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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을 앞둔 연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 발생 두 달 만에 처음으로 가족 모임을 가졌다. 전국적으로 신규 확진자 수가 한 자리에 머물렀지만, 그래도 외식은 엄두가 나지 않아 집에서 모였다. 모처럼 할아버지와 삼촌, 숙모, 사촌을 만난 아이는 몹시 신이 났다. 나도 참 좋았다. 헤어질 때 “이제는 자주 만나자”고 인사를 나눴다.
엄마들끼리도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5월에는 놀이터라도 마음껏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스크 비상’이 걸렸던 동네 약국의 표정도 환해졌다. “이젠 주말에 쉴 수 있겠죠?” 입원한 어머니를 돌보느라 두 달간 병원에 머물며 바깥출입을 삼가던 지인은 “며칠 지나면 장보러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며 모처럼 흥이 나는 목소리를 들려줬다.
‘이태원 사태’가 드러낸 상호의존성의 중대함
이 모든 바람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됐다. 이태원발(發) 감염 확산으로 잠잠하던 휴대전화에 다시 긴급재난문자가 울리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시즌2’가 시작될지 모른다는 스트레스 때문일까. 불면과 무기력, 우울감, 소화불량을 호소하는 주변 사람이 늘었다. 5살, 3살 아이를 키우는 한 엄마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 이야기 알지? 사랑하는 에우리디체를 지옥에서 데리고 나와 동굴 출구까지 다다랐는데, 그만 뒤돌아보는 바람에 에우리디체가 다시 지옥으로 끌려가버리는…. 지금 내 심정이 딱 오르페우스야”라고 말했다.이번 사태는 우리의 생존과 일상이 서로에게 달려 있다는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e)을 여실하게 드러냈다. 나의 안이함과 부주의가 수많은 사람이 오랜 기간 인내하며 쌓아온 성과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이태원 사태를 겪고 보니 외출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덥더라도 마스크를 쓰고 수시로 손 씻은 사람들의 배려와 인내가 우리를 지키는 힘이었음을 새삼 느낀다.
한편으로 내 가정만 지키려는 노력만으로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해졌다. 코로나19에 자신감을 피력했던 싱가포르의 방역 시스템이 무너진 것은 그 누구도 관심 갖지 않았던 이주노동자 숙소에서의 바이러스 전파였다. 부유한 나라의 이주노동자들은 방 하나에서 10~20명이 함께 생활한다. 증상이 있어도 격리 생활을 꿈꿀 수 없다. 이 점에선 한국도 떳떳하지 못하다. 허오영숙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표의 글 ‘코로나19와 한국의 이주민, 이주여성’에 따르면 코로나19 관련 예방법, 외국인 감염자 치료비, 개학 연기 및 온라인 학습 등에 대한 다국어 안내가 없었다고 한다. 건강보험이 없는 수십만 명의 외국인은 4월20일이 돼서야 공적 마스크 구입이 가능했다. 미등록 외국인 체류자는 지금도 공적 마스크 구입이 불가능하다.
마스크 구하기가 어렵거나 증상이 있어도 일을 쉬지 못하는 취약계층을 세세하게 살피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도 언제든 코로나19 전파 위험이 가중돼 멈춰 설 수 있다. 비록 본인은 증상이 없었지만, 나이 든 조부모와 어린 조카, 그리고 이웃을 큰 위험에 노출시킨 이번 이태원 사태를 쉽게 지나쳐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 된 현재, 우리가 서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는 존재라는 것을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깨닫는 것은 역병의 시대가 주는 역설이다.
서로를 돌보며 긴 터널 지나야
전 칠레 대통령이자 현 유엔인권최고대표인 미첼 바첼레트(Michelle Bachelet)는 미국 타임 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의 건강은 모두의 건강에 달려 있다”며 “모두의 신뢰와 참여가 있어야 역병과 싸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돌봄의 위기를 연구해 온 학자들 또한 우리가 서로 의지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상호의존성을 인식하는 것이 코로나19로 촉발된 전 세계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첫걸음이라고 주장한다.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대 교수 제이미 하킴(Jamie Hakim) 등은 최근 펴낸 책 ‘돌봄 선언(Care Manifesto)'에서 코로나19와 관련해 “우리의 생존이 서로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코로나19가 불러일으킨 인간 존재의 연약함에 대한 두려움을 함께 직면할 수 있게 해준다”며 “누구나 돌봄을 필요로 할 수 있고, 또 누구나 다른 사람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함께 돌봄에 나설 때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썼다. 최근 한국여성단체연합 주최로 열린 ‘코로나19와 젠더’ 토론회에서 양난주 대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또한 “남녀노소 누구나 스스로의 삶을 돌보고 유지하는 일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를 수행할 시간을 내고, 돌봄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내 아이가, 내 가족이 안전하길 원한다면 이웃도 다 함께 안전해야 한다는 깨달음은 단순하지만 힘이 세다. “누구도 내버려둘 수 없다”는 바첼레트의 당부가 와 닿는 이유다. 행정적, 금전적 이유로 마스크를 항상 쓸 수 없는 사람은 없는지, 코로나19의 위험에 더 노출된 사람은 누군지, 아픈데도 일을 쉬지 못하는 사정을 해결할 순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피면서 대책을 요구해야 한다.
인생에는 위기가 있기 마련이라지만,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다른 점은 ‘나만’ 겪는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견뎌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에게 기대는 힘으로 이 긴 터널을 지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