슬쩍 몸을 더듬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던 20대 중반의 직원이 밤에 내 방으로 들이닥쳤다. 친오빠가 떠오른 난 몸서리치며 거부했지만 그는 ‘사랑한다’며 내 몸을 겁탈했다.”(가출 후 성폭행 및 성매매를 경험하고 현재 쉼터에서 치료받고 있는 19세 여성 A 양)

    가출 후 지내는 곳에서 발생

    가출 청소년의 28.1%가 강간을 당한 적이 있고, 43.4%가 성매매 제안을 받은 적이 있는 등 가출 청소년의 성 피해에 대한 노출 정도가 심각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가 2005년 5월부터 11월까지 전국 13~20세 가출 청소년 442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가출 청소년의 61.8%인 273명이 강간을 포함해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조사에서 성폭력은 성적인 농담에서부터 성기노출, 강제추행, 강간까지 포함한다. 특히 여성 청소년의 경우 70.6%가 성폭력 피해를 경험한 것으로 조사돼 그 정도가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강간 피해를 당한 청소년은 전체의 28.1%인 124명으로 조사됐다. 가해자는 친구나 선후배가 46.4%로 가장 많았고, 채팅이나 부킹·거리에서 만난 사람(37.9%), 가출 후 용돈이나 잠자리 등 도움을 주겠다며 접근한 사람(16.1%) 순으로 나타났다. 청소년들이 가출 후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상황에서 성폭력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강간을 당한 장소는 가해자의 집(36.3%), 여관(33.1%), 자취방(25.8%), 친구집(16.9%) 등으로 조사됐다. 주로 청소년들이 가출 후 지내는 곳에서 강간을 비롯한 성폭력 피해가 발생했는데, 이는 ‘쉼터’나 ‘드롭인센터’같이 성적 위험으로부터 청소년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거의 마련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성폭행을 당한 뒤 그 남자와 나는 ‘연인’이 됐다. 불편했던 주유소 단칸방에서 나와 그 남자의 집으로 들어갔다. 처음엔 나름대로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주사가 심했던 남자는 내게 강제로 술을 권했고 수시로 때렸다. 결국 난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왔고 이후 찜질방과 PC방을 전전했다. 당장 돈이 급했다. 그러다 PC방에서 메신저와 채팅방을 자주 드나들게 됐다. ‘ㅈㄱ’이라는 쪽지가 여기저기서 날아들었다. ‘조건만남’, 일종의 성매매 제안이었다. 30만원이나 준다고 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性폭력… 세상은 너무 무서웠다

    생활비를 마련해야 하는 가출 청소년에게 성매매는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또 가출 청소년들은 성폭력뿐 아니라 성매매 유혹에도 무방비로 노출돼 있었다. 가출 청소년의 43.4%가 성매매 제안을 받은 적이 있으며, 특히 성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237명 중 35.2%는 실제로 성매매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강간 피해를 경험한 집단(152명)의 61.8%가 성매매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피해 경험이 없는 경우 9%만이 성매매를 해본 것으로 응답했다. 이는 성폭력 피해 경험의 후유증으로 성매매를 하게 되는 것과 성매매 과정에서 강간 등 성폭력 피해가 자주 일어난다는 것 두 가지로 해석된다.

    또 대다수 청소년들은 인터넷 등을 통해 개인적으로 성매매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인터넷 등을 통한 비고용형(개인형) 성매매(20.8%)가 티켓다방 등의 고용형 성매매(7.0%)에 비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성매매 동기(복수응답)로는 ‘가출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52.3%), ‘가출 후 살 곳을 마련해준 사람이 원해서(48.6%), ‘가출 후 용돈을 준 사람이 원해서’(37.6%), ‘친구가 권해서’(22.0%) 순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생활비나 잘 곳을 마련하기 위해 가출 청소년들이 자신의 몸을 거래 수단으로 이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가출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라고 응답한 청소년이 13~15세, 16~18세, 19세 이상의 연령대에서 각각 42.1%, 50.8%, 62.1%로 나타나 연령이 높을수록 더욱 성매매를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수단으로 인식하고 있음이 드러났다.

    “30만원을 준다고 했던 남자는 달랑 10만원만 던져주고 가버렸다. 그러면서 요구는 무척 많았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 남자는 양반이었다. 그 이후로 채팅방에서 수시로 남자를 구했고 성을 팔며 하루하루 살아갔다. 남자들한테 폭행을 당한 적도 많았고 항문 섹스를 요구하거나 2대 1 섹스를 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할 때는 하루에 3건 이상씩 한 적도 있다. 임신도 했다. 다행히 꽤 지속적인 관계를 가졌던 남자의 아이였는데, 낙태 비용을 내줬다. 성병은 달고 살았던 것 같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심각

    가출 청소년이 성매매 과정에서 입은 피해 내용을 조사한 결과(복수응답) ‘원치 않는 성행위나 성관계 강요’가 82.6%로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했다. 즉 성매매 과정에서 심각한 성폭력 피해를 입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다음으로 ‘술을 자주 마시고 폭음하게 됨’이 45.0%, 성매수자로부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거나 협박과 위협을 당했다는 응답이 각각 35.8%, 27.5%로 나타났다. 또 성매매 과정에서 폭행을 당하거나(29.4%), 성병에 감염되거나(25.7%), 임신·낙태(24.8%) 등을 경험하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성폭력 피해나 성매매 경험이 있는 경우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도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외상 스트레스 장애는 심한 감정적 스트레스를 주는 사건을 경험했을 때 나타나는 불안장애를 말한다. 강간의 경우 심각도가 43.18, 성매매의 경우 41.31로 나타나 걸프전 참전 군인의 심각도(34.8), 아동기 성적 학대를 가진 성인 여성의 심각도(30.6)보다도 높은 수치다.

    (사)청소년을 위한 내일여성센터의 선영선 연구원은 “성폭력을 경험한 청소년들이 피해를 당한 뒤에도 44.0%는 아무에게도 상의하지 않았고, 60.8%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고 응답해 성폭력 자체가 사회로부터 침묵을 강요받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며 “가출 청소년에 대한 사회적 보호와 관심은 물론 성에 개방적인 청소년의 특성을 반영한 현실적인 교육 및 상담 프로그램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알코올의존증이라고 할 만큼 매일 매일 술을 마셨고, 하루에도 몇 번씩 성관계를 하다 보니 몸 상태는 엉망이 됐다. 미쳐서 스스로 팔에 상처를 낸 적도 있다. 그러다 청소년 종합지원센터를 알게 돼 상담을 받았다. 너무나도 인상 좋게 생긴 상담원 아줌마가 현실을 모르는 듯한 이야기를 하니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그래도 나를 진심으로 위해준다는 것은 느껴졌다. 그래서 쉼터에 들어갔고 지금까지 심리상담 등 치료를 받고 있다. 다행히 성병은 다 나았고 술 없이도 살아갈 수 있게 됐다. 대입 검정고시까지 합격했고 현재 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오빠는 보기 싫지만 엄마는 보고 싶다. 아무리 힘들어도 집을 나오는 건 아니었다. 우리에게 세상은 너무도 무서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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