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회별신굿에 등장하는 양반탈(왼쪽)과 부네탈.
우리는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역할을 ‘연기’한다. 그런데 역할이 좋은 경우에는 자기 자신과 역할을 특별히 구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말처럼 사람들의 공식 경력과 역할이 그 사람의 인물됨을 만들어주면 서로 분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타인 시선 의식 변화된 내 모습 인정하기 급선무
우리들은 마음에 드는 ‘가면’을 쓴 채 그것의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그것이 ‘나’라고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변화로 가면이 벗겨진다면 어떻게 될까. ‘가면’을 벗은(역할에서 해방된) ‘나’는 타인 의존성에서 벗어나게 되는 걸까. 그렇지는 않다. 해방감보다는 불안감을 더 느낀다. 왜냐하면 ‘가면’을 썼든 벗었든 결국 ‘나’는 하나이고,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현존재는 ‘서로 함께 있음’으로써 타인들에게 ‘예속’되어 있다. 현존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이 그에게서 존재를 빼앗아버렸다. 타인들이 현존재의 일상적인 존재 가능성을 좌우한다. 이때 이러한 타인들은 ‘특정한’ 타인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어느 타인이든 다 그 타인을 대표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오직 ‘더불어 있음’으로써의 현존재가 뜻하지 않게 떠넘겨받은 눈에 띄지 않는 타인들의 지배일 뿐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서강대 2005년 정시
따라서 타인들에게 인정받던 ‘가면’이 벗겨지면 인격이 허물어지고 심하면 분열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왜 그럴까. 그 변화는 인격(人格)을 부술 만큼 파격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2500년 전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강이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두 개로 변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아니다. 주목할 것은 ‘흐르는’ 강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강의 질적(質的) 동일성의 변화를 뜻하지 수적(數的) 동일성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역할’과 ‘인격’의 문제도 수적 동일성이 아니라 질적 동일성의 문제다. 그런데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에 “이건 내가 아니야!”라는 말을 한다. 예컨대 늘 주연만 하던 연기자가 단역으로 급락했을 때, 좌천이나 실직했을 때, 대학에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다른’ 존재로 전락했다고 생각하기에 그것이 더 이상 ‘나’는 아니라며 분노하고 죽기까지 한다. 역할은 변하는데 대응하는 사람은 변화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극이다. 헤라클레이토스에 따르면 한 방향의 변화와 그와 대응하는 다른 방향의 변화가 궁극적으로 균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는 더 나은 역할에 대한 동경도 있지만, 동시에 주어진 역할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 이런 것을 양가감정(兩價感情·ambivalence)이라 하는데, ‘나’는 여전히 ‘역할’에 대한 인정을 받아야만 ‘인격’의 상실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달은 차면 기울고, 기울면 차는 법’이다. 변화하는 세계에서 질적 동일성을 언제나 유지하기는 불가능하다. 세계가 변하고, 관계가 변하면 질적 동일성도 변한다. 따라서 이것을 수적 동일성의 변화 또는 파괴라고 여길 아무런 이유가 없다. 변화하는 현실과 관계 속에서는 당연히 다양한 ‘역할’과 ‘가면’을 쓰고 ‘연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참된 인격의 형성은 변화를 수용하고 여러 역할 속에서 질적 균형을 이루려는 노력을 통해 가능하다.
관련 기출문제 = 서울대 2000년 논술경시 ‘건전한 개인주의’, 서강대 2005년 ‘실존과 대중’, 서강대 2002년 예시2차 ‘바람직한 인간관’, 이화여대 2003년 ‘타인의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