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7월14일 이회창 전 총재가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헌법포럼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한길리서치가 11월17일과 18일에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민심은 이 전 총재의 복귀가 반갑지 않은 모양이다. 응답자의 58.9%가 그의 정계 복귀를 부담스러워했다. 그중 39%는 적극적으로 그의 등장에 반대했다.
반면 그의 복귀를 환영한다는 답변도 33.1%나 됐다. 여기에 힘을 얻은 것일까? 돌아온 이 전 총재는 꿋꿋하게 자기 갈 길을 나서는 모습이다. 그는 왜 돌아왔을까?
“나에게는 대권보다는 국민의 자유와 자유정신을 무시하는 좌파 정권이 다시 집권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며, 이것이 바로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명분은 간단했다. 좌파 정권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란다. 지극히 정치적인 데서 자신의 역할을 찾고 있다. 그러면 그는 정치를 재개하려는 것일까? 이 질문에 이 전 총재 측은 준비된 답변을 내놓는다. 그의 언론특보로 활동했던 이종구 씨의 설명이다.
홍문표 의원이 정계 복귀 길 닦아
“정치를 재개했다는 오해를 받더라도 나라를 위해 해야 할 일은 피하지 않겠다는 것이 이 전 총재의 생각이다.”
이 전 총재의 정계 복귀를 위해 길을 터준 사람은 한나라당 홍문표 의원이다. 홍 의원의 지역구는 충남 예산. 이 전 총재의 고향이자 선영이 있는 곳이다. 이 전 총재는 현역 시절 고향 후학인 홍 의원에게 남다른 신뢰를 보였다. 그래서 이 전 총재의 최근 행보를 놓고 일각에서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홍 의원은 최근 이 전 총재 사무실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한 번 가면 식사도 하고 장시간 대화도 나눴다. 그런 그가 이 전 총재의 ‘오더’ 없이 역할론을 거론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홍 의원을 잘 아는 당의 한 의원은 ‘줄탁동기론’으로 이를 설명했다. 줄탁동기란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 어미닭은 알의 바깥을, 병아리는 알의 속을 서로 쪼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전 총재는 좌파 세력을 막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다. 언론은 킹(King)과 킹 메이커(King maker)라는 두 갈래로 이를 설명한다. 하지만 이 전 총재는 이 부분에서는 말끝을 흐린다.
결국 이 전 총재는 두 가지를 모두 준비하고 길을 나선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정치권에서는 이 전 총재의 출마 가능성에 더 무게를 싣는다. 먼저 자기 세력을 규합해 역할을 모색하지 않겠느냐는 것.
2006년 1월1일 당시 손학규 경기도지사,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이명박 서울시장(왼쪽부터)이 한나라당 당사에서 건배하고 있다.
빅3 진영 중 한 캠프에 몸담은 Y씨는 “이 전 총재의 사무실인 단암빌딩의 움직임과 주변 정보 등을 놓고 보면 이 전 총재가 가고자 하는 길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다.
“지난 대선 때 이 전 총재 진영에서 일하던 의원 가운데 현재 우리 캠프 일을 봐주는 의원이 많다. 그중 몇몇 의원이 단암빌딩의 움직임을 직·간접적으로 우리 캠프에 전달하고 있다.”
이 인사는 단암빌딩의 움직임을 보면 흥미로운 내용이 많다고 덧붙였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민심, 이명박 전 시장의 각종 동정, 박근혜 전 대표의 근황 등과 관련한 온갖 첩보와 정보가 전달되고 있다는 것. 최근에는 이 전 총재 측이 과거 자신의 진영에서 활동했던 인사들에게 밀명을 내렸다는 말도 나온다. 계속해서 Y씨의 설명이다.
“10여 일쯤 전(11월10일경)의 일이다. 2002년 대선 당시 이 전 총재를 모셨던 한 의원에게 이 전 총재 측이 ‘섣불리 움직이지 말고 기다리라’는 신호를 보냈더라. 신호를 받은 이 인사가 우리 캠프에 귀띔을 해주어 우리는 이 전 총재가 움직일 것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
경우 따라 빅3 협공 수모당할 수도
그는 이 전 총재의 향후 일정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전망했다. 일단 연말까지 각종 대학강연과 세미나 등을 통해 좌파 정권에 대한 비난 수위를 높여 나가는 한편, 외곽정치를 통해 활동 공간을 확보하고, 정계 재진입의 당위성과 명분을 축적해나가리라는 것이다.
그는 또한 대선과 관련한 이 전 총재의 활동은 신년 초부터 본격화될 것으로 예상했다. 상황이 허락한다면 한나라당에 복귀해 ‘병풍’ 구실과 함께 대선 출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을 수도 있다. 이 전 총재는 최근 경남 창원 강연에서 “2002년 대선 당시 앞서가던 자신이 패배한 것은 여당의 ‘깜짝쇼’ 때문이었다”는 회한을 토로한 바 있다.
이런 이 전 총재를 상대해야 하는 ‘빅3’ 측의 생각은 복잡하다. 그의 등장으로 기존 질서에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일차적인 반응은 당연히 ‘반갑지 않다’는 것.
그러나 이 전 시장 측은 ‘온도’가 조금 다르다. 나쁘지만은 않다는 표정이다. 그와 가까운 이재오 전 대표는 “이 전 총재는 정치를 재개해야 한다”며 붉은 카펫을 깔았다. 9월에는 이 전 시장이 서울 용산구 서빙고동 이 전 총재 자택을 방문해 밀담을 나눴다. 두 인사의 측근들이 상대를 배려하는 모습도 눈에 띈다. 이 전 시장의 한 측근은 “이 전 총재가 병풍역을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만큼 양진영의 신뢰가 공고하다”고 말한다.
반면, 박 전 대표와는 관계가 소원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7월 서울 송파 재보궐선거 과정에 쌓인 앙금 때문이란 그럴듯한 설명도 뒤따른다. 이 전 총재가 자신의 측근인 이흥주 전 특보의 공천을 요청했으나 당이 매몰차게 거절한 것이 발단이다. 당시 이 전 총재의 한 측근은 “박 전 대표 측이 전화를 했으나 이 전 총재가 받지 않았다”고 불편한 심정을 토로한 바 있다. 이런 흐름을 보고 있는 이 전 시장 측은 “만약 이 전 총재가 자신의 역할을 킹 메이커에 고정시킨다면 그 상대는 바로 자신들”이라고 믿는다. 그 경우 DJ(김대중 전 대통령)와 호의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 전 대표와는 묘한 대조를 이룬다. 빅2의 킹 메이커가 이 전 총재와 DJ로 자연스레 교통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재의 등장으로 한나라당 당내 대선구도가 복잡하게 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