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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86세대 직장인과 나눈 대화다. 박정운 박준하 김민우, 이 이름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오늘 같은 밤이면’ ‘사랑일 뿐야’ ‘너를 처음 만난 그때’ 같은 노래들은 30대의 애창곡으로 변함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얼마나 그댈 그리워하는지 몰라~’ 하는 가사가 흐르면 저절로 입술이 움직인다. 그런데 이 감미로운 노래로 90년대 초 TV 화면을 주름잡던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박정운 박준하 김민우 세 사람이 프로젝트 음반 ‘기억.. 우리가 머문 시간들’을 내고 전국 순회공연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맨 먼저 든 생각은 ‘반갑다’는 것이었다. 순회공연의 첫 순서로 3월26일부터 31일까지 서울 연강홀에서 이들의 공연이 열렸다. 염치 불구하고 공연 전의 대기실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 정말 세 사람이 있었다.
자신의 입영을 앞두고 눈물범벅이 되어 ‘입영열차 안에서’를 부르던 ‘미소년’ 김민우는 벌써 서른을 넘긴 나이가 되어 있었고 매끈한 이미지와 거리가 멀던 박준하는 여전히 꾸밈없는 텁텁한 얼굴이었다. 그리고 짧은 머리에 선글라스가 세련되게 어울리던 박정운은 ‘오늘 같은 밤이면’을 부를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음악을 떠나지는 않았어요. 아직도 해야 할 음악이 있다는 꿈이 있거든요. 그동안 음반 내려고 녹음을 계속했지만 회사가 부도나거나 녹음실에 불이 나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어요.”(김민우) “후배들 음반 제작하고, 망하고,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갔죠. 이번에 세 사람의 프로젝트 음반과 함께 제7집 앨범도 나와요. 어느 정도 나이가 드니까 이제 크게 히트할 수 있는 노래보다는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노래가 제 몫이라는 생각이 들어요.”(박정운)
세 사람은 지난해 ‘회귀’(回歸)라는 제목의 콘서트로 처음 모였다. ‘그 아픔까지 사랑한 거야’의 조정현까지 네 사람이 연 ‘회귀’ 콘서트는 놀랍게도 19회 전회가 매진되었다. 자연스레 지방 공연이 이어졌고 아예 앨범을 제작하자는 말도 나왔다. 독집 작업 때문에 조정현이 빠지고 나머지 세 사람이 프로젝트 앨범 ‘기억.. 우리가 머문 시간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서울을 시작으로 가을까지 전국 15개 도시를 도는 마라톤 콘서트 ‘신발(新發)-처음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돌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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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하며 댄스 음악 위주로 가요계 풍토가 바뀌자 발라드 가수들은 삽시간에 설 자리를 잃었다. 가수보다 만능 연예인이 더 환영받는 풍토에서 이들 역시 토크쇼나 오락 프로그램의 출연 제의를 간간히 받았다. 그러나 가수 외의 일은 하지 않겠다는 고집을 내세우자 이내 방송은 이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가요계는 30대만 되면 뒤로 물러나야 하는 상황이에요. 어떤 일이나 마찬가지지만 가수도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좀더 완숙한 노래로 만들 수 있는 건데 그런 노래를 발표할 수가 없어요. 20대 가수가 대중의 스타가 되는 건 좋지만 그들이 30, 40대가 되어서도 설 공간이 있었으면 해요.”(박준하)
“음악적 요소와 엔터테이너적 면모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요. 다방면에 소질 있는 사람이 진짜 연예인일 텐데, 솔직히 그런 부분에는 자신이 없어요.”(박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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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의 화려한 조명은 이미 이들을 비껴갔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난해의 ‘회귀’ 공연이 시발점이 되어 유익종 박강성 신효범 등 30, 40대 가수들의 콘서트가 활발히 열리기 시작했다. 무대를 갈망하고 있던 가수들이 무대에 다시 서고, 또 그들의 노래를 그리워하던 팬들이 공연장에 찾아드는 이 풍토는 현란한 춤과 공허한 랩이 가수의 전부인 양 착각하고 있는 가요계의 분위기에 분명 하나의 경종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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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마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연강홀 로비에서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로비에는 꽃다발을 든 30대 여성들의 모습이 간간이 보였다. 그날따라 도심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져 교통체증이 엄청났다. 이런 날에 사람들이 공연장을 찾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다.
어느새 객석은 가득 차고 무대에 조명이 들어왔다. 박정운 박준하 김민우 세 사람이 동시에 등장해 “너는 언제나 나에게 휴식이 되어준 친구였어” 하고 ‘휴식 같은 친구’의 첫 소절을 힘차게 불렀다. 그 순간 객석의 30대 ‘중년’들은 열화 같은 함성을 지르며 다 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함께 손을 흔들며 기자는 10년 전 느꼈던 생생한 흥분과 벅찬 행복감을 고스란히 되찾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