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 33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나라’.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지난해 1만2047명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는 인구 10만 명당 26.1명이 자살한 것으로, 10년 전(11.8명)과 비교할 때 2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자살은 한국인 사망원인 4위에 올라 있기도 하다.
- 자살은 혼자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남은 가족에게는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안기고 자살사건의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씁쓸함을 남긴다. ‘자살의 상처’에서 자유롭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편집자>
응급의학계에서는 응급실 환자의 1% 내외를 음독환자로 보고 있다. 음독환자의 대부분은 자살시도자다.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남편은 더 이상 ‘든든한 울타리’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기억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렸고 어눌한 말투에 어린아이 같은 행동을 보였다. 남편이 주치의에게 “전 군인입니다”라고 말할 때나 조금 전에 자신이 했던 말도 기억하지 못할 때마다 유씨는 억장이 무너져 내린다. 남편은 직장에서의 괴로웠던 일도, 자신의 자살 시도도 까맣게 모르고 있다.
유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하루 종일 남편을 돌보고 있다. 하루 세 끼 식사를 챙겨 먹여야 하고, 재활치료를 위해 병원에 데리고 다녀야 한다. 또다시 충동적으로 자살을 시도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일종의 ‘감시’도 필요하다. 유씨는 정성들여 보살핀다면 1~2년 안에 남편이 정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며 자신을 다독인다. 그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치밀어 오르는 슬픔과 막막함, 배신감 등을 억누르기 힘들다고 고백했다.
“자살을 시도하기 전에 제 생각은 한 번도 안 한 걸까요? 만약 제 얼굴을 떠올렸다면 어떻게 자기 손으로 목을 맬 수 있었을까요. 대학 선후배로 만나 8년 동안 연애하고 2년 전에 결혼했어요. 요즘 남편은 절 멍한 시선으로 쳐다봐요. 지난 10년 동안 아낌없이 사랑해주던 그 눈빛은 이제 온데간데없어요.”
가장 흔한 자살 수단은 ‘질식사’
유씨는 예전에는 자살을 특별한 문제를 가진 사람만이 벌이는 행위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자신의 남편처럼 평범한 사람도 감당하기 어려운 스트레스에 시달리다 보면 충동적으로 저지를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유씨의 남편이 시도했던 질식으로 인한 사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흔한 자살 수단이다. 생명인권운동본부(대표 조용범)가 우리나라 자살통계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2004년 한 해에만 4194명이 스스로 목을 매 숨졌다. 이는 인구 10만 명당 8.8명에 해당하는 수치로 1995년 3.8명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다. 그 다음으로 흔한 자살 수단은 살충제(농약 등)나 독성물질을 음독하는 것. 같은 해 4305명이 살충제나 독성물질을 복용함으로써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를 잇는 3위와 4위의 자살 수단은 추락과 익사다. 2004년에는 1796명이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숨졌으며, 451명이 물에 빠져 사망했다.
경기 수원시 아주대병원의 정윤석 교수(응급의학교실)는 연간 500여 명의 음독환자들을 치료하고 있다. 음독환자 대부분은 자살시도자. 정 교수는 “술에 취한 상태에서 무심결에 음료수 병에 담아놓은 농약을 마시는 경우를 제외하면 목숨을 끊으려고 음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을 항상 느끼게 됩니다. 빚을 내 농사를 지었는데 그만 망쳐버리고 말아, 막막한 심정에 농약을 마시는 농민이 참 많습니다. 젊은 여성들은 가정불화로 수면제를 다량 복용하는 일도 잦은 편입니다.”
음독 자살환자를 한 명이라도 더 살리고픈 마음에 정 교수는 최근 후배 의사 3명과 함께 ‘임상독성학’이라는 책을 펴냈다. 1000쪽에 달하는 이 책은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모든 농약 및 약물, 독성물질 등의 정보와 치료법 등을 망라하고 있다. 백과사전 식으로 쉽게 해당 물질을 찾아볼 수 있도록 했는데, 빨리 그리고 정확하게 응급조치를 하는 것이 음독환자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그동안은 이러한 책이 없어 응급 상황에서도 여러 문헌을 뒤지느라 시간을 많이 빼앗기곤 했다”고 말했다.
서울 한강의 안전사고와 치안을 담당하는 한강경찰대의 이권태 팀장은 “주로 경제적인 문제를 비관하는 사람들이 한강에 뛰어내리고 있다”고 전했다. 올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마포대교에서 14명, 한강대교에서 9명이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내렸다. 지난달 말에는 동작대교 중간에 자전거와 가방을 남겨놓고 뛰어내린 남자 중학생의 시신을 찾느라 이 팀장은 이틀 동안 한강을 수색했다.
“망연자실한 그 학생의 부모가 강변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유족이 지켜볼 때면 더욱 마음이 착찹해지곤 합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족으로 인한 심경이 어떠할지…. 참 가슴 아프죠.”
자살 목격자도 충격 벗어나기 힘들어
달려오는 지하철을 향해 몸을 날려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많다. 2000년부터 올해 9월까지 서울 지하철에서만 모두 400여 건의 투신사고가 발생했는데, 이 중 자살시도가 312건으로 모두 206명이 사망했다. 지하철 2호선 구의역은 사고가 가장 많이 발생한 역으로, 모두 9건이 발생해 7명이 숨졌다. 구의역 강윤구 역장은 “서울메트로에서 근무한 30여 년 동안 모두 15여 차례의 자살사건을 목격했다”고 했다. 자살자는 대부분 70세가 넘는 노인들. 그는 “80년대까지만 해도 지하철에 뛰어드는 일이 드물었는데, 외환위기 이후 부쩍 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하철 선로에 뛰어든 사람들은 대부분 몸이 두세 동강이 난다. 그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 날이면 강 역장은 길게는 한두 달씩 밤잠을 설치기도 했다. 지난 5월 구의역에서 지하철로 뛰어든 할머니도 목이 잘려나갔다. 강 역장은 자살사건이 발생하면 안타까운 영혼을 달래기 위해 지하철이 끊긴 새벽 시간에 사망 지점에서 간단한 위령제를 지낸다.
자살사건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는 이들은 안타까운 사연들을 평생 마음속에 담아놓는다고 털어놓았다. 정 교수는 7년 전 제초제 그라목손을 1리터나 마시고 사망한 한 여대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했다. 장애인 복지시설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알게 된 원장의 비리에 항의했다가 오히려 잘못을 뒤집어쓰게 되자 여대생은 괴로워했고, 결국 자살을 택했다. 정 교수는 “어린 대학생 친구들이 병원에 와서 펑펑 울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한강경찰대 대원들 사이에서는 6전7기로 한강에서 빠져 죽은 30대 여성의 사연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수 차례 생명을 건져줬지만 결국 그 여성은 돌이 한가득 든 가방을 끌어안은 변사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송응길 대원은 “물에서 건져주었더니 ‘제발 죽는 방법 좀 알려달라’고 울며 매달리던 여자분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이권태 팀장은 스스로 죽음을 택하려는 사람들이라도 구조해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는 “자살의 반대말은 ‘살자’”라며 “생각만 조금 고치면 다들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분들”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물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대부분은 구조의 손길을 내밀면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뭍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구조되는 걸 보니 죽을 팔자가 아닌가 보다. 덤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살겠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윤석 교수는 생활고를 비관해 자살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현실적인 충고를 내놓았다. 자살의 경우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중환자실에 일주일만 입원해도 병원비가 수천 만원까지 나온다. 정 교수는 “가족들에게 사랑하는 가족이 스스로 죽으려고 했다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함께 커다란 경제적 고통까지 안겨주는 안타까운 경우를 많이 봤다”고 말했다.
유지민 씨는 남편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해도 평생 혼자 앓아야 하는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남편의 자살시도 때문에 받은 충격과 배신감, 그리고 남편을 돌보면서 겪은 막막한 심정을 모두 비밀 아닌 비밀에 부쳐야 하기 때문이다.
“저도 너무 힘들어서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나 하나 편하자고 죽을 순 없어요. 자살이 남은 가족들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고통이 되는지 이제는 무척 잘 아니까요. 내일은 오늘보다는 나아질 거예요. 희망을 갖자, 자주 그렇게 다짐하며 견뎌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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