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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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지책 택한 것이 이젠 천직 됐죠”

  • 윤영호 기자 yyoungho@donga.com

    입력2006-11-30 15: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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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구지책 택한 것이 이젠 천직 됐죠”

    。전주고, 경희대 법학과 중퇴<br>。1974~1976년 파출소장<br>。1995년 중앙선관위 홍보국장(3급)<br>。1996년 중앙선관위 선거연수원장<br>。1998년 9월 중앙선관위 정당국장(2급),<br> 11월 중앙선관위 선거국장<br>。2000년 인천광역시 선관위 상임위원(1급)<br>。2002년 중앙선관위 선거관리실장<br>。2004년 중앙선관위 사무차장(차관급)<br>。2005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국무위원급)

    전쟁의 폐허에서 겨우 벗어난 1960년대 시골의 가난한 수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뻔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그 지역 명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등록금이 싼 ‘국립’ 서울대에 진학해 고시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전부였다. 대학 졸업생들을 받아줄 기업이 드문 시절이기도 했지만 고시 합격만큼 확실한 ‘인간 승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10월23일 취임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김호열 상임위원은 조금 다른 길을 걸었다. 전북 진안의 산골에서 태어나 호남의 명문 전주고를 졸업한 것까지는 여느 수재들과 같았다. 그러나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어 서울대에 진학하지는 못했다. 사법시험 합격의 꿈을 안고 경희대 법학과를 선택했지만 그나마도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끝내 고시 합격의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2년여 동안 산속에 틀어박혀 하루 종일 법전에 파묻혀 살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했지만 결과는 번번이 낙방이었다. 건강도 해친 데다 생계를 이어가는 것도 힘들게 되자 경찰간부 후보생 시험에 합격해 경찰에 잠시 몸담았다.

    경찰 경위로 임관했다 ‘책 볼 시간 많다’는 얘기에 자리 옮겨

    “친구가 경찰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하면 경위로 임관한다고 하더군요. 인근 지서에 내려가 ‘경위가 어느 정도 높냐’고 물었더니 지서장이 ‘수사과장이나 정보과장이 경위다. 나보다 더 높은 계급이다’라면서 시험을 보라고 권유하더군요. 다행히 시험에 합격해 신체검사를 앞두고 있는데 아무래도 몸무게가 걸렸습니다. 고시공부할 때 제대로 먹지를 못해 ‘몸무게 55kg 이상’이라는 요건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신체검사 받으러 가면서 ‘물 먹인 소소’가 생각나 계속 물을 먹었습니다. 그래도 55kg이 안 되자 검사관에게 ‘방금 전에 소변을 봐서 몸무게가 줄었다’고 우겼더니 55kg이라고 적어주더군요.”



    경찰에서는 2년 남짓 파출소장까지 했지만 행정고시에 대한 미련 때문에 곧 그만뒀다. 그러나 역시 뜻을 이루지 못한 그가 택한 길이 바로 78년 7급(당시는 4급 을) 시험에 합격해 중앙선관위 사무처 직원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선관위는 하는 일이 별로 없어 책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많다”는 얘기에 솔깃해 ‘고시공부도 할 수 있고 호구지책으로도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천직이 돼버렸다.

    그는 곧 선관위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맡겨진 일은 본인 스스로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완수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고난 성실성 때문이었다. 다만 당시 선관위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투·개표를 ‘관리’하는 일이 전부여서 회의와 좌절감이 밀려들기도 했다. 그때마다 그는 고시공부 시절의 습관대로 책을 꺼내들고 공부를 했다. 그가 정통 선거전문가라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런 노력의 결과다.

    선관위 관계자들은 그를 두고 “박기수·임좌순 전 중앙선관위 사무총장과 함께 선관위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말한다. 선관위가 오늘처럼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기관으로 거듭나는 데 그만큼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세 사람은 차례로 중앙선관위 사무총장을 역임했지만 그만 유일하게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이 됐다. 그는 오늘의 영광을 모두 직원들에게 돌렸다.

    “호구지책 택한 것이 이젠 천직 됐죠”

    2007년 1월12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김호열 당시 사무총장(왼쪽에서 세 번째)이 국민들이 중앙선관위에 기탁한 정치자금 19억원을 5개 정당에 배분한 후 당 관계자들과 포즈를 취했다.

    “87년 민주화 이후 선관위의 역할과 권한이 확대돼 선거 관련 업무가 폭증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적은 인원과 예산으로 일하다 보니 직원들 고생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평일에는 밤 12시 넘어 퇴근하기 예사이고, 휴일에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쥐꼬리만한 월급봉투를 가져다주니 직원 부인 중에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도 많았습니다. 심지어 과로로 순직한 직원도 있었습니다. 경찰공무원이 순직하면 언론에서 크게 보도해주기도 하지만 선관위 직원은 누구 한 사람 알아주는 이도 없었습니다.”

    그 자신 역시 ‘취미가 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사무관 시절부터 휴일에도 쉬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그는 “2001년 인천선관위 상임위원으로 근무할 때 협심증 수술을 받았는데, 수술실에 들어가면서 그동안 애들 데리고 가까운 공원에도 가지 못해 애들에게 추억거리 하나 만들어주지 못한 점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고 회고했다.

    그가 가장 기억에 남는 선거는 92년 대선이다. 당시 선거에서 당선한 김영삼 후보나 낙선한 김대중 후보 모두 윤관 당시 중앙선관위원장에게 전화를 걸어 “선거를 공정하게 관리해줘 고맙다”는 인사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윤 위원장은 입만 열면 공명선거를 강조하고 직원들이 신나게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선관위 직원들은 그런 윤 위원장을 ‘공명선거 교주’라고 불렀다.

    그는 92년 대선 당시 지도2과장으로 일했다. 그는 한 해 전 이 자리에 취임하면서 6명의 직원들을 따로 불러 “내년 한 해는 현장에서 옥쇄한다는 각오로 일하자. 일제강점기 만주벌판에서 이름 없이 스러져간 독립운동가들을 본받자”면서 각오를 다졌다. 직원들 모두 그의 뜻을 묵묵히 따라주었다.

    “몸은 힘들어도 하루하루 보람을 느낀 대선이었습니다. 공명선거를 지지하는 국민과 언론이 선관위 편이었기 때문입니다. 선관위가 보도자료를 내면 언론은 다음 날 이를 크게 써줬습니다.”

    그가 지금도 아쉬움을 느끼는 선거는 98년 7월 실시된 경기 광명을 보궐선거였다. 당시 여당이던 새정치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을 지낸 조세형 씨가 후보로 나선 이 선거에서 여당은 조씨 당선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당시 광명을에서는 ‘개도 돈을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선거제도 개선 등 선관위 위상 확립에 견인차 역할

    “89년 동해 재선거 당시 선관위가 후보 사무장을 고발하는 등 제 역할을 다하자 국민은 박수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선관위 내부에서도 앞으로는 선거를 치를 때마다 한 단계 높은 선거 풍토를 만들어나가자고 각오를 새롭게 했습니다. 실제 97년 대선까지는 점점 더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룬 국민회의가 여당이 돼 실시한 첫 보궐선거는 많은 국민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는 선관위의 정치관계법 개정 의견 등 제도개선과 관련된 작품은 모두 그의 손을 거쳐 완성했다는 평을 듣는다. 중앙선관위 홍보국장, 선거국장, 선거연수원장, 선거관리실장, 사무차장, 사무총장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다진 이론과 실무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민주주의를 우리보다 훨씬 앞서 도입한 선진국에 비해서도 손색없는 선거 관리를 하고 있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지난 5·31 지방선거를 참관한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 관계자들이 ‘한국의 선거 관리를 도입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는 것.

    정치권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벌써부터 과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정계 개편’ 얘기가 나오는가 하면, 오픈프라이머리가 새롭게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그는 “과거 대선 과정을 다시 면밀히 살펴 선거 과정에 나타날 수 있는 문제를 예상하고 이에 대해 정치인들에게 주지시킬 것”이라면서 “내년 대선이 정책선거가 될 수 있도록 국민과 언론이 힘을 보태달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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