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인사동의 한 고미술품 관계자는 최근 팔상도를 경매에 내놓았던 ‘장물은닉’ 혐의자가 어떤 법적 심판을 받느냐에 따라 미술품 시장에 나와 있는 다른 ‘도난’ 미술품들의 운명이 크게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계종이 삼성문화재단을 상대로 도난당한 ‘사리’를 돌려달라는 조정 신청을 냈다가 거절당하자 반환 소송을 낸 사건도 고미술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삼성문화재단은 “정당하게 구입한 것”이라지만, 조계종 측은 “사리구에 조계종 ‘현등사’라는 명문이 있어 장물인지 모른 채 취득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사리는 신체의 일부분이므로 거래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최근 문화재청은 “사리는 문화재가 아니고 신체의 일부분”이라며 일단 조계종의 손을 들어준 상태다.
4월 서울 강서경찰서에서 문화재청으로 옮겨지고 있는 팔상도(맨 위)와 이경찰서 창고에 보관 중인 ‘장물 문화재’.
7년인데, 이를 늘리거나 아예 없애자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고미술품 구입과 소장에 늘 ‘장물 취득’ 소지가 있는 터에 공소시효를 없앤다면 도난 고미술품은 영원히 개인의 수장고와 암시장만을 전전할 것이라는 주장도 만만찮다. 도난 미술품은 공소시효가 지나야 고미술품 시장에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공소시효 폐지는 다른 범죄와의 형평성 문제를 야기한다.
이런 이유로 2003년 7월부터는 공소시효가 지난 미술품이라도 장물임을 알고 소장한 사람은 ‘문화재 은닉죄’로 처벌받도록 문화재보호법이 개정됐다.
‘사유재산’과 인류유산 사이의 딜레마
23년 동안 문화재 도굴과 절도범들을 추적해온 문화재청 사범단속반 강신태 반장은 “많은 악질범을 잡았지만, ‘빽’ 좋고 돈 많은 사람들이라 금세 풀려나온다. 선암사 팔상도의 소장자 등도 변호사들을 통해 ‘선의의 취득’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검거 전 장물임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는 것이 입증됐다(이들은 검거 전 고미술품 전문가 등으로부터 소장품이 장물이라는 사실과 자진 신고 권유를 들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들이 무죄판결을 받는다면 문화재보호법은 뭐 하러 개정했나”라고 반문한다.
최근 미술품 시장에 투자자들이 몰리고, 모 TV 프로그램에서 영정이 1억7000만원의 감정가를 받자, 미술품 시장에 미술 전문 절도범뿐 아니라 일반 잡범들까지 몰려들어 들썩거리고 있다는 것이 고미술품 업계 관계자들의 말이다. 문화재청은 사찰뿐 아니라 전국의 사대부묘와 향교, 사당 등에 도둑이 들끓자 5월2일 보안 대책을 내놓았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일본에 약탈당했던 우리 문화재도 속속 ‘귀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 학림사에 있던 ‘아미타삼존상’ 등 고려 불화들을 국내 도둑들이 훔쳐온 사건이다. 10억원대 이상의 가치를 가진 이 불화는 국내에 1억원에 들어와 4억원에 팔린 뒤 대구의 한 암자에 시주됐다가 다시 도난당해 지금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2년 전 이 ‘아미타삼존상’의 급매 제의를 받았던 한 경매회사 대표는 “한눈에 ‘아시아 채색문화의 최고봉’임을 알게 하는 명품이었다. 내가 당황스러운 빛을 보이자 그는 불화와 함께 사라져버렸다”고 말한다.
2005년 문화재 절도단으로부터 압수한 시가 1억원 상당의 문화재를 살펴보고 있는 경찰관들.
국내 사찰의 경우 1996년 비로소 조계종 소속 2000개 말사의 문화재 등록이 시작돼 올해 마무리 단계에 들어갔다. 2001년까지 ‘큰스님’으로 불리며 전국 사찰의 성보를 턴 김모 씨는 검찰에 구속됐으나 피해자(사찰)들이 나타나지 않자 장물을 되돌려 받아 인사동에 팔아넘겼다. 사찰 문화재 관리가 얼마나 허술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팔상도를 포함해 30년 동안 54점의 불화를 도난(‘미술사학지’ 등 추정치)당한 선암사 역시 조계종 소속이면서 태고종 스님들이 절을 운영하는 등 종파 갈등을 겪었는데 그것이 결국 문화재 관리 소홀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또 금물 도색을 위해 외부로 나갔던 목불상이 감쪽같이 합성수지에 금물 도색된 채 돌아와도 언제 바꿔치기 당했는지조차 스님들이 모르는 일도 적지 않다고 한다.
미술품은 비싸고 유명할수록 도난당한 뒤 더 큰 수난과 수모를 겪는다. 곧바로 도난문화재 도록에 등재되고, 외국 반출이 금지되는 등 판매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절도범은 추정가의 10%-세계 미술 암시장에서는 7% 정도-로 급매에 넘긴다. 이후 암시장에서 몇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그림의 경우 테두리를 자르고, 말아서 갖고 다니기 때문에 심하게 훼손될 수밖에 없다. 공소시효가 지나면 거래가 시작되는데, 흥미로운 것은 원 소장자에게 구입을 제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비싸고 유명할수록 큰 수난과 수모
최근 회수된 경북 인각사의 ‘불복장 발원문’과 관련해 올해 초 ‘D대 H 교수(불교미술사)가 인사동에서 확보해 인각사로 연락했다’는 미담성 기사가 보도됐다. 그런데 알고 보니 H 교수가 2005년 9월 50만원에 사서 ‘인각사에 필요한 것이니 구입하라’고 권해 550만원에 팔았다는 것이다. ‘불복장 발원문’의 추정가는 5000만원이다.
고미술품 전문지 ‘고미술저널’지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고려 초조대장경판(팔만대장경의 모태) ‘대반야경’은 왜구에 의해 약탈당한 뒤 일본의 고찰 안국사에 보관돼 있었다. 그 가운데 4권이 국보로 지정되자 500여 권이 은밀히 우리나라로 돌아왔는데, ‘외교문제’ 등의 이유로 더 이상 국보 지정이 이뤄지지 않자 가격이 폭락해 다시 일본으로 유출되고 있다고 한다. 문화재 연구자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고미술저널’ 김호년 편집인은 “문화재를 공예적 가치나 희소성으로만 따지지 말고 서양이나 일본처럼 역사적 스토리와 소장자들이 바뀐 사연 등을 통해 평가한다면 현재 고미술품 시장이 장물들로 왜곡되는 현상을 바로잡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영정 도난 사건이 늘고 있는 것도 취득과 소장 과정을 따지지 않는 고미술계의 풍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미술품에 비하면 근·현대 미술품의 도난 사건은 많지 않다. 연로한 박모 화백의 제자를 빙자한 도둑들이 집에 들어와 그림을 훔쳐간 사건이 많이 알려져 있는 정도다. 그러나 미술평론가 최석태 씨는 “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백주에 ‘네다바이’하는 화상 등 미술관계자들이 적지 않다”며 “고미술품이든 근·현대 미술작품이든 작품의 이력이 반드시 문서로 기록돼야 미술계가 선진화된다”고 강조한다.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해 “내가 그린 게 아니다”라고 말하는 일이 벌어지는 이유도 작품 거래가 정당하지 않게 이뤄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