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의 잇단 파행 사례들.
“전태일 정신 계승하여 민주노총을 박살내야 합니다. 이것이 민주주의입니다.(중략) 노동자의 초심은 이것입니다. 열사정신 계승하여 노동자·농민에게 올 돈 착취하는 사기 일꾼 박살내자!”(ID ‘투쟁!’)
민주노총 홈페이지가 후끈 달아올랐다.
2월10일, 새 지도부 선출을 위한 정기대의원대회가 공전을 거듭하다 단 하나의 안건도 처리하지 못한 채 무산되면서 ‘1500만 노동자의 희망’을 자처해온 민주노총의 체면이 사정없이 구겨진 탓이다.
이날 대회가 파행으로 치닫게 된 이유는 최근 신임 대의원을 선출한 현대차 노조가 그 명단을 상급단체인 금속연맹에 넘겨줬음에도 내부 혼선이 생겨 선관위로 제출되지 못하는 바람에 대의원 자격 유무가 논란거리로 떠오른 때문. 이후 선거제도 전면개선 등 갖가지 주장이 난무하면서 난장판이 됐다.
민주노총이 파열음을 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5년 10월20일, 당시 이수호 집행부가 강승규 전 부위원장의 금품비리 사태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할 때도 피켓 시위를 벌이려던 반대파와 지지파 간에 몸싸움이 벌어져 기자회견이 취소됐다. 같은 해 2월1일 대의원대회에서도 물리적 충돌이 빚어졌다. 민주노총의 사회적 교섭(사회적 대화)에 찬성하는 조합원들과 반대론자들의 팽팽한 대립이 급기야 단상 점거와 시너 투척으로까지 이어져 대회장이 아수라장으로 변한 것.
단 하나의 안건도 처리 못하고 무산
이 같은 파행의 연속은 어디서 비롯하는 걸까. 그 해답은 민주노총 조직 내부에 똬리를 틀어온 뿌리 깊은 정파(政派) 갈등에 있다는 것이 지배적 견해다. 민주노총은 꾸준히 정파 갈등을 겪어왔다. 민주노총 안팎의 분석에 따르면, 정파는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 등 3개로 나뉜다. 이들 정파는 민주노총의 주도권 장악을 위해 다툼을 벌여왔다.
1980년대 운동권의 민족해방(NL) 노선에 뿌리를 둔 국민파는 노동운동이 사회개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시각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실리적 조합주의에 기반을 두고 사회적 교섭 등 협상과 투쟁의 병행을 중시한다. 자연히 성향도 온건하다. 전체 조합원의 40%가량이 국민파로 분류되는데, 이수호 전임 위원장과 민주노총 초대 위원장을 지낸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구속된 강승규 전 부위원장 등이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국민파의 대척점에 자리한 것이 중앙파와 현장파다. 언론에선 흔히 이 두 정파를 묶어 편의상 ‘범좌파’로 칭하면서 민주노총 내 강경파로 분류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두 정파 사이엔 적잖은 차이가 있다. 실제로 이들이 범좌파로 연대한 것은 2002년 8월, 구속된 단병호 위원장 후임으로 유덕상 당시 수석부위원장을 위원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할 때뿐으로, 사회적 교섭에 대한 입장과 운동노선이 다르다. 두 정파 모두 노사관계를 갈등론적 시각에서 바라보긴 하지만, 중앙파는 현장파보다 덜 강경하고 조직 내 폭력사태에도 거의 개입하지 않는다(표 참조).
국민파와 마찬가지로 전체 조합원의 40%가량을 점하는 중앙파는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민중민주(PD) 노선을 취하며, 사회적 교섭이 시기상조라고 여긴다. 중앙파 내부엔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시절부터 중앙조직에서 활동한 이들이 많다. 대표적 인물은 민주노동당 단병호·심상정 의원이다.
일사불란한 노동운동에 걸림돌
현장파는 중앙파보다 한층 좌파적이다. 전투적 조합주의를 취해 자본과의 대화를 용납하지 않고 파업을 선호한다. 사회적 교섭도 물론 저지한다. 현장파에는 ‘노동자의 힘’ ‘전노투(전국노동자투쟁위원회)’ ‘메이데이포럼’ ‘평등연대’ ‘다함께’ 등 5~6개 의견그룹이 참여하고 있다. 이중 ‘노동자의 힘’은 노동자 계급정당 건설을 표방한 정치조직이고, ‘전노투’는 해고 노동자와 노동사회활동가들의 모임으로 ‘노사정 담합 분쇄’와 계급적 단결을 강령으로 삼고 있다. 특히 전노투 산하 조직인 ‘전해투(전국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는 2005년 2월의 대의원대회와 같은 해 10월의 이수호 집행부 총사퇴 기자회견장에서 몸싸움과 폭력사태를 촉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요 인물로는 이갑용 전 위원장과 유덕상 전 위원장 직무대행이 있다. 현장파는 강경 좌파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 세는 약해서 전체 조합원의 10% 정도에 그친다. 좀더 정치하게 구분하면, 공공연맹·금속연맹을 비롯한 대규모 사업장 노조들이 대거 속한 중앙파는 대외적 투쟁에선 총파업 등 강경책을 택하곤 하지만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물리적 충돌을 거의 일으키지 않는다. 반대로 대형 사업장 노조가 속해 있지 못한 현장파는 민주노총 내부에서 목소리를 높이기 위해 정파 간 기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는 형편에 놓여 있다.
문제는 이 3개 정파의 첨예한 갈등이 민주노총의 일사불란한 노동운동 전개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점. 더욱이 그 갈등은 이제 노동운동 노선이나 정책·사업에 관한 입장 차를 넘어 감정적 대립 양상마저 띠고 있는 실정이다.
민주노총 3대 정파 | 국민파 | 중앙파 | 현장파 |
노동운동 노선 | 실리적 조합주의+ 사회적 조합주의 | 사회적 조합주의+ 사회주의 | 전투적 조합주의+ 무정부주의 |
사회적 교섭에 대한 입장 | 긍정적 | 전술적 이용 | 부정적 |
현 노사정위 복귀에 대한 입장 | 대체로 찬성 | 반대 | 반대 |
정치적 입장 | 노무현 정권 지지+ 민주노동당 지지 | 민주노동당 지지 | 민주노동당에 비판적 |
주요 산하 단체 | 전교조, 보건의료노조, 민주택시연맹 | 공공연맹, 금속연맹 | 전해투 |
전임 위원장 및 정치인 | 권영길(1대·국회의원), 이수호(5대) | 단병호(3대·국회의원), 심상정(국회의원) | 이갑용(2대·울산 동구청장), 유덕상(4대) |
위원장 후보 | 조준호(기호 2번) | 김창근(기호 3번) | 이정훈(기호 1번) |
“정파는 어느 조직에나 있을 수 있다. 한 조직의 주요 의사결정을 특정 세력이 독점해선 안 되므로 정파 간 경쟁은 조직의 건강성을 방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최근 민주노총은 이념적 지향이나 현실인식에서의 차별성을 놓고 경쟁하던 과거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부정적 행태를 드러내고 있다.”
조돈문 가톨릭대 교수(사회학)는 “민주노총은 IMF 위기 이후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노동시장 유연화와 같은 급격한 사회·경제적 변화에 연동하여 노사정위 등 제도화된 공간에 얼마나 깊이 참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정파 대립의 벽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며 “그 주된 원인은 역대 민주노총 집행부가 소수 의견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다수 의견만 고지식하게 밀어붙여온 절차적 미숙에 있는데,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스웨덴 등 선진국의 민주노조들과 같은 길을 걷긴 힘들 것”이라고 분석한다.
1995년 창립 이래 최대 위기
민주적이지 못한 조직문화가 1990년대 중반에 누렸던 민주노총의 정치·사회적 영향력을 다 까먹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연구위원(노사관계연구본부장)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안건의 상당수가 현장 조합원과의 충분한 소통 없이 상정되고, 각 정파는 이를 관철하려 극심한 싸움을 벌이다 보니 비정규직·영세사업장 노동자의 정서까지 아우르지 못한다”며 “이런 내재적 비판엔 등한한 채 외부환경 변화에 무조건 방어적인 전략만 취한다면 정파 갈등의 해법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정파 갈등의 원인을 노조 지도자들의 역량 미흡과 선거과잉주의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내부 동향에 정통한 한 노동계 인사는 “2000년대 들어 노동운동 환경이 지극히 열악해졌는데도 노조 지도자들에겐 이를 고민하고 감당할 역량이 부족하다. 그들 중 일부는 민주노총을 개인적 영달을 위한 경유지로 여기기까지 한다”며 “이는 곧 외부적 역량은 결정적으로 취약해지고 노동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냉정한 시선에 대해선 눈을 감아버리는 행태로 이어진다”고 꼬집는다. 체계적인 훈련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출신 지역이나 파벌 같은 변수의 작용으로 노조 지도자나 정파의 리더가 될 경우 자신의 주장이 갖는 정당성의 한계가 무엇인지조차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곧바로 중앙단위의 권력투쟁에 몸을 던져온 관행이 민주노총의 구조적 문제라는 것. 그 결과 국민파는 현장파 등 좌파세력을 이른바 ‘꼴통’으로 여기고, 급진적인 좌파는 사회적 교섭을 중시하는 국민파를 ‘조직을 말아먹는 개량주의 세력’으로 매도하는 등의 폐해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적들은 민주노총의 ‘우울한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연결된다. 민주노동당 이재영 정책실장은 당의 ‘최대 주주’인 민주노총의 앞날을 이렇게 내다본다. “민주노총은 조합원들에게 ‘단결’이 ‘과실’을 보장한다는 경험칙을 심어주지 못했다. 그동안의 총파업들을 보라. 노조에겐 행동의 통일이 금과옥조인데, 민주노총이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나. 언제나 조직 내에서 목소리가 큰 일부 대규모 사업장 노조의 임금인상, 고용보장 등 단기적 이익을 위한 ‘들러리 파업’을 해왔다. 따라서 ‘과실’을 얻어본 경험이 없는 많은 조합원들에게 ‘노동자는 단결하라’는 명제는 교과서에나 나올 법한 교훈일 뿐이다. 민주노총은 단일조직으로서의 동질성을 잃어버렸다고 본다.”
현재 민주노총 새 지도부 선거의 위원장 입후보자들을 정파별로 분석하면 기호 2번 조준호 후보는 국민파, 기호 3번 김창근 후보는 중앙파, 기호 1번 이정훈 후보는 현장파로 구분된다. 민주노총은 파행으로 얼룩진 2월10일의 정기대의원대회에 이어 2월21일에 열릴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새 지도부를 선출할 계획이지만, 정파 갈등의 골은 갈수록 깊어져 대회 자체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다.
1995년 11월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고 있는 민주노총은 ‘민주가 사라진 노총’이라는 오명을 씻을 수 있을까. 갈림길에 선 민주노총의 다음 행보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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