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역사 기법을 사용한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이런 기법을 사용한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2002년)는 ‘만약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총에 이토 히로부미가 죽지 않았다면’ 광화문의 상징은 이순신 동상이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 동상일 것이라는 가정법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대체역사 기법의 대표작은 소설가 복거일이 1987년 발표한 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다. 이토 히로부미가 부상만 당하고 16년을 더 산 덕택에 일본은 진주만을 습격하지 않고 조선과 만주를 식민지로 삼은 채 경제개발에만 박차를 가한다. 따라서 쇼와 62년(1987년) 조선반도는 여전히 일제강점기다. 본토 내지인(일본인)과 ‘2등 국민’ 반도 조선인의 차별은 조선어와 조선문화의 사멸처럼 당연하다.
주인공 기노시다 히데요는 우연히 어느 스님에게서 만해 한용운의 시집을 얻고, 큰아버지에게서는 자신의 성씨가 ‘박씨’, 즉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뿌리를 캐기 위해 혼자 조선어를 배우던 그는 일본도서관에서 한국역사 자료를 복사해 조선으로 반입하다 들켜 감옥살이를 하는데, 아내는 일본 헌병에게 겁탈까지 당한다. 심지어 그 헌병은 ‘조선 여자는 내지인의 것’이라며 딸까지 탐낸다. 기노시다 히데요는 일본 헌병을 살해한 뒤 상하이임시정부를 향해 탈출을 결행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런데 이렇게 ‘조선어(碑銘)’의 소중함을 다루던 복거일이 10년 후 ‘비명을 찾아서’의 메시지를 완전히 뒤집고 만다. 바로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1998년)란 책으로 영어공용화 논쟁을 촉발하더니 세계화 시대에 박물관 언어가 될 한국어보다 영어를 모국어로 하자고 주장한 것이다. 우리의 실제 역사에서도 기노시다 히데요가 아니라 ‘우리들의 일그러진 콩글리시 영웅’ 미스터 방이 더 주인 노릇을 한다. 소설 ‘미스터 방(方)’(채만식, 1946년)의 주인공 방삼복은 1945년 8월15일, 역사적인 날 이렇게 뇌까린다.
“우라질! 독립이 배부른가? 노예도 상전을 선택할 자유를 가지는 수도 있다고. 신기료 장수 코삐뚤이 삼복은 미스터 방으로 승차를 하여, S라는 미국 주둔군 소위의 통역이 되었다. 거진 매일같이 미스터 방은 S 소위를, 낮에는 거리의 구경으로, 밤이면 계집 있는 술집으로 인도하였다. 그 공로에 정비례해서, 미스터 방은 나날이 훌륭하여져 갔다. 8·15 이전에 어떤 은행의 중역 사택이라던 지금의 이 집으로, 현저동 그 집에서 옮아오기는 S 소위의 통역이 되는 사흘 후였었다.”
-채만식 ‘미스터 방(方)’, 경북대 2000년 정시, 고등 ‘문학’
미스터 방에게는 역사의식이라곤 없다. 광복의 날이 왔는데도 전혀 기뻐하는 빛이 없고 미군정에 약삭빠르게 적응, 서푼짜리 영어 실력으로 출세만 도모하는 회색인이다. 그래서 미스터 방의 내면은 ‘소백산 양떼’이기도 하다.
“소백산 자락의 목장에서 양떼를 모는 개는/ 이상하게도 영어만 알아듣는다/ 뒤로 가 하면 우두커니 섰다가도/ 고 백 하면 재빨리 천여 마리 양떼 뒤로 가 서고/ 몰아라 하면 딴전을 피우지만 컴 온 소리엔 들입다 몬다/ 미국서 훈련받은 개들이라 날쌔고 영악하기 사람 뺨쳐/ 정말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까/ 영어만 알아듣는 개한테 쫓기는 것이/ 양떼만이 아니라는 걸/ 우리들 울부짖음에는 눈만 멀뚱거리다가도/ 컴 온 하는 명령에는 기겁을 해서 양떼를 몰고/ 스톱 하고 호령하면 목숨을 걸고 세우는 것이/ 개만이 아니라는 걸.”
- 신경림 ‘소백산의 양떼’
영어와 연애를 동시에 정복하는 방법을 다룬 영화 ‘영어완전정복`’(위). SBS ‘웃찾사’의 ‘미친 소 영어’ 코너는 영어강박증을 희화화했다.
그런데 미스터 방은 끝까지 호의호식하지는 못했다. 그는 양치질 하다 그 물을 베란다 바깥으로 내뱉었는데 마침 그를 찾아온 미군 장교가 양칫물을 뒤집어쓰는 일이 일어난다. 그 때문에 미스터 방은 실컷 두들겨 맞고 조선인 방삼복으로 돌아온다. 만약 미스터 방의 일방적 영어 쏠림 현상이 계속된다면 2023년 영어공용화가 전면적으로 실시된 이후의 한국 사회를 가상보고서 형식으로 쓴 책 ‘한국어가 사라진다면’이 실제 역사가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대한민국은 국민의 열화 같은 요청에 2023년부터 영어와 달러를 공용화한다. 영어공용화 3세대가 사회의 주축이 된 2106년에는 한국어는 타임캡슐 안에만 존재하고 소수의 고고학자와 언어학자들이 그것을 해독하느라 진땀을 흘린다.
그런데 여기에 또 하나의 가상보고서를 액자소설처럼 끼워넣을 수 있지 않을까. 영어공용화가 시작된 지 60년 뒤쯤, 미국이 헤게모니를 잃고 중국이 17억 인구를 발판 삼아 세계경제를 쥐락펴락한다면 ‘복거일처럼 태도를 180도 확 바꿔’ 영어 공용화론자들이 중국어 공용화론자로 방향 선회를 한다는 가정 아래 ‘만약 중국어가 모국어라면’이라는 대체역사소설을 써보는 것 말이다.
사실 이것은 일부분 실제 역사였다. 박제가(1750~1805)는 1778년 청나라 기행 보고서 ‘북학의’에서 중국 것은 ‘새것/좋음/청결’이지만 조선 것은 ‘헌것/나쁨/불결’하다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특히 조선말을 없애고 중국어를 쓰자는 ‘중국어 공용화론’을 주장했다. 반면 이덕무는 같은 북학파지만 ‘조선문화를 버리자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역설했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의 문체반정처럼 정조와 박제가의 ‘중국어 공용화 가상논쟁’을 대체역사소설로 쓸 수 있다는 점이다.
“甲 : ‘소중화’란 세 글자에는 조선문화가 세상 제일이라는 무한한 자긍심이 있도다. 그 자긍심을 바탕으로 더 뛰어난 시문(詩文)을 만들고 생활규범들을 가다듬을 수 있느니라. 이런 주장에 반대하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乙 :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옵니다. 외국에서 비록 문학을 숭상하고 글 읽기를 좋아하는 것이 중국과 비슷하다 할지라도 마침내 간격이 없지 않음은 이 언어라는 커다란 꺼풀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옵니다.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 중국과 가깝고 성음(聲音)이 대략 같으니, 온 나라 사람이 우리말을 버린다 해도 불가할 것이 없사옵니다.”
-서울대 2005년 예시논술
그러면 18세기 조선의 논쟁을 이끌었던 ‘북학파의 리더’ 연암 박지원의 태도는 어떠했나? 기술문명의 세계화에 대해서는 박제가와 의견이 같지만, 문화에 대해선 이덕무처럼‘주체적 조선풍 지키기’였다. 연암이 ‘북학의’ 서문에 중국을 배우자는 박제가의 주장을 두고 “내가 ‘열하일기’에 쓴 내용과 조금도 어긋남이 없다”면서도 “‘북학의’가 채택되어 현실에 적용될지 여부는 정녕 알 수가 없는 일”이고, 박제가를 ‘기이한 선비’라고 한 것도 ‘강대국 문명=절대행복’이란 오류를 벗어나라는 경고였을 것이다. 독일 시인 실러의 말처럼 ‘보편성은 국지성과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다’는 뜻일 게다.
복거일의 소설 ‘비명을 찾아서’.
영어공용화론을 촉발한 복거일의 기노시다 히데요가 조선어의 비명(悲鳴)을 조선어(碑銘)로 되찾으려고 자발적 망명을 한 것도 앞으로의 실제 역사가 아니라 단지 가정법을 즐기는 한 소설가의 유희(대체역사)로만 멈추길, 오직 이것만을 빌 수밖에 없는 노릇인 것이다.
추천 도서 ‘한국어가 사라진다면-2023년, 영어 식민지 대한민국을 가다’(한겨레신문사),‘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와 62년’(복거일, 문학과지성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