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겨울 폭설과 강풍으로 고립됐다가 굴착기를 동원해 제설작업을 벌이는 전북 고창군 고창읍과 지난해 4월 강원도 양양 대형 산불 발생 현장, 올해 프랑스 대정부 학생시위 장면(위부터 시계 방향으로).
외국인 노동자 수가 50만 명을 육박하는 우리나라도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다. 저임금에 인격적인 대우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이들 중 일부가 어느 순간 자신들의 불만을 폭력시위라는 형태로 폭발시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이 같은 사회적(인적) 재난은 그나마 일정한 시간 내에 수습이 가능하다. 전혀 예기치 못한 자연재난이나 환경 및 시설 재난, 테러 등은 시간으로 해결되지 않는 깊은 상처를 남긴다. 11년 전인 1995년 6월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은 것처럼.
전문가들 “미래형 재난에 무방비 상태”
지난해 동남아시아에서 발생했던 ‘쓰나미’와 미국 동부를 강타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후유증은 여전히 지구촌 곳곳에 남아 있다. 최근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폭탄 테러가 발생해 지구를 뒤흔들고 있다. 우리나라도 테러 위협 대상 국가 중 하나다.
바이러스 전염, 정보통신 재난, 뉴테러리즘 등 ‘미래형 재난’은 이보다 더욱 복잡한 형태를 띨 뿐만 아니라, 그동안 경험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규모 피해를 동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만큼 사전 예방은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현 정부의 ‘위기관리시스템’은 어느 정도 수준일까.
정부는 2004년 6월 행정자치부의 소방국과 민방위 재난통제본부, 방재관실 등을 별도로 분리해 재난관리 전담기구인 ‘소방방재청’을 신설했다. 정부는 이어 지난해 11월 270여 개의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을 수립했다. 매뉴얼을 만든 기관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위기관리센터.
NSC는 “실제 위기가 발생한 경우 정부 각 부처와 기관이 즉각적으로 수행해야 할 행동절차와 조치사항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여기에는 상황 예문, 보고·전파 양식, 대국민 발표문 등 각종 현황과 자료들이 수록돼 있다”고 설명했다.
NSC는 이어 매뉴얼 수립 배경에 대해 “피해가 날로 대형화하고 있는 현대사회 위기의 특성을 고려할 때 모든 위기 유형에 대해 사전에 대응책을 강구해둘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NSC의 기획·조정 아래 39개 정부기관이 공동 작성한 참여정부의 성과”라고 자평했다.
그러나 현 정부의 위기관리시스템에 대한 전문가들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이다. 소방방재청이 기대만큼의 역할을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NSC의 위기대응 매뉴얼도 현실성이 크게 떨어지는 등 위기관리시스템이 전반적으로 ‘허점투성이’라는 것.
용인대 김태환 교수(경호학과)는 “화재와 일부 인적 재난, 테러는 소방방재청, 가스와 원자력은 산업자원부, 산업현장의 인적 재난은 노동부, 각종 시설물은 건설교통부 등 재난 형태에 따라 소관 부처가 전혀 다르다”면서 “해당 부처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복합성 재난이 일어날 경우 혼란이 생길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부처 간 책임 떠넘기기가 발생할 소지가 크다”고 지적했다.
관리 조직 많고 실행 부서는 소방방재청뿐
일례로 외국인 노동자 집단의 대규모 폭력시위가 벌어질 경우 소관 부처는 과연 어디일까. 외국인 노동자라는 신분의 특수성 때문에 법무부와 노동부, 외교통상부, 산업자원부 등 관련 부처는 많지만 현 정부의 시스템상 주도적으로 사태를 수습할 부처가 명확하지 않다는 게 김 교수의 지적이다. 사후 수습 단계가 이런 상황인데 사전 예방을 담당하는 부서가 정해져 있을 리는 만무하다.
김 교수는 “현 정부의 위기관리시스템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형 재난에 대해서는 완전 무방비 상태”라며 깊은 우려를 나타냈다. 소방방재청의 역할도 기대 이하다.
“민방위 재난통제본부 때는 교부세를 걷어 관리하는 예산도 많았고, 행자부 소속이어서 시장·군수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통솔하기도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소방방재청이 되면서 교부세도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치단체장도 통솔하기 어려워졌다. 기관의 지위가 외형상 격상됐지만 실질적으로는 격하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지방의 재난관련 부서는 기피 부서로 전락했고, 자치단체장은 재난관련 예산을 늘리기보다 오히려 줄이는 추세다.”
김 교수는 “현재의 소방방재청으로는 정부의 위기관리시스템을 제대로 지원할 수 없다”며 “NSC는 주로 외교·안보 분야의 위기관리에 주력하고, 나머지 국내 각 분야의 위기관리를 총괄할 수 있는 별도의 ‘재난관리부’가 신설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세대 조원철 교수(토목공학과)는 NSC의 위기대응 매뉴얼에 대해 더욱 신랄하게 비판했다. “실제 위기가 발생했을 때 만약 그대로 대처했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게 조 교수의 평가다.
조 교수에 따르면 현재 NSC의 위기대응 매뉴얼은 “태풍이 발생해 우리나라가 직접적인 영향권 내에 포함됐을 때 일정한 지역에 ‘소개령(疏開令)’을 내려 주민들을 대피시켜야 한다”는 원론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그 이후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경찰과 군 병력이 언제 어떻게 동원되고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
결과적으로 아무도 없는 텅 빈 지역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조차 고민되지 않은 전형적인 ‘탁상행정’의 산물이라는 지적이다. 실제로 미국은 대형 허리케인이 발생했을 때 주 방위군을 투입해 주민들을 대피시킨 뒤 치안을 유지한 반면, 우리나라는 태풍 피해가 발생한 이후에야 단지 복구 지원만을 위해 군을 투입해왔다.
조 교수는 현재의 위기관리시스템 운영상 의사결정 구조에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관리 조직이 너무 많다. NSC 위기관리센터와 총리실 산하 각 부문별로 3~4개의 안전관리위원회가 있고 행자부에도 위기관리부서가 있다. 국정원에도 테러 관련한 위기관리센터가 있다. 시어머니가 너무 많다. 실행 부서는 소방방재청뿐인데 실권은 별로 없고 책임만 있다. 그러니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조 교수는 이와 함께 세 가지 제도적 문제점을 꼬집었다. 먼저 현 위기대응 매뉴얼에는 단순한 실행 매뉴얼만 있을 뿐 그 속에 각 부처의 역할분담에 대한 내용이 전혀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 이는 각 부처의 장관들이 NRP(National Responsible Planing·국가책임 분담 계획)에 사인하고, 위기가 발생했을 때 소방방재청 청장의 지휘 아래 움직여야 하는데, 직위서열 때문에 이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또 하나는 재난관리 부문이 국가과학기술표준분류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것. 이 때문에 관련 기술 개발에 정부의 예산을 제대로 지원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재난방재 안전 교육프로그램도 부재
나머지 하나는 교육프로그램의 부재다. 위기관리시스템이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그 사회 구성원의 의식 수준이 중요하다. 선진국의 경우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의 필수 이수과목에 재난방재 및 안전교육에 대한 과목이 포함돼 있다. 어린아이들부터 제대로 교육을 시켜야 사회 전반의 안전의식 수준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대학은 물론 초·중·고교에도 관련 교육프로그램이 전무한 실정이다.
조 교수는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소방방재청을 방재안전부나 처로 승격시키고 위기 발생 시 대통령을 대행해 모든 부처를 총괄 관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반 국민의 안전의식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하루빨리 현장 학습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림대 왕순주 교수(응급의학과)는 재난에 대한 현 정부의 무사 안일한 행태를 비판했다. “위기대응 매뉴얼을 마련한 것은 아마 세계적으로 극히 드문 일일 것이다.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이처럼 기계적인 접근에는 문제가 있다. 위기나 재난은 결코 매뉴얼에 정리돼 있는 대로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
왕 교수는 “해당 부처에 매뉴얼을 대입시켜 끊임없이 훈련해야 조금이나마 매뉴얼을 만든 의미라도 찾을 수 있을 텐데 그런 것도 전혀 이뤄지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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