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레옹 제롬,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 1867~68, 캔버스에 유채, 30.2x45.6cm, 카이로, 외교클럽.
‘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했듯 동양은 서양에 의해 정의됐고, 서양에 의해 대변됐다. 서양인의 인식 속에 동양은 주체인 적이 없었으며 오로지 주체인 서양의 대상적 존재, 곧 타자(他者)였다. 주체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남성’으로 상정된 근대 서양문명에서 타자가 된다는 것은 곧 ‘비합리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이 되는 것을 의미했다. 서양회화사에서 오리엔트를 주제로 한 많은 수의 그림이 오랜 세월 그런 이미지로 형상화됐다.
서양은 이성·합리적 남성, 동양은 수동·비합리적 여성?
19세기 프랑스 화가 폴 투르예베르의 ‘하렘의 하녀’(1874)는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동양에 대해, 나아가 동양 여성에 대해 가진 편견을 전형적으로 드러내주는 그림이다. 하렘은 이슬람권에서 가까운 친척 외에 일반 남자들의 출입이 금지된 금남(禁男)의 장소를 말한다. 오스만튀르크의 지배자 술탄의 하렘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금남의 장소라는 이유 하나로 서양미술 속에서 이곳은 온갖 성적 환상이 피어오르는 팬터지의 장으로 변하곤 했다. 투르예베르의 그림에서도 하녀는 지금 시중을 드는 사람이라기보다 요부의 모습을 하고 있다.
폴 투르예베르, ‘하렘의 하녀’, 1874, 캔버스에 유채, 130x97cm, 니스, 니스미술관.
하지만 모델이 된 소녀는 결코 스스로 이를 호소한 적이 없다. 그림 속의 소녀는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서양문명의 흐름 속에서 동양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이렇듯 동양 자신이 아니었다. 서양이었다. 서양은 동양으로 하여금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 비대칭성이 그림 속 소녀의 침묵 속에 그대로 담겨 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에게 동양은 또 폭군의 땅이었다. 그들의 눈에 동양인들은 선천적으로 민주적인 의사결정 능력이 결여된, 전제정치에 길들여진 존재들이었다. 오리엔탈리스트들의 이런 인식은 서양이 왜 동양을 식민지로 삼아야 하는지, 그 도덕적 정당성을 담보해주는 ‘자가발전’적인 근거였다. 폭군보다 지혜롭고 합리적인 서양인들이 그들의 미래를 더욱 안전하고 밝게 지켜주는 것은 일종의 의무이자 사명이었던 것이다.
영국의 정치가 밸푸어(1848~1930)는 “동양인들의 역사 전체를 관찰해볼 때 그곳에서는 자치의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다”며 “그들의 위대한 여러 세기는 전제주의, 곧 절대정부 아래서 지나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우리들의 통치 아래에서 지금껏 유례를 볼 수 없었던 우수한 정부를 갖게 됐다는 것은 그들뿐 아니라 서양문명 전체에 대해서도 이익”이라고 강변했다.
외젠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1827~28, 캔버스에 유채, 392x496cm, 파리, 루브르박물관.
사르다나팔루스는 아시리아의 왕이다. 고대 군주이므로 이슬람문명과는 관계없는 존재이지만, 그 문명의 선조라는 점에서 그들의 운명적인 행로를 ‘예견’케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잔혹하고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폭군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하다.
그림의 내용은 이렇다. 반란군과의 싸움 끝에 성이 완전히 점령당할 위기에 놓인 사르다나팔루스는 부하들에게 화장 장작단을 쌓게 했다. 또 그 자리에 자신의 온갖 재물을 갖다놓게 하고 여인들, 말과 개, 충복들을 집합시켰다. 그러고는 처참한 살육의 향연을 벌인 뒤 불을 붙여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태워버렸다. 이 소름 끼치는 장면을 들라크루아는 충돌하는 색채와 인물들의 격렬한 몸부림으로 표현했다. 활처럼 꺾이거나 뒤틀린 여인들의 몸뚱어리, 흥분해서 날뛰는 말, 온갖 화려함을 자랑하는 사방의 패물들, 그 위로 얼음보다 더 차가운 시선을 던지는 폭군 등 가히 극단적인 가학과 피학이 뒤범벅된 그림이다. “오르가슴과 죽음의 홀로코스트”니 “사드 백작의 가슴을 뛰게 하는 스펙터클”이니 하는 자극적인 평가가 나온 것도 무리가 아니다.
서구의 손길 기다리는 무기력한 땅으로 그려
오리엔탈리스트들이 보기에 동양인들은 이처럼 잔혹한 지배문화 아래서 그들 특유의 비합리성과 허위, 불성실성을 키워왔다. 바로 이 질곡으로부터 헤어 나오기 위해 ‘서양인들’을 부를 수밖에 없다고 오리엔탈리스트들은 생각했다.
영웅 나폴레옹은 오리엔트에 대해 그래도 문화적, 학문적으로 접근한 서양 정치가로 꼽힌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갖춘 문화적 식견이라는 것도 본질적으로는 유럽문명의 자기 중심적인 편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특기할 점은, 그와 이집트의 만남이 이전의 다른 유럽인들과 달리 광범위하고 철저한 사전 준비를 통해 이뤄졌고, 1798년 카이로에서 이집트 학회를 창립한 데서 보듯 오리엔탈리스트의 특수한 전문적 지식을 식민지 지배의 기능적 도구로 동원한 최초의 사례였다는 사실이다.
장 레옹 제롬의 ‘스핑크스 앞의 보나파르트’(1867)에서 나폴레옹은 지금 말을 탄 채 스핑크스를 주시하고 있다. 마치 스핑크스와 일전이라도 불사할 태세다. 화가는 이 주제에 오이디푸스 일화를 ‘오버랩’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제롬은 나폴레옹을 이집트의 오이디푸스로 보고 있다. 고대에는 지혜와 영감으로 충만했던 이집트. 하지만 이는 찬란한 과거일 뿐 이 오리엔트의 땅은 끝없는 정체와 무기력 속에서 이제 서구로부터 오는 구원의 손길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림은 그렇게 나폴레옹을, 나폴레옹으로 대변되는 근대 유럽문명을, 이집트가 수천 년 기다려온 진정한 구세주로 당당히 선포하고 있다. 이집트인들의 진정한 속마음은, 나폴레옹이든 그와 경쟁관계에 있던 영국 제국주의든 결코 알려고 하지 않았다. 뒤편 배경의 개미 같은 군인들과 나폴레옹 뒤로 보이는 휘하 장군들의 그림자가 오로지 이 태고의 땅을 지배하고자 하는 그들만의 강인한 의지를 드러내 보인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 속에서도 이렇듯 오리엔탈리즘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했다. 어떠한 편견이든, 편견은 억압을 낳는다. 9·11 테러나 이라크전쟁 등의 갈등은 결국 이런 편견을 제대로 해소하지 못한 역사의 후유증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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