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2월로 7년간의 BK21 1단계 사업이 완료됐다. 두 달여간의 심사과정을 거쳐 4월26일에는 2단계 사업에 선정된 74개 대학 명단이 발표됐다. 1단계 때와는 달리 교수들의 거리시위도, 학생들의 백지화 요구도, 특정 대학 편중지원 시비도 없었다. 탈락한 대학들도 ‘섭섭하긴 하지만 공개적으로 문제 삼을 건 없다’는 반응이다. 지난 7년간 어떤 변화가 있었기에 BK21은 이미지 개선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걸까.
대학 서열화 고착, 학문의 균형발전 저해, 개발독재식 교육정책이라는 비판 속에서 출발했던 BK21은 ‘대학원 중심의 연구대학 육성’이라는 원래 목표에 상당 부분 근접한 것으로 평가된다.
먼저 BK21에 참여했던 대학교수들의 연구 실적이 크게 개선됐다. 과학기술 분야 교수들의 국제과학논문색인(SCI) 게재 논문 수는 사업 시작 전 3765편에 불과했지만 2005년에는 7060편으로 크게 늘었다. 1단계 사업 기간에 발표된 SCI 게재 논문의 총합은 3만2677건, 같은 기간에 획득한 국제특허의 수는 954건이다. 논문인용지수(IF) 또한 높아졌다. 1인당 IF는 2000년 5.89에 불과했지만 2005년 10.42로 두 배 가까이 증가했다.
인문사회 분야 교수들도 연구성과 부분에서 약진했다. 사업 시작 전 49.13편이었던 국제학술지 게재 논문은 2005년 109.5건으로 크게 늘었다. 학술저서 또한 사업 시작 전 197.98편에서 2005년 219.5편으로 향상됐다.
BK21 참여 대학원생들의 연구실적 또한 눈에 띄게 나아졌다. 과학기술 분야 학생들의 SCI 게재 논문 수는 2000년 1644편에서 2005년 3993편으로 해마다 증가했다. 인문사회 분야 학생들의 국제학술지 게재 논문 수도 2000년 단 2편에서 2005년 30.7편으로 껑충 뛰었다.
SCI 게재 논문 3만2677건
BK21의 핵심적인 추진사업은 ‘연구인력 양성’이었다. 석·박사 과정에 재학 중인 학생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해 안정적으로 학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 2005년까지 BK21은 석사 학위자 1만7543명, 박사 학위자 5937명을 배출했다. 이들은 대학원 재학 중 매달 석사 과정 40만원, 박사 과정 60만원의 인건비를 지급받았다.
이러한 BK21의 지원에 대해 많은 대학원생들은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2005년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10명 중 7~8명 내외가 학비 등 용돈 문제 일부 해결, 개인의 연구능력 향상, 전공지식 심화 등을 이유로 들면서 “BK21 참여에 대해 긍정적”이라고 답했다. BK21의 지원을 받으며 박사 학위를 취득한 서갑양 교수(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는 “선배들처럼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돼 훨씬 안정적인 환경에서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 “BK21이 시작되기 전에는 ‘자기가 좋아서 하는 연구인데 무슨 돈을 받느냐’며 대학원생 인건비 개념이 거의 없었는데, BK21을 계기로 대학원생 복리와 경제적 안정에 대한 보조장치가 마련된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평가했다.
BK21로 양성된 연구인력의 취업 현황은 ‘양호’ 판정을 받았다. 2005년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조사에 따르면 BK21 지원을 받은 석·박사 졸업 인력의 추정 취업률은 80% 내외. 특히 과학기술 분야의 취업률이 85%로 인문사회 분야(65%)보다 20%포인트나 높았다. 하지만 인문사회 분야 박사 학위자의 취업률은 36%에 불과해 심각한 취업난에 놓여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BK21은 진학률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BK21의 지원을 받으며 석사 학위를 획득한 대학원생의 32%가 박사 과정에 진학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 관계자는 “이는 우리나라 전체 대학원의 박사 진학률이 평균 7.7%임을 감안할 때 BK21이 고급인력 배출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과에도 BK21은 몇 가지 아쉬운 점을 남겼다. 1단계 사업에서 가장 실패한 부문으로는 지역대학 육성 분야가 꼽힌다. 지방대학 학부생 양성을 위해 42개 지방대 사업단에 2005년까지 BK21 전체 예산의 25%에 해당하는 3207억원이 지원됐다.
그러나 이들 대학 대부분이 국가기술자격증 취득, 토익성적 취득 등 스스로 제시했던 학생·교육 부문 성과 목표에 미달했다. 교육인적자원부(교육부)가 작성한 2005년도 BK21 평가결과보고서를 보면 이들 대학은 ‘자격증 취득률 저조’ ‘산업체 취업률 저조’ ‘외국어 구사능력 목표치 미달’ 등의 평가를 받았다. 특히 충주대는 토익시험 목표 점수가 550점으로 다른 대학들보다 낮았음에도 목표 달성률이 4%에 그쳤다.
하지만 이러한 저조한 성과에 대해 지방 대학만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애초 BK21은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한정된 자원을 소수 대학원에 지원한다는 계획으로 학부생 육성은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하지만 BK21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면서 정치적인 고려로 당초 취지와는 어긋나게 지역대학 육성 분야가 추가됐다. 교육부 관계자는 “당시 토익점수를 목표치로 설정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의견도 제시됐지만 그대로 밀고 나가 목표치 설정부터 성급하게 이뤄졌던 게 사실”이라고 밝혔다.
BK21은 SCI에 게재된 국내 논문의 양을 크게 늘렸다. 전체 SCI급 논문에서 BK21 참여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40% 이상일 정도다. 하지만 이 같은 SCI급 논문의 양적 팽창은 반대급부로 산학협동의 위축을 가져왔다. 1999년부터 2005년까지 BK21 참여 대학의 산업체 기술이전 건수는 모두 396건으로 비교적 초라한 수치다. 2001년 미국의 스탠퍼드대학은 기술이전 계약으로 4330만 달러(약 406억8468만원)의 수입을 올린 반면, 같은 해 서울대의 기술 이전료 수입은 318만원에 불과했다.
1999년 7월9일 800여 명의 대학교수가 명동성당에 모여 ‘BK21 전면 백지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올해 초 진행된 BK21 2단계 참여 대학 모집에 전국의 대학들은 열성적인 관심을 보였다. 모두 92개 대학, 969개 연구팀이 사업신청서를 제출해 평균 2대 1의 경쟁률을 거쳐 74개 대학 568개 연구팀이 지원 대상에 선정됐다.
이번 2단계 참여 대학 선정과정에서 각 대학은 ‘딴죽걸기’보다는 사업에 포함되기 위해 갖은 애를 썼다는 것이 중론이다. 교육부 엄상현 BK21기획단장은 “지난 7년 동안 대학의 의식이 많이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국내 대학도 세계 대학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깊어지고, 1단계 BK21 참여 대학들이 경쟁력을 강화해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BK21을 안 하면 안 된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것이다.
1단계 문제점 몇 가지 고쳐 추진
1단계 참여 대학 선정 당시 상대적으로 소수의 연구팀이 선정됐던 연세대는 이번에 적극 나선 끝에 모두 12개 연구팀이 선정됐다. 연세대 박진배 연구처장(전기전자공학 전공교수)은 “지난 7년 동안 BK21 참여 대학과 경쟁하기 위해 300억원 규모의 대학 자체 기금을 투입하는 등 참여 대학에 비해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고 말했다. 1999년 당시 ‘BK21 반대’ 구호를 앞장서 외치며 사업신청서 제출조차 거부했던 부산대 또한 2단계 사업에서는 입장을 180도 바꿔 적극 나선 끝에 모두 11개 연구팀이 BK21에 선정되는 데 성공했다. 부산대 산학협력단 단장 지성권 교수는 “1단계 사업에 참여하지 않아 우수한 학생들이 본교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서울대나 KAIST(한국과학기술원)와 같은 BK21 참여 대학으로 가는 등 지난 7년간 엄청난 타격을 입은 것이 사실”이라며 “잃어버린 7년을 되찾기 위해 사활을 걸고 대학 구조조정, 국제산학협력연구원 설립, 연구 인센티브제 도입 등 2단계 사업 참여에 대비해 준비를 해왔다”고 말했다.
BK21 2단계 사업은 2012년까지 매년 2900억원씩 모두 2조300억원을 지원한다.
2단계 사업은 1단계 사업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됐던 몇 가지를 고친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먼저 SCI급 논문 일변도의 평가체계에서 산학협동, 대학원 특성화, 교육 및 연구실적 등으로 평가요소를 다양화하고 분야별로도 각각의 특성에 맞게 평가 잣대를 달리했다. 대학 개혁도 자발적으로 목표를 설정해 추진하도록 하되, 연구비의 투명한 관리를 위한 연구비중앙관리제와 ‘무임승차’를 막고 대학 내 교수들 간의 경쟁을 유발하기 위한 교수업적평가제는 모든 대학에 요구하기로 했다.
7년 후 2단계 사업을 완료한 우리 대학들은 얼만큼의 세계 경쟁력을 갖추게 될까. 서울대 오세정 자연과학대학장은 “이미 국내 대학들은 세계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식이 강화됐다”면서 “연구비중앙관리제나 교수업적평가제는 대학 경쟁력 강화에 큰 도움이 되는 제도인 만큼 대학이 이를 적극 수용하면서 대학 발전에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단계 BK21 빛낸 주역든든한 후원 뜨거운 열정 … 세계적 연구성과 일궈
한국과학기술원(KAIST) 기계사업단
2005년 11월 APEC 행사장에서 부시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알버트 휴보’.
기계사업단은 휴보 개발 외에도 많은 성과를 거둬 지난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5년 참여 교수 1인당 SCI 논문 수는 4.04편으로 미시간대학(2.89)보다 높았다. 참여 대학원생의 논문 발표 수는 모두 870편(목표치 대비 255%)에 달했고, 11명의 대학원생이 국제학술대회에서 수상하는 성과도 거뒀다. 기계사업단이 배출한 3명의 박사 학위자는 영국 사우샘프턴대학, 미국 플로리다대학 등에 교수로도 임용됐다.
경상대 농생명사업단
세계 최초로 난치병 방어 생체메커니즘을 규명한 장호희 박사(왼쪽).
BK21을 계기로 경상남도로부터 매년 20억원씩 지원받는 등 다른 부처의 지원도 다수 유치했다. 청와대, 교육부, 대학혁신포럼 등에서 대학 특성화 성공사례로 소개됐고, 국내 최초로 미국 퍼듀대학과 협정을 맺고 복수박사학위제를 운영하고 있다. 지난 7년간 배출한 60여 명의 박사 학위자 중 40여 명이 하버드대학, 스탠퍼드대학 등에 교수나 연구원으로 취업했다. 대학원생 충원률도 향상됐다. 교수 1인당 대학원생 수가 BK21 시작 전 0.98에서 4.5로 크게 높아졌다.
성균관대 동아시아유교문화교육연구단
1단계 사업에 이어 2단계에서도 BK21에 선정된 동아시아유교문화교육연구단은 지난 7년 동안 눈에 띄는 연구실적을 거뒀다. BK21 시작 전과 비교했을 때 국제학술지 게재 논문은 22배, 전국 규모 학술지 게재 논문은 2배, 학술저서 발간은 1.7배 증가했다. 국제학술지 ‘SJEAS’를 창간해 34개국 486개 기관에 배포하고 있다. 동아시아학 관련 전임 연구인력도 대폭 늘었다. 전임 연구인력은 2000년 14명에서 2005년 89명으로 증가했고 모두 25명의 동아시아학 전임교수를 배출했다. 이들은 일본 도쿄대학, 중국 산둥대학 등의 해외 대학과 서울대, 고려대 등에 임용됐다. 진재교 단장(한문교육학과 교수)은 “무엇보다 학제 간 통합을 이뤄냈다는 것이 가장 큰 성과”라고 말했다. 동양철학, 한국사학, 정치외교학 등 과거 벽이 높았던 학과들이 융합되어 연구함으로써 많은 시너지를 얻었다는 것. 진 단장은 “중국,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의 경제 규모가 커지면서 동아시아학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에 동아시아학의 전망은 밝다”고 말했다.
창원대는 지역대학 육성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를 보인 대학으로 꼽힌다. 현장 적응성이 뛰어난 실용주의 교육으로 산학협력의 모범으로 평가받는다. 학부생들은 방학과 학기 중에 산업체에서 현장교육을 받아야 하며, 매년 두 차례에 걸쳐 100명을 해외에 어학연수 보내고 320명 규모의 영어전용 기숙사를 운영해 학부생들의 어학 실력 함양을 도모하고 있다. 전국로봇경진대회를 매년 개최하는 등 창작동아리 지원도 활발하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창원대는 높은 취업률을 달성했다. 대기업 취업률이 99년 30%에서 지난해 70%로 껑충 뛰었다.
서울대 생물사업단 이윤태 박사
2003년 국내 연구진에 의해 마이크로RNA의 생성과정에 핵심 기능을 하는 효소가 처음 발견됐다. 유전자 기능을 밝히고 질병 유전자 발현을 제어하는 치료 물질로도 응용될 수 있는 획기적인 성과였다. 이 연구 결과는 세계적인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렸는데, 제1 저자는 서울대 생명사업단의 이윤태 박사(사진)였다. 올봄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이 박사는 박사 과정 동안 네이처, EMBO 등에 게재된 4편의 SCI 논문을 발표했다. 이 박사는 “2003년 BK21의 지원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RNA학회에 다녀온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학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경험이 큰 자극이 됐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