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에게 ‘미남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학생들은 십중팔구 매스컴을 통해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을 지목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연예인에게서 독특한 이미지를 발견해내는 학생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학생들에게는 미(美)를 바라보는 고정된 가치관만이 존재할 뿐이다. 다음 글을 보자.
이 글은 하회탈춤에 쓰이는 바보탈인 이매탈에서 미를 끄집어낸 경우다. 이매탈은 턱이 없어 미완성의 탈로도 불린다. 상식적으로 보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탈이다. 그러나 임재해 교수는 하회탈 9개 중 최고 아름다운 탈로 이매탈을 지목한다. 바로 대상을 창의적으로 접근한 결과다.
논술도 마찬가지다. 대상에 대한 가치가 이미 규정돼 있는 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적은 답안은 기본보다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제시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생각으로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 자신만의 주장을 만들려면 미완성, 미해결된 대상에서 최고의 가치를 생성해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는 고도의 창의성을 발현한 경우다. 우리는 이런 발상을 통해 완전한 대상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미를 창조해낼 수 있다.
문학 작품의 예를 들어보자. 소설에 등장하는 미완의 대상으로 ‘바보’ 등장인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보는 대부분 웃는 얼굴을 하고 있으며 마음이 평화로워 보인다. 작품 속의 ‘바보’들은 사회 현실의 복잡한 갈등 요소에서 한 걸음 비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에 나오는 아다다를 창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바보가 아니라 돈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긴 순진무구한 여인이다.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역시 악마의 갖은 방해에도 부지런히 일만 하는 의지적인 인물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은 인간세계에서는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인간상이다. 이매탈의 미적 원리가 이런 문학 작품의 주인공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셈이다.
미술 작품에서도 이매탈의 미적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림에서 대상의 완전한 구현이 아닌 여백이 갖는 특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형상은 보이지 않는 여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가 이것을 감상의 초점으로 할 때 진정한 미적 감상 능력은 더욱 확장된다. 김정희의 ‘세한도’의 경우, 겨울의 흰 눈을 나타낸 부분은 화폭의 흰 여백을 그대로 둠으로써 그림의 흰 바탕에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미적 원리를 알고 감상할 때 보는 이의 감동은 더 커질 것이다.
얼마 전 큰 병원 건물을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은 내부 구조가 인위적인 내용물로 꽉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 병원은 건물 중심인 가운데를 맨땅 그대로 텅 비워놓았다. 건축가의 의도는 사방에서 그곳을 바라보는 환자들이 각기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공간은 맨땅에 싹이 돋으면 봄, 비가 내리면 여름, 낙엽이 흩어지면 가을, 흰 눈이 내리면 겨울 등 환자의 관점에 따라 온갖 변형성이 창조되는 여백인 것이다. 이매탈의 턱이 없는 부분을 여백으로 본다면, 관객이 그 턱을 자유롭게 상상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경우와 같다.
학생들이여, 조각 작품을 상상해보자. 감상의 대상이 조각의 형상, 그것 하나뿐일까? 그러면 곤란하다. 여기서는 조각을 둘러싼 자연 공간이 여백이다. 즉, 조각 형상과 미완의 여백이 어우러져 시선이 이동될 때마다 새로운 미적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다. 최고의 미적 감상은 미완의 대상에서 나온다는 창의적 사고에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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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탈은 하회탈 중 턱이 없는 탈이다.
논술도 마찬가지다. 대상에 대한 가치가 이미 규정돼 있는 것을 자신의 생각으로 적은 답안은 기본보다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이미 존재하는 사실을 자기 주장의 근거로 제시할 수는 있어도 자신의 생각으로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때 자신만의 주장을 만들려면 미완성, 미해결된 대상에서 최고의 가치를 생성해내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다. 이는 고도의 창의성을 발현한 경우다. 우리는 이런 발상을 통해 완전한 대상을 뛰어넘는 초월적인 미를 창조해낼 수 있다.
문학 작품의 예를 들어보자. 소설에 등장하는 미완의 대상으로 ‘바보’ 등장인물을 생각해볼 수 있다. 바보는 대부분 웃는 얼굴을 하고 있으며 마음이 평화로워 보인다. 작품 속의 ‘바보’들은 사회 현실의 복잡한 갈등 요소에서 한 걸음 비껴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에 나오는 아다다를 창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바보가 아니라 돈보다 사람을 소중하게 여긴 순진무구한 여인이다.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 역시 악마의 갖은 방해에도 부지런히 일만 하는 의지적인 인물이다.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의 주인공 미슈킨은 인간세계에서는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인간상이다. 이매탈의 미적 원리가 이런 문학 작품의 주인공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셈이다.
미술 작품에서도 이매탈의 미적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림에서 대상의 완전한 구현이 아닌 여백이 갖는 특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때 형상은 보이지 않는 여백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우리가 이것을 감상의 초점으로 할 때 진정한 미적 감상 능력은 더욱 확장된다. 김정희의 ‘세한도’의 경우, 겨울의 흰 눈을 나타낸 부분은 화폭의 흰 여백을 그대로 둠으로써 그림의 흰 바탕에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러한 미적 원리를 알고 감상할 때 보는 이의 감동은 더 커질 것이다.
얼마 전 큰 병원 건물을 본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건물은 내부 구조가 인위적인 내용물로 꽉 채워져 있다. 그러나 이 병원은 건물 중심인 가운데를 맨땅 그대로 텅 비워놓았다. 건축가의 의도는 사방에서 그곳을 바라보는 환자들이 각기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공간은 맨땅에 싹이 돋으면 봄, 비가 내리면 여름, 낙엽이 흩어지면 가을, 흰 눈이 내리면 겨울 등 환자의 관점에 따라 온갖 변형성이 창조되는 여백인 것이다. 이매탈의 턱이 없는 부분을 여백으로 본다면, 관객이 그 턱을 자유롭게 상상함으로써 새로운 생명을 얻는 경우와 같다.
학생들이여, 조각 작품을 상상해보자. 감상의 대상이 조각의 형상, 그것 하나뿐일까? 그러면 곤란하다. 여기서는 조각을 둘러싼 자연 공간이 여백이다. 즉, 조각 형상과 미완의 여백이 어우러져 시선이 이동될 때마다 새로운 미적 세계를 창조해낼 수 있다. 최고의 미적 감상은 미완의 대상에서 나온다는 창의적 사고에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