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가 코로나19 기원에 대한 국제조사를 주장하고 있다. [AAP]
노벨위원회는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에 본부가 있지만, 노르웨이 정부로부터 독립된 단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정부가 노르웨이에 경제보복 조치를 단행한 것은 자국의 정치체제를 흔들려는 의도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정부는 결국 중국 정부에 굴복했다. 당시 뵈르게 브렌데 노르웨이 외무장관은 2017년 12월 19일 중국을 방문해 왕이 외교부장을 만나 양국 관계 정상화에 합의했다. 브렌데 장관은 공동성명을 통해 “노르웨이는 6년 전 노벨상에 대한 중국의 우려를 충분히 이해한다”며 “중국의 핵심 이익을 훼손하는 행동을 지지하지 않음은 물론, 장차 양자 관계에 미칠 손실을 피하고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의 ‘약자 괴롭히기’ 수법
호주 목동이 말을 타고 소떼를 몰고 있다. [ABC.jpg]
하지만 모리슨 총리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고 계속 코로나19 기원에 대한 국제적인 조사를 강조하자 중국 정부는 5월 12일 킬코이 파스토랄, JBS 비프시티, 딘모어 플랜트, 노던 코퍼레이티브 등 4개 호주 육가공업체의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이들 4개 업체는 호주의 대중국 쇠고기 수출의 35%를 차지한다. 중국 정부는 또 5월 19일 앞으로 5년간 호주산 보리에 각각 73.6%, 6.9%의 반덤핑 및 반보조금 관세를 부과할 것이라고 밝혔다. 호주는 연간 보리 생산량의 50%를 중국에 수출해왔다. 보리는 맥주 등 양조업이나 가축사료에 쓰이는데, 호주가 대체수출국을 찾기 어려운 반면, 중국은 대체수입국을 찾기 쉬운 품목이다. 호주는 매년 9억8000만~13억 달러(약 1조2000억~1조6000억 원)어치의 보리를 중국에 수출해왔다.
중국 정부의 이러한 경제보복 조치는 자국의 이익과 정치·외교적 입장 등을 관철하기 위해 구사해온 전형적인 ‘약자 괴롭히기’ 수법이다. 특히 중국 정부는 특정국의 핵심 산업을 겨냥해 경제보복 조치를 해왔다. 호주의 주력 수출품은 농축산물이다. 호주의 쇠고기 수출에서 중국의 비중은 2017년 11%, 2018년 14%, 2019년 24%로 꾸준히 증가해왔다. 중국의 쇠고기 전체 수입 규모는 2018년 13억7000만 달러에서 2019년 28억7000만 달러(약 3조5510억 원)로 2배 넘게 늘었다. 중국 정부 입장에선 호주의 급소를 찌른 셈이다. 중국 정부가 이번에 호주산 쇠고기와 보리에 경제보복 조치를 내린 것은 호주가 중국 이외에는 마땅한 판로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호주, 미국과 안보동맹 강화
중국으로 수출되는 호주산 철광석이 대형 운반선에 실리고 있다. [BHP]
그렇다면 호주 정부는 중국 정부의 경제보복 조치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까. 호주는 경제적으로 중국에 상당히 의존해왔다. 호주는 2019 회계연도(2018년 7월~2019년 6월)에 1532억 호주달러(약 124조 원)의 상품과 서비스를 중국에 수출했다. 이는 호주 전체 수출액의 32.6%를 차지한다. 수출 대상 2, 3위인 일본, 한국의 비중이 13.1%, 5.9%에 불과한 점을 감안하면 중국에 대한 편중이 너무 심하다. 호주의 지난해 대중국 무역흑자는 714억 호주달러(약 57조 8000억 원)에 달했다.
또 호주 대학들의 중국인 유학생 의존도도 크다. 호주 대학의 전체 학생 가운데 중국인 유학생이 10%에 이른다. 코로나19 사태로 상당수 중국인 유학생이 호주에 입국하지 못하면서 호주 대학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중국인 관광객도 전혀 없어 호주 관광산업 역시 초토화됐다. 그만큼 중국의 경제보복 조치가 계속될 경우 호주는 경제적으로 상당한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다. 호주 시드니공과대 호주·중국 관계 연구소의 제임스 로렌세슨과 마이클 저우 연구원은 “대중국 수출 비중이 높은 호주는 이번 경제보복 조치로 엄청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호주에선 코로나19 사태로 반중정서가 고조되고 있다. 실제로 아시아계 유학생들이 멜버른 등 주요 도시에서 인종 차별적인 폭언과 폭행을 당하는 일이 잇따라 발생했다. 이 때문에 중국인 유학생은 봉변을 당할까 봐 밖에 나가기조차 두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주멜버른 중국 총영사관 측은 호주 경찰에 자국 유학생들의 안전을 보장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호주 도시들은 중국 도시들과 자매결연을 끊고 있다. 뉴사우스웨일스주 와가와가시는 중국 쿤밍시와 32년간 이어온 자매결연 관계를 단절했다.
“중국의 쇠고기 수입 제한은 양아치 짓”
중국으로 수출되는 호주산 쇠고기들. [FoodMag.au]
반면 육류업계 등 호주 경제계는 중국과 관계 악화로 피해가 갈수록 늘어날 것이 분명하다면서 중국과 타협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한스 헨드리쉬케 시드니대 중국경영대학 교수는 “현실적으로 중국을 대체할 만한 시장이 없다”며 “호주의 경제성장에는 중국 경제가 있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호주 정부는 중국 정부의 이번 농축산물 경제보복 조치와 관련해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 또한 자국 최대 수출품목인 철광석, 석탄 같은 천연자원은 중국이 반드시 수입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보복 조치를 피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모리슨 총리는 “호주는 지금까지 지향해온 가치들을 굳건히 유지할 것”이라며 중국 정부의 경제보복 조치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미국 정부 역시 호주 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이웃국가인 뉴질랜드 정부도 호주 정부의 입장을 지지하고 나섰다. 다윗인 호주가 골리앗인 중국의 압박을 버텨낼 수 있을지 주목된다.