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단에서 그러더군요. 최선과 차선 후보가 모두 고사해 저한테 기회가 온 거라고요. 그래서 주변에도 ‘차차선 총장’이라고 말하고 다닙니다.” 너털웃음이 섞인 가벼운 농담이지만 뒤끝이 살짝 남는다. 지난 2월27일 재단이사회에서 신임 총장으로 선출된 숭실대학교 이중 총장(66). 엄청난 비전과 리더십으로 학교를 ‘장악’하기보다 그간의 갈등을 ‘치유’하는 역할에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는 그의 취임 소감에는 지난 1년여 동안 계속된 학내 분규에 대한 부담감이 묻어나왔다.
그동안 숭실대는 2000년 12월 어윤배 전 총장에 대한 재단의 재신임과 함께 시작된 분규에 시달려왔다. 이 분규는 교수들의 보직 거부와 교직원 파업, 무기한 단식농성으로 이어지다 지난 2월28일 재단이 어 전 총장의 사표를 수리함에 따라 최종 마무리된 상태.
이총장은 지난 54년, 평양을 떠나 막 서울에 재개교한 숭실대에 처음으로 입학한 ‘재건 동문 1기’다. “학교 다닐 때는 총장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요. 근 반세기 만에 학교에 돌아오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한국조폐공사 이사와 경남신문 발행인 등을 역임한 그는 80년대 후반 한국정보문화센터 사무총장을 지내며 아직 초기 단계였던 정보기술(IT) 산업의 태동을 지켜보았다.
이후 97년부터는 조선족 동포들의 교육을 위해 중국에 설립된 옌볜과학기술대에서 교수 및 부총장으로 일해 왔다. 그러던 중 지난 2월 모교의 청을 받고 급히 귀국한 것.
“인재 개발에 매진하는 오늘의 중국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IT와 중국에 대한 식견이 ‘디지털 브레인’을 표방하는 학교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이총장은 한국 유학을 원하는 중국 청년들을 적극 유치해 ‘한국을 이해하는 차세대 중국의 리더들’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총장이 된 것보다 이게 훨씬 더 기뻐요.” 농담과 함께 꺼내든 것은 지난 1월에 출간했다는 자신의 저서 ‘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 소년 시절부터 품고 있던 중국 현대사에 대한 갈증을 옌볜에서 지내는 동안 풀어내며 쓴 책이라는 설명이다.
“문화혁명이라는 격변을 거치면서 중국 사회는 극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목숨 걸고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 사람들이 다시 목숨 걸고 서로 이념 다툼을 벌였지요.” 그러나 갈등의 시기가 지난 후에는 모두 함께 살아남는 법을 찾아냈다고 이총장은 말한다. “중국 화폐에는 아직도 마오쩌둥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반대파가 정권을 잡았지만 ‘말소’ 대신 ‘공존’을 택한 거지요. 저는 우리 학교도 같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1년 남짓의 다툼이 뭐 그리 큰일이겠습니까.”
반목과 갈등으로 얼룩진 학교를 ‘정보과학 분야의 한국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 받던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임무를 띠고 긴급투입된 ‘구원 투수’. 이총장은 자신의 역할을 그렇게 설명했다. “지켜봐 주십시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테니까요.”
그동안 숭실대는 2000년 12월 어윤배 전 총장에 대한 재단의 재신임과 함께 시작된 분규에 시달려왔다. 이 분규는 교수들의 보직 거부와 교직원 파업, 무기한 단식농성으로 이어지다 지난 2월28일 재단이 어 전 총장의 사표를 수리함에 따라 최종 마무리된 상태.
이총장은 지난 54년, 평양을 떠나 막 서울에 재개교한 숭실대에 처음으로 입학한 ‘재건 동문 1기’다. “학교 다닐 때는 총장이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지요. 근 반세기 만에 학교에 돌아오니 기분이 묘하더군요.” 한국조폐공사 이사와 경남신문 발행인 등을 역임한 그는 80년대 후반 한국정보문화센터 사무총장을 지내며 아직 초기 단계였던 정보기술(IT) 산업의 태동을 지켜보았다.
이후 97년부터는 조선족 동포들의 교육을 위해 중국에 설립된 옌볜과학기술대에서 교수 및 부총장으로 일해 왔다. 그러던 중 지난 2월 모교의 청을 받고 급히 귀국한 것.
“인재 개발에 매진하는 오늘의 중국을 보며 느낀 점이 많았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IT와 중국에 대한 식견이 ‘디지털 브레인’을 표방하는 학교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이총장은 한국 유학을 원하는 중국 청년들을 적극 유치해 ‘한국을 이해하는 차세대 중국의 리더들’로 만들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총장이 된 것보다 이게 훨씬 더 기뻐요.” 농담과 함께 꺼내든 것은 지난 1월에 출간했다는 자신의 저서 ‘모택동과 중국을 이야기하다’. 소년 시절부터 품고 있던 중국 현대사에 대한 갈증을 옌볜에서 지내는 동안 풀어내며 쓴 책이라는 설명이다.
“문화혁명이라는 격변을 거치면서 중국 사회는 극심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목숨 걸고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이룬 사람들이 다시 목숨 걸고 서로 이념 다툼을 벌였지요.” 그러나 갈등의 시기가 지난 후에는 모두 함께 살아남는 법을 찾아냈다고 이총장은 말한다. “중국 화폐에는 아직도 마오쩌둥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반대파가 정권을 잡았지만 ‘말소’ 대신 ‘공존’을 택한 거지요. 저는 우리 학교도 같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1년 남짓의 다툼이 뭐 그리 큰일이겠습니까.”
반목과 갈등으로 얼룩진 학교를 ‘정보과학 분야의 한국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 받던 제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임무를 띠고 긴급투입된 ‘구원 투수’. 이총장은 자신의 역할을 그렇게 설명했다. “지켜봐 주십시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