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에 몰두하던 선비가 잠시 쉬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겸재 정선의 ‘독서여가’.
하지만 서유구가 893종의 책만 읽은 것은 아니다. 수천 종의 책을 읽고, 그 가운데 인용 할 수 있는 893종의 책에서 자신의 구상에 부합하는 자료를 골라냈을 것이다. 물론 그는 1806년 조정을 떠난 이후 18년 동안 ‘행포지(杏蒲志)’ ‘종저보(種藷譜)’ ‘경솔지(志)’ ‘옹희지(饔志)’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 등을 저술한다. 하지만 ‘종저보’만 단독으로 전하고 나머지는 모두 ‘임원경제지’에 분산, 인용돼 있다. 자신의 저술 몇 종이 인용돼 있다고 하지만 전체 인용서 893종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그렇다면 그가 읽은 수천 종의 책은 어떻게 축적된 것인가.
조부 때부터 수집한 장서 물려받아
지난 호에서 서유구의 가문이 경화세족(京華世族)이고, 경화세족들은 18세기 후반에 오면 독특한 문화를 갖는다고 말했다. 그 독특한 문화의 하나로 책과 서화, 골동의 수집을 들 수 있다. 서유구의 가문 역시 유수한 장서들로 가득했다. 홍한주(洪翰周)의 ‘지수염필(智拈筆)’에 이런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는 좁고 작은 나라지만, 심두실(沈斗室, 沈象奎)의 속당(續堂)은 거의 4만 권에 육박하고, 유하(遊荷) 조병귀(趙秉龜), 취석(醉石) 윤치정(尹致定) 두 분의 집도 역시 3, 4만 권을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진천현(鎭川縣) 초평리(草坪里)의 화곡(華谷) 이경억(李慶億) 가문의 만권루(萬卷樓)와 풍석(楓石) 서유구(徐有)의 두릉리(斗陵里) 8000권이 또 그 다음이 된다.
심상규는 청송심씨로 영의정까지 지낸 인물이고, 조병귀는 풍양조씨 세도의 핵심 인물이었던 조만영(趙萬永)의 아들이다. 풍양조씨는 조엄(趙儼) 조진관(趙鎭寬) 조만영 조병귀로 이어지는 벌열(閥閱) 중의 벌열이다. 이경억의 장서는 이하곤(李夏坤)의 장서다. 이시발(李始發) 이경억(李慶億, 좌의정) 이인엽(李寅燁, 이조판서·대제학) 이하곤으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 자료를 통해 장서의 구축이 경화세족의 문화였고, 서유구도 장서가로 손꼽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두릉리란 대체 어디인가. 서유구는 1806년 조정에서 축출된 이후 여러 번 집을 옮기는데, 1837년 번계(樊溪, 지금의 서울 樊洞)로 옮기고 마지막에는 두릉리란 곳으로 옮긴다. 이곳 두릉리가 1845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가 만년을 보낸 곳이다.
서유구의 장서는 어떻게 구축된 것인가. 그의 조부 서명응은 베이징(北京)에 다녀온 사람이었으니, 필시 베이징에서 책을 대량 구입했을 것이다. 천문학과 수학 등에 탁월한 조예가 있었던 서유구의 아버지 서호수도 이 방면의 서적을 대량 소장하고 있었다. 황윤석(黃胤錫)의 일기 ‘이재난고(齋亂藁)’를 보면, 시골 선비 황윤석이 ‘수리정온(數理精蘊)’이라는 한역 서양 수학서를 빌리려고 서호수의 집을 찾아 담화하는 장면이 나온다. 서유구의 가문은 당시 중국에서 수입한 최신 수학책을 소장하고 있는 서울의 두서너 집 가운데 하나였던 것이다.
서호수는 어느 날 아들 넷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재주가 없으니, 이 책들은 아마 뒷날 깨진 간장독이나 바르는 데 쓰게 될 거야.” 이 말을 들은 맏아들 서유본(徐有本)은 5년 동안 발분한 끝에 수학과 천문학, 기하학의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된다. 서유본은 또 유금(柳琴)의 제자였던바, 유금은 유클리드 기하학에 빠져 자기 서재 이름을 기하실(幾何室)이라 했으니 이 시기 서양 수학의 유행을 알 만하다. 서유본은 1822년에 사망한다. 서호수와 서유본의 장서는 자연스럽게 서유구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표지와 본문.
서유구의 숙부 서형수의 장서 역시 빼놓을 수 없다. 서씨 집안은 서울 남산 아래 저동(苧洞)에 저택이 있었는데, 서형수는 필유당(必有堂)이란 가내(家內) 도서관을 마련한다. 서유본이 쓴 ‘필유당기(必有堂記)’를 보자.
죽오(竹塢)의 서쪽에 나무를 얽어 가리개를 만들고 가리개 안을 소제해 당(堂)을 지으니, 조용하고 깨끗하여 산림의 분위기가 있었다. 중부 명고선생(明皐先生, 서형수)께서 사부(四部)의 서적을 그 안에 모아두시고 자제들에게 그곳에서 학업을 닦게 하셨던바, ‘필유당’이란 편액을 걸었다. 대개 옛날 정기(丁)란 사람이 서적 만 권을 구입해두고 “내 자손 중에 반드시 학문을 좋아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吾子孫必有好學者)”라고 하였으니, 당의 이름을 필유라 한 것은 대부분 여기서 나온 것이다.
필유당은 서형수의 ‘필유당기’에 의하면 경류(經類) 19종, 사류(史類) 30종, 자류(子類) 25종, 집류(集類) 34종, 총 108종의 책이 있었다. 필유당 외에도 저동의 저택에는 서명응의 죽서재(竹西齋), 서유본의 불속재(不俗齋), 서유구의 태극실(太極室) 등의 서재가 있었다. 여기에는 모두 서적들이 있었다.
사족이지만, 뒷날 필유당의 책은 모두 팔리게 된다. 서형수의 문집 ‘명고전집(明皐全集)’에 ‘경발선사춘추전후(敬跋宣賜春秋傳後)’라는 글이 있다. ‘춘추전’의 제작에 서형수의 공이 가장 컸기에 특별히 정조는 제본하지 않은 책 1질과 제본한 책 1질을 하사한다. 1798년 서형수는 이에 감격해 발문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추자도 귀양지에 있을 때(1817년) 아들 서유경(徐有)이 편지를 보내, 생활고에 몰려 필유당에 있는 장서 17종 377책을 팔았다고 보고한다. 그중에 ‘춘추전’ 2질도 포함돼 있었다. 서형수는 이 말을 듣고 낙담해 마지않는다.
서유구는 가문의 장서 속에서 성장했다. 그 역시 10대 후반 서명응을 용주에서 시봉하며 지낼 때 자신만의 서재이자 장서고(藏書庫)인 풍석암서옥(楓石庵書屋)을 짓는다. 서형수는 이를 기념해 ‘풍석암장서기(楓石庵藏書記)’를 써준다.
조카 유구가 용주에 거처할 때 네모난 땅을 정원으로 삼고,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들고, 계단에 단풍나무 10그루를 심었는데, 늘어선 것이 마치 비단으로 장막을 한 것 같았다. 계단 아래에는 봇도랑, 밭두둑 사이에 차밭 몇 이랑이 섞여 있다. 계단에서 5, 6보 떨어진 곳에 처마를 등지고 서재를 지었다. 깊고 조용하고 깔끔하며 책과 거문고를 기둥에 기대놓았다.
‘장서기(藏書記)’라 했으니, 서유구의 책 수집을 의식해 한 말이다. 이처럼 서유구는 10대 말부터 책을 수집했고, 출사(出仕)하여 급료를 받자 본격적으로 장서를 구축한다. 거기에 가문의 불행도 한몫한다. 서명응은 1787년, 서호수는 1799년에 사망하고, 1806년 서형수는 귀양을 간다. 가문의 불행으로 가문의 장서가 곧 서유구의 장서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흥미로운 것은 장서에 대한 서유구의 태도다. 지난 호에서 잠시 언급했듯 ‘임원경제지’의 ‘이운지(怡雲志)’에서 서유구는 선비가 품위 있는 생활을 하는 데 필요한 여러 도구들, 예컨대 문방구, 다구(茶具), 서화 골동품, 장서의 구축 방법에 대해 언급한다. ‘이운지’ 6, 7권은 ‘예완감상(藝翫鑑賞)’ ‘도서장방상(圖書藏訪上)’ ‘도서장방하’로 이루어져 있는데, 곧 금석(金石) 골동(骨董) 서화의 감별, 감상, 소장법을 언급한 뒤 서적의 구입, 감별, 수장법, 인쇄법을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눈에 띄는 대로 줄여 쓰면 이렇다.
현대인에게 맞게 새롭게 꾸며진 ‘임원십육지’. ‘임원경제지’의 다른 이름이다.
이중 몇 대목을 읽어보자. 서유구 자신이 쓴 ‘금화경독기’에서 인용된 것이다.
책을 구입하면서 화려하게 장정된 책을 갖고자 하는 것은, 벗을 찾되 화려하고 선명한 의관을 차려입은 친구만 사귀려 하는 것과 같다. 친구를 찾되 화려하고 선명한 옷을 차려입은 벗만 찾는다면, 갈옷을 입었으되 옥을 품고 있는 사람은 멀어지게 마련이다.
책을 모으는 것이 귀중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옛사람의 좋은 말과 행실을 많이 알아 나의 식견을 넓히고자 하는 것인가, 아니면 비단으로 책함(冊函)을 장식하고 상아로 책의 묶음을 고정하는 찌를 만들어 서가를 멋지게 꾸미고자 하는 것인가.
지금도 책의 소장자라면 가슴이 뜨끔할 소리가 아닌가.
각설하고 본래 주제로 돌아가자. 1806년 서유구는 돌아갈 기약 없이 정계에서 축출됐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학문 외에는 할 일이 없다. 가문이 구축한 방대한 장서를 기반으로 ‘임원경제지’를 쓰는 것이 생의 소업이 됐다. 매일매일 오직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리하여 장서는 장식품이 아니라, 그의 삶의 유일한 도구가 됐다. 방대한 장서를 읽어나가면서 자신이 구상한 ‘임원경제지’의 구도에 따라 자료를 선택하고 분류하고 베껴 썼다. 아니 장서에서 ‘임원경제지’를 끄집어낸 것이다. 축출된 지 18년 만에 조정으로 돌아왔지만,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1827년이 되어서야 겨우 일단락이 됐지만, 그 이후에도 보완 작업은 계속됐다. 그의 평생이 소모된 것이다. 그 결과 대충 잡아도 1만4000쪽에 달하는 ‘임원경제지’가 완성됐다. 그 규모가 짐작이 가는가.
독창성 없다고 폄훼 안 될 일
인용으로만 이루어진 이 책을 오늘날 한국 사회, 혹은 학계에서는 뭐라 말할까? 베껴 쓰기로 일관한 독창성이 없는 책이라면서 비난하지나 않을까? 따지고 보면 세상에 ‘새’ 책은 정말 얼마나 될 것인가. 석가와 공자와 예수와 마호메트의 어록과 호메로스의 서사시, 플라톤의 저작이 출현하고, ‘도덕경’과 ‘장자’가 죽간에 쓰인 이후 과연 ‘새’ 책이 있을 것인가. 근대에 와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다윈의 ‘종의 기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뒤 과연 누가 ‘새’ 책을 쓸 수 있을 것인가? 모든 책은 불행하게도 이들 책의 해설과 각주에 불과한 것이다. 지금 세상의 모든 글을 쓰는 천재들은, 저 선배들이 먼저 내뱉은 말 때문에 늦게 태어난 것을 저주하며 땅을 치고 통곡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태어난 시대에 충실한 글을 쓰면 그것으로 족할 뿐, 죽은 뒤 자기 책이 멀리 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조차 무망한 욕심이다. 죽으면 내가 없어지니, 내가 죽은 뒤에 내 책의 운명은 알 수가 없다. 말이 우회했지만, 새 책 없는 세상에 인용으로 이루어진 ‘임원경제지’가 폄훼돼야 할 이유는 아무 데도 없다. 어떤 분이 ‘임원경제지’를 폄훼하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나서 이렇게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