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나 추석 연휴에 볼 만한, 괜찮은 비디오 프로들을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면 난 으레 비교적 수월하게 구해볼 수 있는 비인기 작품들을 고르곤 한다. 사전에 예약을 해놓지 않는 이상 어지간한 인기작품들은 빌려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처럼 ‘숨은 명작’이란 단서가 붙으며 선정 작업이 여간 곤혹스럽지 않다. ‘숨은’과 ‘명작’이란 조건을 동시에 충족시킨다는 게 결코 만만치 않아서다.
그럼에도 바로 그 ‘만만치 않음’ 탓에 이런 작업이 무척 흥미진진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선정 과정에서 맛보게 되는 긴장감도 그렇거니와, 선정 결과에 드러날 내 취향과 지향을 새삼 되짚어보는 건 영화전문가인 내게도 퍽 유익하고 매혹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비디오 목록은 상대적으로 대중적 인기도가 낮은 ‘명작’들 가운데, ‘숨은’이라는 조건까지 충분히 고려해 선정한 고민의 결과물들이다.
video 1. ‘협녀’(1971, 감독:호금전, 원제:俠女)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협 걸작.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1932∼1997)의 대표작 중 대표작이다. 1975년 칸 영화제에서 기술대상을 수상, 감독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무협이라는 장르와 홍콩영화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제고시켰다. 유의할 사항은 2001년 출시된 181분짜리 뉴 버전과, 액션 장면 중심으로 짜깁기해 억지로 90분용 테이프에 맞춰 출시한 올드 버전이 있다는 것. 가능하면 두 가지를 다 구해 보길 권한다. 당장 이해되지 않았던 내러티브 및 인물구도 등이 선명히 드러날 테니까. 더 나아가 시종 싸우고 죽이는 단순한 무협액션물에서 지극히 자연친화적이며 철학적인 무협 드라마로 비상하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7분쯤 흘러야 첫 대사가 나오고 40여분이 지나야 구체적 사건이 벌어지며 50여분 이후에나 칼싸움이 처음 등장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중반의 그 유명한 대나무 숲속 결투와 말미 20분여의 대결 시퀀스에 이르면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길 터. 중국의 사상ㆍ문화ㆍ예술이 홍콩영화의 테크놀로지와 조우해 자아내는 감탄이다. 단언컨대 ‘와호장룡’을 비롯해 현재 상영중인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 등은 한결같이 ‘협녀’의 후예들이다. 수준 차는 있겠지만, 혹자는 ‘반지의 제왕의 무협판’이란 생각까지 할 수도 있겠다. 이 걸작을 최우선적으로 추천한다.
video 2. ‘햇빛 쏟아지던 날들‘(1994, 감독:강문, 원제:陽光燦爛的日子)
내친김에 또 한 편의 중국권 수작을 추천하련다. 문화대혁명기의 중국 베이징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 소년의 감동적인 성장담이다. 이른바 ‘중국 제5세대 바람’의 으뜸 기폭제가 되었던 ‘붉은 수수밭’(감독 장이머우)의 남자주인공 역으로 유명해진 강문의 감독 데뷔작이다.
중국 현대사의 대암흑기로 얘기되는 그 격변기에 제목처럼 ‘햇빛이 쏟아졌다’니, 지독하면서도 퍽 신선한 역설을 보여주는 영화다. 하지만 감독이나 영화 속 열여섯 살 중학생 마소군에겐 아니었다. 말썽꾸러기 친구들과의 멋진 우정과, 끝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사랑이 있었기에.
화사한 이미지와 귀에 익은 배경음악 등에서 잘 드러나는 영화의 따뜻한 시선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 어떤 영화가 그처럼 따사로웠던가 싶다. 더욱 눈길을 끄는 건 그러면서도 결코 흔한 감상에 빠지거나 미화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그 근사한 균형감각이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video 3. ‘이 투 마마‘(2001, 감독:알폰소 쿠아론,원제:Y Tu Mama Tambien)
이 작품은 위의 작품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색감ㆍ질감의 성장영화이자 로드무비다. 홍보 문구를 빌리자면, “‘위대한 유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음란하고 짜릿한 이야기!” 아니나 다를까, ‘네 엄마랑도 (잤어)’라는 뜻의 원제부터 시작해 시청각적으로 마치 음란의 진열장 같다. 시종 음란 혐의가 짙은 노골적 장면들과 대사들이 넘실댄다.
그런데도 영화는 뉴욕 및 LA 비평가협회 등에 의해 2002년 최우수 외국어 영화로 선정되었다. 주연배우들의 실감 연기나 강렬한 인상을 전하는 음악 등 기초적 미덕은 논외로 치자. 단연 주목할 만한 미덕은 영화에서 발견되는 어떤 ‘원형성’이다. 영화에서 길은 캐릭터들이 싸우며 성장하는 완벽한 무대다. 영화 속 세 중심인물은 길의 여정을 통해 변화해간다. 그 속에는 그저 천박하다고 외면할 수만은 없는 청춘기의, 그리고 성년기의 전형적 방황, 즉 통과 제의가 짙게 담겨 있다. 그래서일 게다. 천박함의 틈새를 뚫고 ‘몽정기’나 ‘색즉시공’ 등 국산 성장영화에서 찾을 수 없었던 어떤 진정성이 배어나는 건….
video 4. ‘삼포 가는 길‘(1975, 감독:이만희)
로드무비의 원형성이나 진정성으로 따지자면 ‘만추’(1966)의 거목 이만희 감독의 유작인 이 영화 또한 그 어떤 작품들 못지않다. 중학교 시절 이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사실 난 영화에 시큰둥해 했었다. 고백컨대 평론가 활동을 해오면서도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길 위의 영화 정도로 치부해왔다.
이 영화를 새삼 ‘발견’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김인식 감독의 데뷔작 ‘로드무비’를 보고 나서였다. 그건 영락없이 ‘삼포 가는 길’의 현대적 버전이었다. 간혹 어긋나곤 하는 시간적 연속성이 적잖이 거슬리긴 했으나, 길의 기능이나 인물구도 등에서 원형적 로드무비로서 손색이 없었다. 당시로선 파격적이었을 입체적 사운드 효과도 경이로웠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예상치 못하게 심금을 울렸다. 인물들 사이에서 서서히 형성되는 인간적 연대를 목격할 때면 감동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도 황석영 원작을 토대로 탄생한 영화는 끝내 낭만적 멜로 드라마적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그러니 어찌 로드무비의, 리얼리즘 영화의 진수라 하지 않겠는가.
video 5. ‘위대한 피츠카랄도‘(1982, 감독:베르너헤어초크, 원제:Fitzcarraldo)
이제 지독스러우리만치 기이한 로드무비이자 리얼리즘을 넘어 가히 극사실주의적이라 할 문제작을 하나 소개하련다. ‘뉴 저먼 시네마’가 배출한 광기의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의 ‘위대한 피츠카랄도’. 소식통에 의하면 30만원을 호가하는 희귀 비디오 중 희귀 비디오라는데, 믿거나 말거나.
감독은 대표작 ‘아귀레, 신의 분노’(72)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죽음을 불사하는 극단적 대모험을 감행한다. 오페라에 미쳐 남미 오지 정글 속에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는 거기서 앙리코 카루소 공연을 올리겠다는 ‘광인’ 피츠카랄도(클라우스 킨스키 분)의 필생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일체의 특수효과를 배제한 채, 출연진들로 하여금 300t이 넘는 증기선을 돌투성이의 가파른 산 너머로 운반하게 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는 더 이상 오락이요 문화로서의 영화가 아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나 미장센, 촬영, 편집, 연기, 음악효과 등 영화적 요소들을 분석, 평가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십상이다. 관건은 피츠카랄도라는 인물이나 감독의 광기를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짐작컨대 칸에서 감독상을 안겨준 것도 실은 그 광기에 감동해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질렸거나….
video 6. ‘뽀네뜨‘(1996, 감독 자끄:드와이용, 원제:Ponette)
도저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최루성 가족드라마 한 편을 소개하련다. 여러모로 숀 펜 주연의 ‘아이 앰 샘’(2001)과 비교해보면 좋을 프랑스 영화 ‘뽀네뜨’. 네 살배기 소녀 뽀네뜨는 어느 날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엄마를 잃는다. 그러나 뽀네뜨는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 때문에 부득이 출장을 가자 뽀네뜨는 고모 집에 머물면서 환상 속에서 엄마를 만난다. 그로써 자기 식대로 고통을 다스리는 것이다.
아버지 샘에 초점을 맞췄던 ‘아이 앰 샘’과 달리 영화는 꼬마 뽀네뜨에 집중한다. 그 역을 놀랍게도 글도 읽을 줄 모른다는 네 살배기 빅뜨와르 띠비졸이란 배우 아닌 배우가 연기했다. 우리 영화 ‘집으로…’에서 맛볼 수 없었던 진정성이 감지되는 건 그래서다.
video 7. ‘에브리바디 페이머스‘(2000, 감독:도미니크 데루데르, 원제: Iedereen Beroemd!)
벨기에 출신 감독이 멋지게 빚어낸 코믹 가족드라마다. 영화는 ‘착한 유괴’에 대해 말한다. 유괴로 인해 극중 중심인물이 모두 죽는 것이 아니라, 납치가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행운까지 들이닥친다. 황당하게도.
그 황당함이 영화의 으뜸 매력이다. 예측을 불허하는 플롯을 좇는 재미가 여간 진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는 가수가 되고픈 열망을 갖고는 있으나 별 볼일 없는 가창력말고도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 탓에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딸과, 딸의 재능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납치라는 범죄를 저지르길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를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현실적 개연성은 다소 떨어지나 출연진들의 실감 연기를 비롯해 부성이나 자신감의 소중함, 매스미디어의 타락상 등 영화가 제시하는 문제의식들이 그 약점을 상쇄해준다. 주제곡의 강렬한 선율도 퍽 길고 강한 여운을 남기고.
video 8. ‘간장 선생‘(1998, 감독:이마무라 쇼헤이,원제:カンゾ-先生)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라야마 부시코’(1983) ‘우나기’(97) 등의 그늘에 가려 그 진가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의 수작 블랙코미디이자 휴먼드라마다. 주인공인 의사 아카기는 모든 환자의 증세를 간염으로 진단한다고 해서 ‘간장 선생’이라 불리는 별난 인물이다.
영화는 2차대전 패전 직전의 1945년, 히로시마에서 멀지 않은 일본의 한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간장 선생의 활약상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그것에만 집중해 보는 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복합적 캐릭터 드라마나 정치적 드라마, 매춘론을 앞세운 여성 예찬론적 드라마 등 열린 텍스트로서의 다양성에 눈감는 우를 저지르는 행위일 수 있어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참맛은 다의적 해석 가능성을 충분히 음미할 때 우러난다. 그 점에서 “이마무라의 원폭에 대한 역사와 휴머니즘 사이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단한 모 평자의 평가가 설득력 있게 다가선다.
video 9. ‘세컨드‘(1966년, 감독 존:프랑켄하이머, 원제:Seconds)
‘숨은 명작’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작품이또 있을까. ‘제2의 삶’ 정도로 옮겨지면 제격일 숨겨진 보석이다. 영화의 1차적 재미는 물론 한때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미남 스타 록 허드슨의 인상적 열연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는 진정 캐릭터 배우로서 발군의 열연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건 양념에 불과하다. 은행가에서 화가로 다시 태어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스토리부터가 심상치 않다. 언뜻 오우삼 감독의 ‘페이스 오프’(97) 등이 연상된다. 그렇다. 일찍이 내가 “파우스트 모티브의 카프카적 형상화”로 규정한 이 영화는 그 화제작의 아버지뻘 되는 선구적 문제작인 것이다.
표현의 강도 면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에 등장하는 난교 시퀀스에 뒤지지 않는 질펀한 나체 파티에 이르면, 너무 놀라 숨이 가빠질지도 모르겠다. 1966년이면 미국에서 완전등급제가 시행되기 2년여 전 아닌가. 당연히 개봉 당시 그 시퀀스는 삭제되었다. 1960년대의 그 어떤 미국영화를 능가할 만큼 강렬한 시청각 스타일과 메시지를 겸비한 영화를 보다 보면 소위 ‘저주받은 걸작’이란 이런 영화를 가리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밀려든다.
video 10. ‘킬링 오브 서머‘(1983, 감독:장 베케르, 원제:L‘ete Meurtrier, (영어 제목:One Deadly Summer)
이 또한 ‘세컨드’에 버금가는 숨은 보석이다. 섹시함으로 무장한 천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인 엘르(Elle)와 그녀에게 흠뻑 빠진 소방대원 겸 자동차 수리공인 핑퐁을 축으로 벌어지는 치정의 복수극이자 오해와 강박, 점증하는 광기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의 으뜸 매력 역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 스타로 급부상할 세기의 미인, 이자벨 아자니의 20대 후반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다. 창녀와 성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현대판 팜므 파탈(요부) ‘그녀’(Elle)로 분한 아자니의 인물해석은 완벽하고 그녀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섹스를 하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미녀 살인자를 떠올려보라. 어쩌면 9년여 후 등장할 샤론 스톤 주연의 ‘원초적 본능’을 연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1983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며, 프랑스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세자르 영화상에서는 여우주연상과 각본상, 편집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그럼에도 바로 그 ‘만만치 않음’ 탓에 이런 작업이 무척 흥미진진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선정 과정에서 맛보게 되는 긴장감도 그렇거니와, 선정 결과에 드러날 내 취향과 지향을 새삼 되짚어보는 건 영화전문가인 내게도 퍽 유익하고 매혹적인 경험이기 때문이다. 아래의 비디오 목록은 상대적으로 대중적 인기도가 낮은 ‘명작’들 가운데, ‘숨은’이라는 조건까지 충분히 고려해 선정한 고민의 결과물들이다.
video 1. ‘협녀’(1971, 감독:호금전, 원제:俠女)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무협 걸작. ‘무협영화의 신’ 호금전(1932∼1997)의 대표작 중 대표작이다. 1975년 칸 영화제에서 기술대상을 수상, 감독 자신은 말할 것도 없고 무협이라는 장르와 홍콩영화의 위상을 결정적으로 제고시켰다. 유의할 사항은 2001년 출시된 181분짜리 뉴 버전과, 액션 장면 중심으로 짜깁기해 억지로 90분용 테이프에 맞춰 출시한 올드 버전이 있다는 것. 가능하면 두 가지를 다 구해 보길 권한다. 당장 이해되지 않았던 내러티브 및 인물구도 등이 선명히 드러날 테니까. 더 나아가 시종 싸우고 죽이는 단순한 무협액션물에서 지극히 자연친화적이며 철학적인 무협 드라마로 비상하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7분쯤 흘러야 첫 대사가 나오고 40여분이 지나야 구체적 사건이 벌어지며 50여분 이후에나 칼싸움이 처음 등장하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영화 중반의 그 유명한 대나무 숲속 결투와 말미 20분여의 대결 시퀀스에 이르면 감탄하지 않고는 못 배길 터. 중국의 사상ㆍ문화ㆍ예술이 홍콩영화의 테크놀로지와 조우해 자아내는 감탄이다. 단언컨대 ‘와호장룡’을 비롯해 현재 상영중인 장이머우 감독의 ‘영웅’ 등은 한결같이 ‘협녀’의 후예들이다. 수준 차는 있겠지만, 혹자는 ‘반지의 제왕의 무협판’이란 생각까지 할 수도 있겠다. 이 걸작을 최우선적으로 추천한다.
video 2. ‘햇빛 쏟아지던 날들‘(1994, 감독:강문, 원제:陽光燦爛的日子)
내친김에 또 한 편의 중국권 수작을 추천하련다. 문화대혁명기의 중국 베이징을 무대로 펼쳐지는 한 소년의 감동적인 성장담이다. 이른바 ‘중국 제5세대 바람’의 으뜸 기폭제가 되었던 ‘붉은 수수밭’(감독 장이머우)의 남자주인공 역으로 유명해진 강문의 감독 데뷔작이다.
중국 현대사의 대암흑기로 얘기되는 그 격변기에 제목처럼 ‘햇빛이 쏟아졌다’니, 지독하면서도 퍽 신선한 역설을 보여주는 영화다. 하지만 감독이나 영화 속 열여섯 살 중학생 마소군에겐 아니었다. 말썽꾸러기 친구들과의 멋진 우정과, 끝내 이루어지지는 않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을 사랑이 있었기에.
화사한 이미지와 귀에 익은 배경음악 등에서 잘 드러나는 영화의 따뜻한 시선이 매우 인상적이다. 그 어떤 영화가 그처럼 따사로웠던가 싶다. 더욱 눈길을 끄는 건 그러면서도 결코 흔한 감상에 빠지거나 미화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그 근사한 균형감각이 이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이기도 하다.
video 3. ‘이 투 마마‘(2001, 감독:알폰소 쿠아론,원제:Y Tu Mama Tambien)
이 작품은 위의 작품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색감ㆍ질감의 성장영화이자 로드무비다. 홍보 문구를 빌리자면, “‘위대한 유산’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세상에서 가장 음란하고 짜릿한 이야기!” 아니나 다를까, ‘네 엄마랑도 (잤어)’라는 뜻의 원제부터 시작해 시청각적으로 마치 음란의 진열장 같다. 시종 음란 혐의가 짙은 노골적 장면들과 대사들이 넘실댄다.
그런데도 영화는 뉴욕 및 LA 비평가협회 등에 의해 2002년 최우수 외국어 영화로 선정되었다. 주연배우들의 실감 연기나 강렬한 인상을 전하는 음악 등 기초적 미덕은 논외로 치자. 단연 주목할 만한 미덕은 영화에서 발견되는 어떤 ‘원형성’이다. 영화에서 길은 캐릭터들이 싸우며 성장하는 완벽한 무대다. 영화 속 세 중심인물은 길의 여정을 통해 변화해간다. 그 속에는 그저 천박하다고 외면할 수만은 없는 청춘기의, 그리고 성년기의 전형적 방황, 즉 통과 제의가 짙게 담겨 있다. 그래서일 게다. 천박함의 틈새를 뚫고 ‘몽정기’나 ‘색즉시공’ 등 국산 성장영화에서 찾을 수 없었던 어떤 진정성이 배어나는 건….
video 4. ‘삼포 가는 길‘(1975, 감독:이만희)
로드무비의 원형성이나 진정성으로 따지자면 ‘만추’(1966)의 거목 이만희 감독의 유작인 이 영화 또한 그 어떤 작품들 못지않다. 중학교 시절 이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볼 때만 해도 사실 난 영화에 시큰둥해 했었다. 고백컨대 평론가 활동을 해오면서도 그저 그렇고 그런 평범한 길 위의 영화 정도로 치부해왔다.
이 영화를 새삼 ‘발견’하게 된 직접적 계기는 김인식 감독의 데뷔작 ‘로드무비’를 보고 나서였다. 그건 영락없이 ‘삼포 가는 길’의 현대적 버전이었다. 간혹 어긋나곤 하는 시간적 연속성이 적잖이 거슬리긴 했으나, 길의 기능이나 인물구도 등에서 원형적 로드무비로서 손색이 없었다. 당시로선 파격적이었을 입체적 사운드 효과도 경이로웠다.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인물들의 대사 하나하나가 예상치 못하게 심금을 울렸다. 인물들 사이에서 서서히 형성되는 인간적 연대를 목격할 때면 감동이 극에 달했다. 그런데도 황석영 원작을 토대로 탄생한 영화는 끝내 낭만적 멜로 드라마적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그러니 어찌 로드무비의, 리얼리즘 영화의 진수라 하지 않겠는가.
video 5. ‘위대한 피츠카랄도‘(1982, 감독:베르너헤어초크, 원제:Fitzcarraldo)
이제 지독스러우리만치 기이한 로드무비이자 리얼리즘을 넘어 가히 극사실주의적이라 할 문제작을 하나 소개하련다. ‘뉴 저먼 시네마’가 배출한 광기의 감독, 베르너 헤어초크의 ‘위대한 피츠카랄도’. 소식통에 의하면 30만원을 호가하는 희귀 비디오 중 희귀 비디오라는데, 믿거나 말거나.
감독은 대표작 ‘아귀레, 신의 분노’(72)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죽음을 불사하는 극단적 대모험을 감행한다. 오페라에 미쳐 남미 오지 정글 속에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는 거기서 앙리코 카루소 공연을 올리겠다는 ‘광인’ 피츠카랄도(클라우스 킨스키 분)의 필생의 염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일체의 특수효과를 배제한 채, 출연진들로 하여금 300t이 넘는 증기선을 돌투성이의 가파른 산 너머로 운반하게 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이 영화는 더 이상 오락이요 문화로서의 영화가 아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내러티브나 미장센, 촬영, 편집, 연기, 음악효과 등 영화적 요소들을 분석, 평가하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지기 십상이다. 관건은 피츠카랄도라는 인물이나 감독의 광기를 어떻게 수용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짐작컨대 칸에서 감독상을 안겨준 것도 실은 그 광기에 감동해서가 아니었을까? 아니면 질렸거나….
video 6. ‘뽀네뜨‘(1996, 감독 자끄:드와이용, 원제:Ponette)
도저히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최루성 가족드라마 한 편을 소개하련다. 여러모로 숀 펜 주연의 ‘아이 앰 샘’(2001)과 비교해보면 좋을 프랑스 영화 ‘뽀네뜨’. 네 살배기 소녀 뽀네뜨는 어느 날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엄마를 잃는다. 그러나 뽀네뜨는 그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일 때문에 부득이 출장을 가자 뽀네뜨는 고모 집에 머물면서 환상 속에서 엄마를 만난다. 그로써 자기 식대로 고통을 다스리는 것이다.
아버지 샘에 초점을 맞췄던 ‘아이 앰 샘’과 달리 영화는 꼬마 뽀네뜨에 집중한다. 그 역을 놀랍게도 글도 읽을 줄 모른다는 네 살배기 빅뜨와르 띠비졸이란 배우 아닌 배우가 연기했다. 우리 영화 ‘집으로…’에서 맛볼 수 없었던 진정성이 감지되는 건 그래서다.
video 7. ‘에브리바디 페이머스‘(2000, 감독:도미니크 데루데르, 원제: Iedereen Beroemd!)
벨기에 출신 감독이 멋지게 빚어낸 코믹 가족드라마다. 영화는 ‘착한 유괴’에 대해 말한다. 유괴로 인해 극중 중심인물이 모두 죽는 것이 아니라, 납치가 용서받을 뿐만 아니라 예상치 못한 행운까지 들이닥친다. 황당하게도.
그 황당함이 영화의 으뜸 매력이다. 예측을 불허하는 플롯을 좇는 재미가 여간 진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는 가수가 되고픈 열망을 갖고는 있으나 별 볼일 없는 가창력말고도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 탓에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딸과, 딸의 재능을 믿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재능을 키워주기 위해 납치라는 범죄를 저지르길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를 축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현실적 개연성은 다소 떨어지나 출연진들의 실감 연기를 비롯해 부성이나 자신감의 소중함, 매스미디어의 타락상 등 영화가 제시하는 문제의식들이 그 약점을 상쇄해준다. 주제곡의 강렬한 선율도 퍽 길고 강한 여운을 남기고.
video 8. ‘간장 선생‘(1998, 감독:이마무라 쇼헤이,원제:カンゾ-先生)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나라야마 부시코’(1983) ‘우나기’(97) 등의 그늘에 가려 그 진가를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거장 이마무라 쇼헤이의 수작 블랙코미디이자 휴먼드라마다. 주인공인 의사 아카기는 모든 환자의 증세를 간염으로 진단한다고 해서 ‘간장 선생’이라 불리는 별난 인물이다.
영화는 2차대전 패전 직전의 1945년, 히로시마에서 멀지 않은 일본의 한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간장 선생의 활약상을 펼쳐 보인다. 그러나 그것에만 집중해 보는 건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복합적 캐릭터 드라마나 정치적 드라마, 매춘론을 앞세운 여성 예찬론적 드라마 등 열린 텍스트로서의 다양성에 눈감는 우를 저지르는 행위일 수 있어서다. 따라서 이 영화의 참맛은 다의적 해석 가능성을 충분히 음미할 때 우러난다. 그 점에서 “이마무라의 원폭에 대한 역사와 휴머니즘 사이의 시선”으로 영화를 진단한 모 평자의 평가가 설득력 있게 다가선다.
video 9. ‘세컨드‘(1966년, 감독 존:프랑켄하이머, 원제:Seconds)
‘숨은 명작’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작품이또 있을까. ‘제2의 삶’ 정도로 옮겨지면 제격일 숨겨진 보석이다. 영화의 1차적 재미는 물론 한때 할리우드를 대표했던 미남 스타 록 허드슨의 인상적 열연을 감상하는 것이다. 그는 진정 캐릭터 배우로서 발군의 열연을 선사한다. 그러나 그건 양념에 불과하다. 은행가에서 화가로 다시 태어나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간다는 스토리부터가 심상치 않다. 언뜻 오우삼 감독의 ‘페이스 오프’(97) 등이 연상된다. 그렇다. 일찍이 내가 “파우스트 모티브의 카프카적 형상화”로 규정한 이 영화는 그 화제작의 아버지뻘 되는 선구적 문제작인 것이다.
표현의 강도 면에서 스탠리 큐브릭의 ‘아이즈 와이드 셧’에 등장하는 난교 시퀀스에 뒤지지 않는 질펀한 나체 파티에 이르면, 너무 놀라 숨이 가빠질지도 모르겠다. 1966년이면 미국에서 완전등급제가 시행되기 2년여 전 아닌가. 당연히 개봉 당시 그 시퀀스는 삭제되었다. 1960년대의 그 어떤 미국영화를 능가할 만큼 강렬한 시청각 스타일과 메시지를 겸비한 영화를 보다 보면 소위 ‘저주받은 걸작’이란 이런 영화를 가리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밀려든다.
video 10. ‘킬링 오브 서머‘(1983, 감독:장 베케르, 원제:L‘ete Meurtrier, (영어 제목:One Deadly Summer)
이 또한 ‘세컨드’에 버금가는 숨은 보석이다. 섹시함으로 무장한 천박하면서도 아름다운 여인 엘르(Elle)와 그녀에게 흠뻑 빠진 소방대원 겸 자동차 수리공인 핑퐁을 축으로 벌어지는 치정의 복수극이자 오해와 강박, 점증하는 광기의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의 으뜸 매력 역시 프랑스를 대표하는 세계적 스타로 급부상할 세기의 미인, 이자벨 아자니의 20대 후반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이다. 창녀와 성녀의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현대판 팜므 파탈(요부) ‘그녀’(Elle)로 분한 아자니의 인물해석은 완벽하고 그녀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 섹스를 하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미녀 살인자를 떠올려보라. 어쩌면 9년여 후 등장할 샤론 스톤 주연의 ‘원초적 본능’을 연상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1983년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으며, 프랑스의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세자르 영화상에서는 여우주연상과 각본상, 편집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