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01

2009.09.01

한국 위상 높인 브랜드 파워 대통령

보수기득권 카르텔 흔들었지만 분열의 정치구조 벽 못 넘어

  • 김만흠 한국정치아카데미 원장·정치학 박사

    입력2009-08-28 10: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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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격동의 한국 현대정치사에서 고난과 성공의 표상이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난을 감내하며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를 이끌었고, 끝내 대통령에 당선돼 민주화 세력이 주도하는 정권교체를 이뤄냈다. 민주주의, 인권, 평화는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정치’와 더불어 그의 정치철학에 담긴 중심 가치였고, 이를 실천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국제사회의 평판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국의 위상을 높인, 최고의 브랜드 파워를 떨친 대통령이었다.

    파란의 현대정치사, 고난과 민주화의 상징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제1야당인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면서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세력의 구심점으로 떠올랐다. 집권 여당의 박정희 후보와 박빙의 승부 끝에 낙선했지만 사실상의 승리였다. “이번에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한다면, 박정희 정권이 총통제의 영구집권체제로 갈 것”이라던 그의 경고는 1년 뒤인 1972년 유신체제로 현실화됐다.

    그는 유신체제와 전두환 정권으로 이어지는 독재정권 시기에 현해탄 수장 위기, 사형선고라는 고난과 망명 생활을 감내하며 저항했다. 그러면서 독재권력에 대한 저항과 한국정치 민주화의 상징적인 인물이 됐다.

    죽음을 넘나드는 고난과 영욕의 정치 역정은 그를 비범한 사람, 카리스마 강한 지도자로 만들었다. 물론 민주화 이후 김 전 대통령의 카리스마적 요소는 조금씩 약화됐다. 신비화했던 지도자도 오랜 기간 그 자리에 있다 보면 권력을 둘러싼 한계와 보통사람으로서의 속성을 보이며 세속적으로 인식되게 마련이다. 이런 카리스마의 일상화에 따른 약화는 김 전 대통령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에서 호남은 뗄 수 없는 요소였다. 1971년 대통령 후보가 된 이래 그의 정치적 기반에는 호남이 있었다. 근대 이전의 역사에서도 정치적 주변부에 머물렀던 호남은 보통선거에 토대를 둔 근대민주주의 체제로 접어들면서 인구비에 따른 잠재적인 경쟁력을 갖게 됐다. ‘호남 출신 김대중’의 등장과 이후의 고난 속에서 호남인들은 그를 운명공동체적 관계로 마주하게 된다.

    물론 김 전 대통령에게는 호남뿐 아니라 민주화 세력, 개혁 세력도 든든한 지지기반이었다. 그런데 그의 정치적 기반을 유독 지역적 범주로 만든 것은 1971년 선거 이래 권위주의 정권의 집권전략이었다. 그리고 한국 사회에 내재한 호남 편견의 지역감정도 한몫했다. 호남에 대한 편견과 김 전 대통령에 대한 편견은 상호작용을 했다.

    지역적 유대감을 역사의식에 토대를 둔 운명공동체적 관계로 강화한 것은 1980년 광주에서 터진 5·18민주화운동의 비극적 경험이었다. 호남과 그의 유대감은 연속된 대선 도전 실패와 정계은퇴 선언을 극복하고 끝내 대통령에 당선, 정권교체를 이루는 힘이 됐다.

    물론 이 유대감은 대통령 당선이라는 기대가 달성되면서 조금씩 해소됐다. 그런 가운데서도 민주화 세력에 대한 호남의 유대감은 노무현 정부의 집권으로까지 이어졌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정치를 겪으면서 이제 호남은 김 전 대통령 개인에 대한 유대감 차원의 지지를 넘어 민주화 세력, 진보이념의 핵심 기반으로 구조화됐다.

    김 전 대통령은 민주화 이념을 인권, 복지, 평화의 개념으로 확장시키면서 진보적 노선을 걸었다. 권위주의 세력과 반대 진영에서는 그를 좌파 또는 친북 노선의 ‘빨갱이’로 몰아 공격하기도 했다. 이념 노선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인지라, 소수 진보정당이나 급진세력은 김 전 대통령을 오히려 보수 중도로 규정하면서 차별화했다.

    인권, 복지, 평화의 진보 노선 실천

    한국 위상 높인 브랜드 파워 대통령

    김 전 대통령은 1997년 11월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DJP 연합’을 통해 대권 도전 4수에 성공했다.

    그가 처음 대통령 후보로 나선 1971년 대선에서도 ‘예비군제 폐지’ ‘대중경제’ ‘남북한 비정치분야 교류’ 같은 진보적 정책 공약을 제시했다. 최근 김 전 대통령과 야당이 ‘3대 위기’로 제기한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에 관한 입장을 이미 그때부터 견지하고 있었다. 또 인권과 평화를 강조하는 그의 노선은 이후 민주화 투쟁의 고난 속에서 체화하며 철학이 됐다.

    그의 정치노선은 집권 이후 정책으로 반영돼 나타났다. 외환위기라는 경제적, 사회적 혼돈 속에서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에 이어 ‘생산적 복지’를 국정 방향으로 제시했다. 의료보험 통합체제로의 전환,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공적 연금의 전 국민 적용 등과 같은 정책은 한국 사회복지 체계의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인권을 중시하는 그의 노선은 독재정권 시기에 불거진 사건들의 재규명, 여성·장애인 등 약자를 배려하는 정책, 국가권력의 남용 감시,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운용 등으로 이어졌다. 유감스럽게도 이명박 정부 들어 국가인권위원회의 국내외 위상이 추락하는 등 진보적 관점의 인권 의식은 뒷전에 밀리고 있다.

    햇볕정책으로 불린 대북 포용정책은 김 전 대통령의 대표적 브랜드였다. 대북 포용정책과 평화노선을 토대로 그는 2000년 6월13~15일 평양에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을 하는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에 따라 남북 화해와 협력 관계가 급속히 확장됐다. 김대중 정부 출범 초였던 1998년 6월 당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이른바 ‘소떼 방북’으로 시작된 대북 협력사업은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사업으로까지 확대됐다.

    햇볕정책의 성과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시각도 많다. 북한에 대한 시각이나 전략에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김 전 대통령의 햇볕정책은 국제적으로도 공인받은 평화적 대북전략이었다. 김 전 대통령의 집권은 그 자신의 정치적 성공이기도 했지만 한국의 정치와 권력구조에 중요한 전환기를 만들었다. 정치적 기반, 노선과 정책에서 기존의 흐름과 달랐던 그의 집권은 한국 사회의 정치적 기득권 구조를 흔드는 것이었다.

    이른바 보수기득권 구조는 일제강점기 이래, 적어도 해방 이후 권위주의 정권을 거치면서 흔들리지 않고 굳어져왔다. 정치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가 하나의 권력 카르텔을 구축하고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의 집권은 정권을 변동시켜 기존의 권력 카르텔을 흔들리게 했다. 물론 정치권력의 비중이 큰 한국 사회지만, 그래도 한 번의 정권 변동으로 카르텔이 붕괴될 수는 없었다. 기존의 사회경제적, 문화적 기득권 구조가 새로운 정권을 포위하는 형상이었다.

    좀 다른 성격이었지만, 기존 권력 카르텔에 대한 도전은 노무현 정부로 이어졌다. 그러나 위기의식을 느낀 보수기득권 세력은 국민의 신뢰를 잃은 노무현 정부의 상황을 발판으로 역공세를 취했다. 민주정부 10년을 ‘잃어버린 10년’으로 비판했고, 결국 정권을 재교체해 이명박 정부를 탄생시켰다.

    노무현, 아키노, 김대중의 서거…시대의 전환?

    이렇듯 김 전 대통령은 인권에 대한 강조, 서민경제와 복지정책, 남북화해와 평화정책 등 진보적 정책으로 한국의 국가 전략에 전환점을 만든 정치인이었다. 보수기득권 구조를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도 만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분열의 정치사회 구조의 한계를 넘지 못했다. 그를 반대하거나 경계하는 쪽에 의해 때로는 가혹한, 때로는 왜곡된 평가를 받기도 했다.

    분열의 정치구조와 관련해 김대중 정부의 집권 전략이던 DJP 연합 약속이 이행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일부에서는 이념 차이가 큰 세력끼리의 연합이었기 때문에 붕괴될 수밖에 없었고, 붕괴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나 이는 경험적, 이론적으로 무지한 주장이다. 정치연합은 이념뿐 아니라 다양한 기준과 목적에 따라 이뤄질 수 있다. 또 이념 기준에 따를 경우, 이념이 유사한 세력의 연합과 차이가 나는 연합은 서유럽의 사례에서 비슷한 비율로 나타났다. 만일 DJP 약속이 지켜지거나 시도됐다면 양극화의 정치와 지역주의 딜레마의 해소에 기여하는 좋은 전기가 될 수도 있었다.

    지역편견의 극복, 구세력과의 화해 등이 이뤄질 수 있었고, 이는 한국 정치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가능하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김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 마지막으로 국민을 향해 발언한 것은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의 위기’라는 이른바 3대 위기에 대한 우려와 경고였다. 퇴임한 대통령의 과도한 정파적 발언이라는 시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서민과 중산층을 위한 정치, 남북의 화해와 평화 등은 김 전 대통령 본인의 정치철학 기조였고, 대통령 재임 때 주도하던 핵심 정책 방향이었다. 요즘 일각에서 이런 정책들이 ‘역주행’하는 듯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약자와 소외층이 약육강식의 자유경쟁체제로 내던져지고, 원인이야 어디서 비롯됐든 대북협력 사업은 대부분 중단됐다.

    국제적 브랜드 가치였던 한국의 인권위가 국제조정위원회(ICC) 의장국 기회까지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도 일어났다. 안타깝게도 김 전 대통령은 이런 역주행을 통탄하는 가운데 서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김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듣고 ‘민주화와 민족화해를 향한 고인의 열망과 업적’을 오래 기억할 것이라고 했다. 그의 업적에 대한 반대진영의 재평가와 화해 자세가 병문안과 추모의 인사치레만은 아니길 바란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서거가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정부를 계승한 대통령이었다. 생전에는 때로 모호한 관계처럼 보였지만,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자 김 전 대통령은 한 몸처럼 애도했다. 얼마 전에는 코라손 아키노 전 필리핀 대통령의 서거 소식도 보도됐다. 한국보다 먼저 황색 민주화 물결을 만들었고, 김 전 대통령과 동반자 관계에 있던 또 하나의 아시아 민주화의 상징이었다. 한 시대의 흐름이 지나가는 것 같다.

    여전히 김 전 대통령에 의존해온 민주화 진영이 향후 어떤 식으로 재정비될지 모르겠다. 한국 정치 민주화의 상징이던, 한국의 위상을 국제적으로 높인 최고의 브랜드 파워 대통령이던 김대중. 필자는 서민에 대한 애정, 복지, 인권, 평화의 가치를 강조하는 그의 노선에 절대 공감한다. 남은 과제는 남아 있는 자, 미래의 몫이다. 삼가 김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빈다.

    김만흠 원장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가톨릭대 교수와 국가인권위원회 인권위원, 18대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 위원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새로운 리더십 : 분열에서 소통으로’ ‘민주화 이후의 한국정치와 노무현 정권’ ‘전환시대의 국가체제와 정치개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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