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현의 영정이 봉안된 영당.
염수재(念修齋). 직역하자면 생각을 닦는 집이다. 마음을 닦는다(修心)는 말은 많이 들어봤지만 생각을 닦는다는 말은 처음이다. 이제현은 문장의 종조답게 다시(茶詩)를 많이 남겼다. 그의 다시 중 가장 애송되는 것은 이렇다.
주린 창자는 술 끊으니 메스꺼워지려 하고/ 늙은 눈으로 책 보니 안개가 낀 듯하네/ 누가 두 병을 말끔히 물리치게 할까/ 나는 본디 약을 얻어올 데가 있다네/ 동암은 옛날에 녹야의 벗이었고/ 혜감은 조계산의 주지 되어 갔네/ 빼어난 차 보내오고 아름다운 서찰 보내오면/ 긴 시로 보답하고 깊이 사모했네/ 두 늙은이의 풍류는 유불의 으뜸이고/ 백년의 생사가 오직 아침저녁 같구나.(하략)
차를 보내준 송광(松廣) 화상에게 답례하는 형식의 이 시에 동암(東菴, 이제현의 부친)이 나오는 것을 보면, 부자에 걸쳐 송광사 선사들에게서 차를 선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두 늙은이의 풍류는 유불의 으뜸이고’의 구절은 당시 선비들이 누리는 최고의 풍류는 차 살림이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뛰어난 문장 실력 원나라와 외교 분쟁 해결사
이제현의 처음 이름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서 장원하고 15세에 병과를 급제한 뒤 과거를 감독하던 권보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하급 관리인 판관 및 녹사를 거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되어 관료로서 폭넓은 경험을 쌓는다. 이후 외직인 서해도안렴사로 나갔다가 28세 때 상왕인 충선왕의 명을 받아 원나라 수도 연경으로 간다. 충선왕은 연경에 머물면서 만권당(萬卷堂)을 짓고 원나라 선비들을 출입하게 했던 바, 이제현은 자연스럽게 학사 원맹선, 글씨로 유명한 조맹부 등과 교유할 수 있었다. 차 살림이 이때 깊어졌을 것이고 견문도 키워졌다. 충선왕을 따라 중국 쓰촨(四川)성 서남쪽의 어메이 산(峨眉山)과 저장 성의 푸퉈 산(普陀山)을, 충선왕이 간쑤 성으로 유배를 가자 거기까지 다녀왔다. 충선왕의 유배로 이제현은 귀국했다가 37세 때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省)으로 만들려는 이른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나자 다시 원나라로 들어가 상소를 올려 철회시킨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집사합하(執事閤下)께서는 여러 황제가 우리나라의 공로를 생각한 도리를 본받으시고, 세상을 훈계한 중용(中庸)의 말을 명심하시어 그 나라는 그 나라에 맡기시고 그 나라의 백성을 백성끼리 살게 하십시오.’
이처럼 완곡하게 시작하는 이제현의 상소는 원나라 중서도당(中書都堂) 관리들을 감동시켜 결국 입성책동을 중지시킨다. 과거를 주재하는 책임자를 지공거(知貢擧)라 하는데, 이제현이 급제시켜 뽑은 인재 중에는 이색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원나라를 멀리하고 명나라를 가까이하자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으로서 수습에 나서지만 여의치 못해 관직에서 물러나 초야에서 차 살림을 즐긴다. 앞의 다시 중에서 생략된 한 부분인데 차 살림의 안목(眼目)이라고 할까, 한 잔의 차에 자족하는 삶이 생생하다.
향 맑으매 일찍이 적화(摘火) 전의 봄에 딴 잎이라네/ 부드러운 빛깔은 아직 숲 아래 이슬을 머금은 듯/ 돌솥에 우우 솔바람 소리 울리고/ 오지사발에서는 어지러이 맴돌아 젖빛 거품을 토하네.
차가 떨어져가는 한겨울에 다시를 음미하자니 차 생각이 더욱 간절해진다. 특히 이제현의 다시는 봄날 곡우 전후의 맑은 차를 그립게 만든다.
☞ 가는 길
충북 보은에서 상주로 가는 25번 도로를 8km쯤 달리면 502번 지방도로가 나온다. 거기서 우회전하면 보덕초등학교가 나오고 3분 정도 직진하면 이제현 영당이 있는 탄부면 하장리 마을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