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26

..

“캠베이 유적은 세계 最古 도시”

기원전 7500년경 조성 인도 학계 흥분 … 탄소 연대 측정 맞다면 인류문명사 다시 써야 할 판

  • < 이지은/ 델리 통신원 > jieunlee333@hotmail.com

    입력2004-10-20 17:0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캠베이 유적은 세계 最古 도시”
    인류의 문명사는 다시 쓰여야 하는가? 최근 인도 캠베이만(灣)에서 발견된 해저 도시 유적과 유물을 조사하고 있는 인도 고고학계에 따르면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번에 인양된 유물 중 일부를 연구기관에 의뢰해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을 한 결과 나뭇조각 화석의 연대가 기원전 7500년경으로 측정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도시문명은 기원전 4000~3500년경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었다. 기원전 7000년경 것으로 추정되는 문명의 흔적으로 현재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는 예리코(구약성서의 ‘여리고’)에 요새화된 주거지가 있지만 이것은 진정한 도시문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현재의 파키스탄에 있는 메르가르에서도 기원전 7500년경의 대형 집단 주거지가 발견되었으나, 이는 농경민들의 주거지로 역시 도시문명은 아니다. 만약 기원전 7500년이라는 연대 측정이 맞다면 캠베이만 유적은 세계 최초의 도시문명이 될 것이며, 인류의 도시문명사는 3500년 이상 앞당겨질 것이다.

    이번 발견은 지극히 우연한 계기로 시작됐다. 지난해 상반기에 인도 국립 해양기술원은 근해의 해양오염도를 연구하기 위해 캠베이만 연안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팀은 해양오염 조사에서 늘 하게 마련인 수중 음파탐지기로 해저 촬영을 실시했는데, 사진 분석 결과 인공물인 것으로 보이는 직사각형 구조물들이 발견된 것이다. 이 놀라운 분석 결과에 해양기술원은 해양 고고학자인 라오 박사에게 의뢰해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캠베이 유적은 세계 最古 도시”

    켐베이 도시 복원도<br>①은 도로, ②는 주거지역, ③은 댐시설, ④는 광장이다. 이 복원도는 인더스 문명의 고대 도시인 하라파의 유적과 흡사하다.

    해저 유적지가 발견된 곳은 인도 구자라트주(州) 캠베이만 해안에서 30km 가량 떨어진 수심 30~40m 지역이다. 고대 도시의 유적은 약 9km에 걸쳐 강가에 펼쳐져 있으며, 강으로 추정되는 곳에는 돌로 된 댐의 흔적까지 보이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또한 이 도시는 국제규격의 수영장 크기 목욕장(으로 추정되는 건조물)과 길이 200m, 넓이 45m 규모의 좌대(座臺)도 갖추고 있어 본격적인 거대도시로서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이 대형 건조물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주거지로 추정되는 직사각형의 지하실들이 밀집된 지역이 있으며, 하수도 시설과 도로 시설의 흔적도 남아 있다. 이 고대 도시가 언제 바다 밑에 잠겼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규모 지각변동이 그 원인일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와 함께 해양기술원 연구팀은 인근 해저를 뒤져 2000점이 넘는 유물을 인양했다. 인양물에는 연마된 석기, 부서진 도기 조각, 장신구와 작은 조각품들, 상아와 보석, 인간의 척추와 턱뼈 화석, 치아 등과 함께 문제의 나무 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캠베이 고대 도시인들이 신석기와 도자기를 사용했다는 것이 이로써 확실해진 셈이다. 전체 문명사의 흐름으로 보아도 기원전 7500년부터 5000년경까지는 신석기가 발달하고 쟁기를 사용해 농경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던 시기다. 이러한 농업혁명은 농업 생산의 잉여를 낳아 대규모의 도시생활을 가능케 했을 것이다.



    인도의 고고학자들, 특히 민족주의 계열의 학자들이 주목하는 부분은 캠베이 유적이 기존의 인더스강 문명의 고대 도시인 하라파, 모헨조다로 유적지와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는 점이다. 캠베이 유적지에 나타나는 대규모 목욕장과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를 연상시키는 대형 좌대, 하수도와 도로가 잘 정비된 주거지역은 인더스 문명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에 전성기를 맞았기 때문에 캠베이 유적과는 수천년의 연대차가 있지만, 이번 발견을 인더스 문명과 연관시키려는 시도도 있다. 인도 고고학 연구원 전임 원장인 자라트 조시 박사는 “농경 집단이었던 고대 인도인들이 어떻게 하라파나 모헨조다로 같은 고도의 도시문화를 발달시킬 수 있었는지 그 중간 단계를 보여주며, 인도 문명의 연결고리를 제공한다”고 이번 발견의 의의를 설명하기도 했다. 이는 캠베이와 인더스 문명을 동일선상에 놓고 보는 시각이지만 두 지역이 동일 문명권에 속한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대형 농경 주거지를 이루었던 메르가르와 캠베이를 연결시켜 신석기 시대의 거대 문명권으로 보려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기원전 7500년이라는 연대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재고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나무 화석을 두 군데 연구기관에서 연대를 측정했는데, 비르발 샤니 고식물 연구소의 측정 결과는 기원전 6148~5678년이었고, 인도 국립 지구물리학 연구소의 결과는 기원전 7908~7328년이었다. 두 연구소의 결과에서도 2000년 가까운 시간차가 난다.

    “캠베이 유적은 세계 最古 도시”
    좀더 중요한 문제는 이 나무 화석이 과연 도시 유적과 관계가 있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유적이 발견된 캠베이만 근처는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물살이 센 곳이어서 이 나무 화석이 서아시아(중동) 지방으로부터 바다를 통해 밀려왔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그레고리 파실 교수(고고학)도 캠베이만의 급격한 조수 운동을 지적하며 문제의 나무 화석과 해저 도시 유적 간의 연관성에는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 제기에 대해 이번 발굴팀을 이끈 카티롤리씨는 좀더 많은 인양물을 연구기관으로 보내 연대 측정을 실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해저 유적의 발견에 대해 하버드 대학의 리처드 메도 교수는 “그 자체로 국제적 조사단을 구성해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조사가 맹목적인 ‘연대 올리기’와 ‘인도 문명, 역사의 미화’ 경향을 보이는 데 우려를 나타내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인도 델리 대학의 나야니트 라히리 교수(고고학)를 비롯한 좌파계열 학자들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정확하고 신빙성 있는 유적의 연대 측정과 함께 고고학계의 눈앞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는 것이다.

    캠베이의 유적을 이룬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그들은 인도의 원주민이었을까? 아니면 서아시아로부터 어떤 경로를 통해 인도로 들어온 외래인들이었을까? 또 그들이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경생활로 전환한 것은 언제쯤이었을까? 농경생활을 시작한 후 언제쯤 충분한 잉여를 산출해 도시 정착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을까? 캠베이 유적의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할 수 있게 된다면 이번 발견은 21세기의 시작과 함께 인류사를 다시 쓰는 계기가 될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